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73화 (73/232)

73.

“당신의 배려에 감사드려요.”

커튼 틈새로 들어오는 옅은 햇빛에도 레베카는 온전히 빛나고 있었다.

하얗다 못해 창백했던 얼굴에는 혈색이 돌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 원래도 빨갰던 그녀의 입술이 더욱더 탐스러운 붉은빛을 내었다. 전보다 조금 살이 오른 것 같았지만 그래서 더욱 좋았다.

산드라는 너무 마른 모델보다는 적당히 풍만한 모델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물론 레베카는 어떤 몸이든 그녀에게 완벽한 모델이었지만.

우아하게 떨어지는 레베카의 유려한 곡선을 바라보던 산드라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당장 입을 막지 않으면 저번처럼 꼴사납게 주접을 한 바가지나 쏟아낼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레베카 님! 이게 어찌 된 일인가요. 아프시다고 들었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요. 하지만 이제 다 나았답니다.”

“신병이라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성녀가 되신 건가요?”

“아니요. 하지만 다른 성스러운 기운을 받아 회복할 수 있었어요.”

레베카가 수줍게 웃었다.

산드라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두 눈을 깜빡였다.

“곧 알 수 있을 거예요.”

의미심장한 그녀의 웃음에 넋을 놓고 있던 산드라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산드라는 서둘러 안쪽에 걸려 있는 화려한 실크 커튼을 젖혔다.

각종 거울이 즐비해 있는 넓은 공간이 보였다.

특별 고객만이 들어올 수 있는 전용 쇼룸이었다. 산드라는 레베카를 그곳으로 안내했다.

산드라가 간단한 다과를 내오고 자리에 앉자 레베카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놀랐겠어요.”

“놀라긴 했지만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그동안 어디서 뭘 하시는지 걱정했거든요.”

“제 걱정을 해주었다니 감사하군요. 그나저나 데본셔 백작가의 무도회로 많이 바쁘시겠군요.”

레베카는 매장 한편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던 드레스를 떠올리며 말했다.

데본셔 백작이라는 말에 산드라는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표정 지을 것 없어요. 이미 다 지난 일이기도 하고, 저 때문에 산드라가 대목을 놓쳐서는 안 되지요. 그나저나 데본셔 백작가의 알리시아라는 부인은 만나보셨나요?”

“그것이…….”

“만나보셨군요. 아마 산드라에게 무도회 드레스도 의뢰했겠죠?”

“예…….”

말간 레베카의 눈빛에 산드라는 차마 거짓을 고할 수 없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저도 맡기 싫었지만 먹고살아야 하는 처지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머. 꾸짖는 게 아니에요. 산드라. 당신은 당연히 당신의 일을 하는 게 맞죠. 제가 막을 권리도 없고요. 오늘 이렇게 찾아온 건, 저도 드레스 의뢰를 하기 위해서예요.”

“드레스를요?”

“아. 미리 예약을 하지 않아 곤란할까요?”

산드라는 레베카가 마음을 바꿀까 허겁지겁 대답했다.

“아니요! 레베카 님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제 뮤즈시니까요! 어떤 디자인을 원하시나요?”

“크게 바라는 건 없어요. 단지…….”

레베카가 미소를 지었다.

산드라는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미소에 눈을 떼지 못했다.

“가장 아름다웠으면 좋겠어요. 무도회에서 그 누구보다 주목받을 수 있게.”

“레베카 님은 거적때기를 입으셔도 주목받으실 거예요.”

진심이 담긴 말에 레베카는 웃음을 터뜨렸다.

산드라의 칭찬은 언제나 순수하고 진실한 것이었다. 그래서 레베카를 항상 즐겁게 해주었다.

“그래도 거적때기를 입고 춤을 출 수는 없으니까요. 특히 알리시아, 그 부인의 드레스보다 화려했으면 해요.”

“알리시아 부인이요…….”

산드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알리시아가 의뢰한 드레스 디자인을 떠올려 봤다.

레베카가 그녀의 침묵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려울까요?”

