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72화 (72/232)

72.

제플린은 기억을 잃은 상태여도 대부분의 업무를 손쉽게 해냈다.

기초적인 상식이나 그의 예술적 지식, 그리고 사업적 감각 등은 여전히 제플린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듯했다.

오히려 예전의 불같은 성질머리가 없어지는 바람에 더 영민해진 것 같기도 했다.

옥타비오의 말로는 곧 있으면 국무 회의에 참석할 수 있을 정도로 제플린이 회복되었다고 했다.

물론 제플린이 완전히 복귀한다 하더라도 기억을 되찾지 않는 한 옥타비오의 꼭두각시로서 일하는 거나 다름없겠지만.

제플린이 기절해 있는 동안 그가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 탓에 제플린은 간간이 연회장에 들려 진행 상태를 확인하기만 했다.

애초에 제플린은 본인이 이 무도회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까지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알리시아가 가을 무도회를 주관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데본셔가의 가을 무도회는 흔한 사교 행사가 아니었다.

다음 해에 데본셔 백작가에서 진행할 사업안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투자자를 모으고, 그동안 수집한 예술품을 공개하는 뜻깊은 행사였다.

특히 빛의 전당을 사람들에게 내보이고 감상평을 나누는 시간은 제플린이 일 년 중 가장 고대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대체 백작님의 기억이 돌아오면 어쩌려고 저리들 오만방자하게 구는지.’

그레이스는 혀를 찼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희망은 하루빨리 제플린이 기억을 되찾는 일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의 기억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옥타비오가 또 장난질을 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대로 무도회가 망가지는 걸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단 말인가.’

그레이스는 알리시아의 끔찍한 취향으로 범벅되어 가는 연회장을 둘러보며 한탄했다.

알리시아는 그레이스가 아침부터 공들여 꾸며 놓은 모든 것을 제 입맛대로 바꾸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자신과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사사건건 방해하려 들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제플린에게 달려가 모든 것을 고해바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옥타비오가 항상 제플린의 곁을 맴돌며 철통같이 진실을 은폐하고 있었다.

백작저 전체에 함구령이 내려져 있어 고용인 중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없었다.

꼼짝없이 알리시아를 마님 취급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대로 두실 거예요? 흉측해라…….”

어느새 다가온 수잔이 연회장을 훑어보며 말했다. 과하게 휘황찬란한 전경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레이스가 부서질 듯 이를 악물었다.

“둬야지 어쩌겠니. 시간이 지나면 백작님도 깨달으시겠지. 저 계집이 감히 레베카 님을 사칭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때가 되면 오늘날의 수모를 톡톡히 갚아주겠어.”

신랄한 그레이스의 비난에 수잔이 흠칫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레이스는 당장이라도 목을 조를 것 같은 눈빛으로 알리시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곧 한숨을 내쉬었다.

“저 꼴을 보지 않으려면 여기서 벗어나야겠구나.”

밖으로 향하는 그레이스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저택이 온통 다홍색으로 물들었다.

그레이스는 비척거리며 정처 없이 거닐었다.

그녀는 저택의 담벼락을 쓸었다. 벽돌 하나하나를 쓰다듬는 그녀의 손끝에 지난 추억들이 아롱아롱 맺혔다.

저택에 있는 그 어느 것 하나 그녀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니 내 것이었다. 이곳을 누구보다 잘 알고 아끼는 자신의 것이어야만 했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이 사랑하는 것은 모조리 망가지고 있는지.

처음은 레일라였다. 그리고 레베카가, 이제는 데본셔 백작가 전체가 무너지고 있었다.

문득 자신의 딸 레일라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조금 있으면 그 아이의 기일이었다.

‘괘씸한 것.’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걸로도 모자라 어미를 두고 먼저 가버리다니.

그레이스는 숨이 꺼져가던 레일라가 희미하게 웃으며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제야 당신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겠군요. 이번 생은 지옥 같은 삶이었습니다. 영원히 잊지 마세요. 저를 죽인 건 어머니예요.’

“하아…….”

그때 받았던 충격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그레이스는 벽을 짚고 잠시 숨을 골라야만 했다.

대체 그 아이가 자신에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가장 좋은 것만 주고 좋은 것만 가르쳤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되갚을 수 있느냔 말인가.

“망상일 뿐이다. 아마도 그때 내가 제정신이 아니어서 헛것을 들은 거겠지.”

그래서 그레이스는 자신을 속이는 걸 택했다.

레일라와의 추억을 아름답게 포장하고 추악한 진실을 그 안에 감추어 두었다.

그래야 살 수 있었다.

레일라는 그녀가 겪은 첫 번째 상실이었다.

남편이 죽었을 때는 별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상실이라는 거창한 말로 부를 것도 못되었다.

하지만 그 아이의 죽음만큼은 항상 그녀를 아프게 찔렀다.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딸아이의 모습에 가슴이 답답했다. 울고 싶었다.

그러나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전쟁터 같은 이곳에서 눈물을 보이는 건 먹히기 좋은 구실이었다.

그레이스는 가까스로 눈물을 참고 후원의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제플린이 어릴 때 놀던 작은 오두막이 그곳에 있었다.

오랫동안 백작가에는 아이가 없었다. 그 탓에 오두막은 방치하다시피 되었다.

그레이스는 주인을 잃은 오두막을 자기 취향대로 꾸며 놓았다. 어느새 허름한 오두막은 여느 저택 못지않은 응접실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녀는 마음의 안정이 필요할 때마다 이 오두막을 찾았다.

