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그레이스가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확하고 자루가 벗겨졌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환한 빛에 그레이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서서히 눈을 떴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너무 놀라 입을 벌렸다.
“칸나! 너…….”
“오랜만일세. 하녀장.”
하지만 입을 연 건 칸나가 아니라 그녀의 옆에 서 있는 정체불명의 여자였다.
그런데 목소리가 익숙했다.
그레이스가 기억을 더듬고 있는 사이, 정체불명의 여자가 서서히 로브의 모자를 벗었다.
여자의 정체를 확인한 그레이스는 기절하기 직전인 듯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레, 레베카 님?”
“그래. 날세.”
믿을 수 없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레베카의 모습은 수포로 뒤덮여 흉측하기 그지없는 몰골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그녀에게선 끔찍한 수포 자국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예전 그녀의 모습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자태로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신 겁니까?”
“어떻게 원래대로 돌아왔냐고? 난 지금까지 원래의 나였네. 달라진 건 당신들의 시선뿐이지.”
차가운 레베카의 시선에 그레이스는 입을 뻐끔거렸다.
레베카가 뭔가 깨달은 듯 말했다.
“아, 그렇지. 이제 당신과 나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하대하는 건 그만해야겠지? 난 이제 당신이 아이처럼 보살피던 데본셔 백작 부인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레베카 님.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레베카가 뭐라 하든 그레이스의 머릿속엔 원래의 황홀한 모습을 되찾은 레베카로 가득 차 있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자신이 아끼던 모습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아서.
그레이스는 잃어버린 아이를 되찾은 부모처럼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눈물의 의미를 깨달은 레베카의 얼굴이 처참히 구겨졌다. 불쾌했다.
하지만 굳이 그 감상을 지금 내뱉지는 않았다.
그레이스는 아직 쓸 곳이 많은 인물이었다.
“제가 돌아온 게 퍽 감명 깊었나 봅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실 정도라면.”
“당연하지요. 레베카 님, 백작님께서 기억을 잃으셨습니다. 그동안 알리시아 그것이 안주인의 자리를 꿰찼고요. 그러나 이제 살았습니다. 다시 백작저로 돌아오세요. 백작님도 기꺼이 그동안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용서라 하셨습니까?”
어이없다는 탄식이 레베카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레이스는 처참하게 구겨지는 그녀의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예. 백작님은 분명히 용서해주실 겁니다. 그래서 레베카 님을 다시 백작 부인으로 만들어 주실 겁니다. 그러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오겠지요. 아, 너무 기쁜 일입니다!”
칸나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품 안에 숨겨둔 작은 칼을 빼 들었다.
레베카는 칸나의 손을 흘깃 보더니 이내 조용히 그녀의 손에서 칼을 빼앗았다.
그리고 칼을 손에 쥔 채 그레이스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갔다.
레베카는 그레이스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 그녀의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레이스의 눈앞에 칼날이 날아들었다.
레베카가 일으킨 바람이 작은 공간을 그나마 밝혀주던 촛불을 꺼트렸다.
곧 사위가 어두컴컴해졌다.
조그마한 창으로 낮게 깔린 땅거미가 새어 들어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칸나는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레베카의 뒷모습에서 스산한 기운이 뻗쳤다.
“그레이스 던컨. 감히 내게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라고 하는 건가? 그것도 용서를 빌라고? 하나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주지. 나는 스스로 박차고 나온 거야. 당신들이 날 내쫓은 게 아니라.”
“커…… 커헉.”
당장이라도 눈을 찌를 것 같은 날카로운 날붙이에 그레이스는 오금을 덜덜 떨었다.
레베카가 음산하게 읊조렸다.
“다시 용서를 빌고 돌아오라고? 무엇을 용서한다는 거지? 아아, 감히 인형 따위가 멋대로 망가지고, 거기에 또 다른 인형을 생산해낼 수 없는 몸이 된걸? 네놈들이 날 가지고 그 빌어먹을 인형 놀이를 할 동안 나는 살아 있었어. 멀쩡히 숨을 쉬고 있었단 말이야!”
“끄아악!”
레베카는 그레이스의 머리채를 잡은 손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두피가 그대로 벗겨져 나갈 것 같은 통증에 그레이스가 비명을 질렀다.
레베카는 칼로 그레이스의 볼을 꾸욱 누르고 말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날 이렇게 만든 네놈들의 목을 하나씩 그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야. 하지만 그건 너무 쉽잖아? 살아 있는 걸 후회하게 만들어 줘야겠지. 안 그래?”
레베카는 칼을 거두고 세차게 그레이스의 머리를 놓았다.
칼이 파고든 그레이스의 뺨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단정하지 않은 역사가 없던 그레이스의 머리가 형편없이 흐트러졌다.
산발이 된 채로 그레이스는 흐느꼈다.
“원래…… 원래 이런 분이 아니시잖아요.”
레베카가 삭막하게 대답했다.
“그래. 난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당신들이 날 이렇게 만들었어.”
그레이스가 마지막 발악을 하듯 눈을 치켜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참입니까? 복수라도 하시게요? 당신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위대한 데본셔 백작가에 당신이 흠집 하나 낼 수 있다는 그런 헛된 꿈을 꾸는 건 아니겠지요?”
“헛된 꿈일수록 간절히 이루고 싶은 법이지. 그리고 내게 왜 힘이 없다는 건지 잘 모르겠군.”