“아닙니다. 할 수 있어요. 누구의 의뢰인데 제가 거절하겠어요. 제 영혼을 다 바치겠습니다.”

산드라의 머릿속에 벌써 디자인의 초안이 떠올랐다.

역시 레베카는 최고의 뮤즈였다.

레베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이건 그 대신이라고는 뭣하지만, 훗날 제 웨딩드레스를 당신에게 의뢰하기로 약속할게요.”

산드라가 멈칫했다.

웨딩드레스라고?

“막 이혼한 사람이 할 이야기는 아니지요? 하지만 곧 제 결혼식이 있을 예정이랍니다.”

산드라는 뜻밖의 소식에 놀라 입을 뻐끔거렸다.

“산드라에게만 특별히 일러주는 비밀이에요. 아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건 별로라서요. 그러다가 잘 되어 가던 일도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니까요. 제 말 알아듣겠죠?”

레베카의 말에 산드라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산드라의 의상실이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의 뛰어난 실력도 있었지만, 무거운 그녀의 입도 한몫했다.

온갖 사교계의 소식이 몰려드는 그녀의 가게에서 은밀한 소문이 빠져나가는 일은 없었다.

그렇기에 수다 친구를 삼을 겸 그녀를 찾는 귀부인들이 많았다.

레베카는 그런 산드라의 성미를 잘 알았기에 마음 놓고 그녀에게 진실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녀를 찾은 건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레베카 님. 당신의 웨딩드레스를 제가 만들지 못한 게 인생의 한이랍니다.’

산드라는 레베카의 치수를 잴 때마다 한탄하고는 했었다.

레베카가 제플린과 결혼식을 올릴 때, 산드라는 아직 자신의 의상실을 개업하기 이전이었다.

레베카가 입었다던 웨딩드레스의 디자인을 보며 산드라는 남몰래 울분을 터뜨리곤 했다.

‘아니 레베카 님의 장점을 하나도 못 살렸잖아! 레이스는 또 얼마나 촌스러운지!’

자신이 만들면 세기의 걸작이 탄생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걸 또 레베카가 입으면 얼마나 눈부시겠는가!

그런 산드라의 꿈을 레베카는 잘 알았기에 그녀를 친히 찾아왔다.

레베카의 웨딩드레스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산드라는 레베카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지지할 것이었다.

‘혹시…….’

산드라는 멍하니 레베카를 올려다보았다. 수줍게 웃는 그녀는 충분히 사랑받는 새 신부 같았다.

이전보다 행복해 보이는 레베카의 모습에 산드라는 문득 요하네스 공작의 연인을 떠올렸다.

오늘 그녀가 쓰고 온 검은 베일도 그렇고, 여러모로 정황이 들어맞았다.

게다가 레베카는 요하네스 공작과 춤을 췄던 전적도 있었다.

산드라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입을 틀어막았다.

“레베카 님, 설마 그 상대가……. 요, 요하네스 공작…….”

레베카는 아무런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산드라에게 윙크를 날렸다.

그걸로 답변은 충분했다.

“무덤까지 가져가겠습니다!”

레베카가 자신에게만 이 엄청난 비밀을 털어놓았다는 사실에 내심 흥분되었다.

그녀의 친밀한 친우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요하네스 공작과 재혼이라니! 엄청난 스캔들이었다.

이것저것 묻고 싶지만 힘겹게 입을 다물고 있는 산드라를 보고 레베카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산드라라면 저를 도와주실 줄 알았어요.”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또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요?”

“하나 있긴 한데. 혹시 지금 당장 드레스를 살 수 있을까요?”

“맞춤 드레스라면 곤란하지만 전시용으로 내어놓은 드레스라면 가능합니다. 저희 가게의 마네킹에 걸린 옷의 대부분은 레베카 님의 치수에 맞춰 제작해 두었으니까요. 사이즈가 바뀐 것 같긴 하지만 그 정도는 금방 수선할 수 있어요.”

“그걸 받아 가도 되나요?”

“당연하지요. 언제든지 원하는 디자인의 드레스가 있다면 가게로 연락해 주세요. 대기해 놓겠습니다. 대신 웨딩드레스는 꼭 제가 제작하게 해주시는 거죠?”