그레이스는 이곳에서 데본셔가의 주인이 된 상상을 하며 고급 찻잔을 기울였다.

그러면 절망적이던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지금 당장 그런 게 필요했다.

“함께 가시죠.”

안식을 찾으며 그레이스가 오두막의 문손잡이를 잡는 순간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녀의 고막을 나지막하게 건드렸다.

고개를 돌린 그레이스는 날카로운 갈색 눈동자를 발견하곤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갈색 눈동자의 주인은 곧 그레이스의 목을 깔끔하게 내리쳤다.

잠깐 눈앞이 번쩍이더니 그녀의 정신이 툭 하고 끊겼다.

* * *

“안녕히 가십시오.”

휴식 시간 전 마지막 손님을 배웅한 뒤 산드라는 어깨를 두드리며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종업원이 산드라에게 얼음주머니를 가져다주자 산드라는 그것을 이마에 얹었다.

“아이고! 이제야 살 것 같네. 세상에나, 귀에서 피가 나는 것 같아.”

“요하네스 공작님과 그 미스터리한 여자 때문이죠?”

가게 문 앞에 휴식 시간이라는 팻말을 내걸며 종업원이 넌지시 말했다.

산드라는 그 이름을 듣기만 해도 골이 아프다는 듯 신음을 냈다.

“그래. 오늘 몇 명이나 그 이야기를 떠들어 대는지, 매번 처음 듣는 척을 하느라 죽는 줄 알았어.”

요하네스 공작이 처음으로 여자를 자신의 성에 들였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게다가 그 여자가 검은 베일을 쓴 채 공작 성을 방문했다는 점이 소문의 흥미를 한껏 돋웠다.

누구는 외국의 공주라 했고, 누구는 천한 신분의 사람이라 했고, 누구는 유부녀라 했다.

근거 없는 낭설이 떠돌았지만 확실한 점은 하나 있었다.

요하네스 공작이 그 여자에게 푹 빠졌다는 점이었다.

공작 성에서 일한다는 익명인의 제보에 따르면, 요하네스 공작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그만이 드나드는 은밀한 방으로 데려갔다고 했다.

그곳은 측근 집사와 요하네스 공작만이 들어갈 수 있는 방이었다.

그런 곳에 그 여자를 데려간 것을 보아 분명 두 사람이 가벼운 관계는 아닐 거라는 추측이 쏟아져 나왔다.

오늘 들은 정보들을 짜 맞춰 보던 산드라가 소파에서 비척이며 일어났다.

“잠시 방에서 쉴 테니 아무도 들이지 마.”

“알겠습니다.”

산드라는 가게 뒤편에 마련된 휴게실로 향했다. 그리고 푹신한 침대로 들어가 짧은 잠을 청했다.

저녁에 들이닥칠 수다스런 귀부인들을 상대하려면 조금이라도 체력을 보충해 둬야 했다.

하지만 좀체 잠이 오지 않았다.

산드라도 요하네스 공작의 여자가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그 여자의 정체가 누구든 간에 요하네스 공작의 사랑을 받는 여인이라면 사교계의 판도가 뒤집힐지도 몰랐다.

현재 로탄더스 제국의 사교계는 페튜니아 후작 부인의 세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횡포에 피해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페튜니아를 견줄 수 있는 경쟁자의 등장은 산드라에게도 달가운 일이었다.

사교계에서 파가 나뉘었을 때 이득을 보는 건 자신과 같은 장사치들이었다.

서로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과 장신구를 얻기 위해 눈을 켜고 달려들 테니까.

산드라가 요하네스 공작의 비밀스런 연인이 가져다줄 이득을 생각하고 있을 때, 종업원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님 한 분이 오셨는데…….”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잖니.”

피곤에 찌든 탓에 다소 날 선 음성으로 산드라가 물었다.

종업원이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당신의 뮤즈가 왔다고 말하면 알 거라고 하시던데요.”

“그게 무슨 말이야. 당장 돌려보내…….”

손을 내저으려던 산드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허둥지둥 안대를 벗었다.

“생김새가 어떻든?”

“잘 모르겠습니다. 검은 베일을 쓰고 있어서요.”

얼굴을 숨기고 있는 걸 보니 그 사람이 분명했다.

산드라는 서둘러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손님용 의자에 묘령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큰 키와 전체적인 맵시를 보자마자 산드라는 바로 알아차렸다.

애초에 자신이 뮤즈라고 말했던 사람은 제국을 통틀어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레베카!’

레베카는 산드라를 보자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나요?”

“저는 당연히 잘 지냈…….”

산드라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는 종업원을 곁눈질했다.

얼굴을 가리고 자신을 찾아온 것으로 미뤄 보았을 때, 레베카는 지금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흠흠. 너는 잠시 시장에 심부름을 다녀오거라. 아침에 일러두었던 원단을 받아와.”

“예? 하지만 그건 제 소관이 아닌데…….”

“갔다 오라면 갔다 올 것이지, 왜 이렇게 잔말이 많을까. 냉큼 나갔다 와!”

산드라는 종업원을 내쫓듯이 내보냈다.

종업원이 시장 쪽으로 걸어가는 걸 확인한 뒤 산드라는 잽싸게 가게 문을 잠그고 커튼을 모두 내렸다.

산드라가 벅찬 가슴을 붙잡고 뒤돌아 레베카를 향했다.

레베카가 천천히 베일을 벗었다.

서서히 드러나는 그녀의 자태에 산드라는 순간 숨 쉬는 걸 잊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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