그레이스는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레베카를 올려다봤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천사 같던 백작 부인이 자신에게 칼을 들고 달려들지를 않나. 저 예쁜 입술에 험한 말을 올리지를 않나.
이 모든 게 꿈 같았다.
그리고 이게 꿈일 것이라는 생각은 이윽고 이어지는 레베카의 모습에 더더욱 확실해졌다.
레베카의 지시에 칸나가 천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는 붉은색 향초에 불을 붙였다.
레베카는 서서히 로브를 벗고 그레이스 앞에 섰다.
그리고 아까 보였던 살벌한 눈빛을 벗어버리고 부드럽게 그레이스를 바라봤다.
“내겐 당신이 있잖습니까. 그런데 왜 힘이 없다는 거죠?”
“아, 아…….”
그레이스의 이가 덜덜 맞부딪히며 떨렸다. 후환으로 가득 찬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레, 레일라…….”
레베카의 입 끝이 서서히 올라갔다.
한껏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은 그녀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단정한 밤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레이스의 딸 레일라가 자주 입었던 것과 같은 드레스였다.
키가 작고 갈색 머리에 검은 눈을 가졌던 레일라와 레베카는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어쩐지 레일라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레일라! 레일라!”
그레이스는 절규하며 외쳤다. 그녀의 절규엔 미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생각보다 더 극적인 반응에 레베카는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레베카는 웃었다.
승리의 미소였다.
레일라 던컨은 좀처럼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여자였다.
걸음걸이는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고, 제 의견을 정확히 내뱉는 적이 없었다.
레일라가 제 곁에 몇십 분이나 있었음에도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해 뒤늦게 흠칫 놀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건강이 나빠지기 전 레일라는 그레이스를 따라 백작저의 각종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레이스는 레일라를 데본셔가의 차기 하녀장으로 점찍고는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교육을 했다.
그녀의 건강이 나빠지지 않았더라면 레일라는 조만간 데본셔에서 일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온갖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레일라는 언제나 수수한 옷차림을 한 채 병풍처럼 서 있었다.
레베카가 제플린의 취향이었던 노출이 심하고 반짝이는 드레스를 입을 때면 그레이스는 언제나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드레스를 옷핀으로 여미었다.
‘정숙할수록 여자는 아름다운 법입니다.’
그런 그레이스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레일라의 옷차림은 순전히 그레이스의 취향이 반영된 게 틀림없었다.
존재감 하나 없는 레일라였지만 레베카는 그녀를 눈여겨봤다.
어딘가 텅 빈 눈동자가 자신과 닮았다 생각했다.
이따금씩 레일라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허공을 보곤 했는데, 그럴 때면 레베카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눈길을 돌리곤 했다.
레일라도 마찬가지였을까.
그녀도 이따금씩 레베카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레일라는 미미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녀의 웃음은 절벽 끝에 선 사람이 마지막으로 짓는 미소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레베카는 어쩐지 레일라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러니 반드시 제 어미에게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복수하고 싶었을 테니까.
자신이 레일라였으면 그랬을 테니까.
그래서 레일라가 위급하다 했을 때, 저도 모르게 열성적으로 그레이스를 도왔다.
레일라가 그레이스에게 복수의 한마디를 던질 수 있도록.
‘저를 죽인 건 어머니예요.’
그레이스의 귓가의 레일라의 환청이 들려왔다. 그레이스는 팔이 묶인 채로 의자를 들썩였다.
“레일라……. 난 널 최선을 다해 키웠어! 그런데 어째서 이 어미를 먼저 두고 간 게냐. 난 너를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다! 그런 건 네가 아니야!”
“잘 보세요. 그레이스. 저는 레일라가 아닙니다.”
레베카는 한 발짝씩 그레이스에게 다가갔다.
단단한 철옹성 같던 그레이스의 마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레일라를 이용한 게 조금 꺼림칙하긴 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흐트러진 그레이스를 레베카는 한껏 비웃어주었다.
그레이스는 젖은 눈을 하염없이 깜빡였다.
이제 그녀는 의자를 들썩일 힘도 없었다.
그저 축 처진 채로 금이 간 자신의 마음을 박살 내려는 레베카를 바라봤다.
“그러니 아무리 내게 레일라를 향한 질책을 쏟아내어도 그녀는 들을 리가 없습니다. 당신의 후회가 씻겨나가는 것도 아니고요. 레일라는 죽었습니다. 당신 때문에.”
“아니야……. 아니야! 레일라는 내가 죽인 게…….”
“그래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당신이 알아먹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저는 당신의 그 어리석음을 이용하겠습니다.”
레베카는 반쯤 넋이 나간 그레이스에게 얼굴을 바짝 붙였다.
아찔한 레베카의 얼굴에 그레이스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나를 한 번은 도와주겠다고 했잖아요? 내가 원할 때 데본셔의 문을 활짝 열어두도록 해요.”
데본셔라는 말에 정신이 잠시 돌아왔는지 그레이스의 눈에 이채가 잠시간 머물렀다.
그레이스는 눈을 부릅떴다.
“정녕 백작가를 망하게 하시려는 겁니까! 제가 그런 짓을 눈 뜨고 지켜볼 것 같습니까? 감히 레일라를 들먹이며 이리 겁박을 하시다니.”
“웃기는군요. 가장 레일라를 그리워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다니.”
“지금 대체 무슨 말을……?”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그 저택은 제 복수의 대상이 아닙니다. 줄게요. 그 더러운 곳.”
그레이스의 눈이 도르륵 굴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