레베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산드라가 싫다고 하더라도 간곡히 부탁할 참이었다.

산드라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럴 게 아니라, 지금 당장 드레스들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동안 레베카 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드레스가 많아서 한동안 끙끙 앓았답니다.”

레베카는 부리나케 옷장을 여는 산드라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뮤즈라…….’

그러고 보니 어릴 적부터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예술가가 많았었다.

그 사람들도 지금의 산드라처럼 자신을 보며 열정에 찬 눈을 반짝거리곤 했다.

그중에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예술가들도 많았다.

그런 천재들의 작품에 자신이 참여한다는 사실이 기뻤을 때도 있었다.

철없던 때는 전시장에 걸린 자신의 초상화를 보며 우쭐대기도 했었다.

하지만 일시적인 만족감이 거품처럼 사그라지면 지독한 회의감이 무겁게 그녀를 짓눌렀다.

과연 그들이 그녀의 푸른 눈 너머로 보고 있는 것은 아름다운 레베카일까, 아니면 인간 레베카일까.

“레베카 님!”

산드라의 부름에 레베카는 퍼뜩 상념에서 벗어났다. 수십 벌의 드레스가 바퀴가 달린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마음껏 골라보세요!”

산드라는 레베카가 어떤 드레스를 고를지 상상했다.

레몬색 드레스를 고르실까? 아니, 이제 곧 가을이니 조금 어두운 계통의 드레스를 고르실 수도 있지.

그럼 빛나는 레베카 님의 피부가 더 아름다워 보이겠구나. 내 드레스도 더 돋보이고.

레베카가 자신의 드레스를 입고 산책이라도 해준다면 다음 날 가게의 매출이 두 배는 넘게 뛰었다.

그녀는 어딜 가나 시선을 사로잡는 사람이었다.

산드라가 레베카를 좋아하는 건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레베카와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언제나 고객의 비위를 맞추는 게 업인 산드라의 피로도는 상당했다.

하지만 레베카는 보통의 고객들과는 달랐다.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은 적도 없었고, 조용히 자신의 말을 경청해주었다.

무엇보다 평민에 장사치인 자신을 사람으로 대하는 레베카의 태도가 산드라의 마음을 울렸다.

레베카는 산드라가 애써 골라온 드레스들을 지나쳐 커다란 벽장을 열었다.

철 지난 드레스를 모아 두는 벽장이었다. 옷을 여러 벌 뒤적이던 레베카는 옷장 한구석에 걸려 있는 드레스를 가리켰다.

“이게 좋겠군요.”

산드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베카가 고른 건 장례식에나 입을 법한 드레스였다.

게다가 유행이 지난 지도 오래라 곧 어딘가로 기부할 예정이었다.

“정말 그걸로 괜찮으시겠어요? 부담스러워 그러시는 거라면…….”

“아니에요. 제가 찾던 완벽한 드레스예요.”

레베카는 활짝 웃으며 드레스를 옷장에서 꺼내 들었다.

* * *

얼굴에 쓰인 자루 너머로 빛이 어렴풋이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자신을 납치한 사람이 들어온 것일까.

저택에서 정신을 잃은 후, 그레이스는 의자에 포박된 채로 한참을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대체 누가 나를…….’

그레이스는 자신에게 앙심을 품을 사람을 여럿 떠올려 보였다.

옥타비오 말고는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을 해코지할 만큼 적대심이 있는 자들은 이미 다 죽었다.

제플린에게 한마디 언질만 줘도 사냥개들이 알아서 원수를 해결해줬다.

제 손에 피 묻힐 일이 없다는 건 제플린의 측근이 된 특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옥타비오가 범인이라기엔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옥타비오의 영역에 침범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둘은 적당한 세력을 유지하며 데본셔 백작가를 이끌어 오고 있었다.

자신이 없어지면 귀찮아질 것은 오히려 옥타비오였다. 자신만큼 유능한 하녀장을 찾는 건 불가능한 일일 테니.

‘그렇다면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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