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레베카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가지시라고요. 제플린, 그리고 옥타비오가 사라진 그 저택을 당신에게 드리겠단 말씀입니다. 언제나 당신 입맛대로 주무르고 싶어 했잖아요?”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불가능해 보여요?”
레베카가 그레이스를 향해 숙였던 허리를 곧게 폈다.
어느새 해가 져버린 공간 안에는 일렁이는 촛불이 힘겹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레베카의 얼굴 위로 그늘이 내렸다.
레베카는 고개를 쳐들고 그레이스를 내려다봤다.
빈정거리는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걸렸다.
“내가 아무런 힘이 없다고 했나요?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제플린의 손아귀에서 탈출할 수 있었을까요? 내가 병에 걸리고 그와 이혼하게 된 것, 그 모든 게 우연 같나요?”
“그, 그러면…….”
“사실 훌륭한 뒷배를 얻었거든요.”
“예?”
“이제부터 행운이 항상 나와 함께 하기로 했다고 하면 알아들으시려나.”
“아까부터 자꾸 알 수 없는 소리만 하시는데 당최 저는 무슨 말인지…….”
레베카는 자신의 관자놀이 부근을 톡톡 치며 말했다.
“그 자그마한 머리로 이해할 필요 없어요. 아까도 말했듯, 당신은 죽어도 날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당신이 레일라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죠.”
“내 딸은 병으로 죽었어.”
“그래. 그렇게 좋을 대로 생각해. 그게 당신 정신 건강에 좋을 테니. 그러지 말고 그레이스, 한번 상상해 봐요.”
레베카는 그레이스의 뒤로 다가가 그녀의 귀에 달콤히 속삭였다.
“그 아름다운 저택에 군림하는 당신의 모습을. 레일라 같은 아이들로 그 공간을 채울 수도 있겠군요. 그레이스 던컨의 데본셔 백작 저택. 어때요? 가지고 싶지 않나요?”
레베카는 떨어지는 꿀처럼 끈적한 어투로 속삭였다.
집요한 레베카의 말에 그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상상해 버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눈앞에 환영이 펼쳐지듯 상상의 세계가 또렷하게 보였다.
그 안에서 자신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백작저의 정원에 앉아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레일라와 비슷한 얼굴의 하녀들이 그녀를 향해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가지고…… 싶어…….”
무심코 중얼거린 그레이스의 말에 레베카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레이스의 주머니에 쪽지 한 장을 넣어주었다.
“이곳에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적혀 있어요. 지금 눈앞에 보이는 걸 가지고 싶다면 내 말을 따르는 게 좋아요.”
그레이스는 동공이 풀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녀의 머릿속엔 강렬한 욕망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레베카는 뒤돌아서며 고개를 까닥였다.
칸나가 말없이 그레이스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에 자루를 씌었다.
아직 환상 속에 빠져 있는 그레이스는 별다른 반항이 없었다.
칸나는 손쉽게 그레이스의 목을 손날로 내리쳐 그녀를 기절시켰다.
그리고 그레이스를 들쳐 매고는 빠르게 문을 박차고 나섰다.
칸나가 사라지자 레베카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신선한 공기를 맡자 구역질이 나왔다.
“웩…….”
레베카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문틈 사이로 보이는 붉은 향초를 바라보았다.
일전에 칸나를 시켜 옥타비오의 방에서 향초를 몰래 하나 빼돌린 것이었다.
심신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는 줄만 알았다.
그래서 기세등등한 그레이스를 안정시켜 제대로 된 대화를 하려고 피웠던 향초였다.
하지만 이제 보니 환상을 보여주는 기이한 효능이 있는 모양이었다.
레일라의 모습으로 그레이스의 마음을 흔들 계획이었긴 했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그녀의 계획보다 더 손쉽게 자신을 레일라라고 불렀다. 그때 저 향초의 효능을 눈치챘다.
심호흡을 계속 하다 보니 멍한 기운이 조금 가셨다.
레베카는 손수건으로 코를 틀어막고 서둘러 향초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바닥에 내던진 후 가루가 될 때까지 발로 짓이겼다.
‘위험한 물건이야.’
물론 향초 덕분에 일이 쉽게 풀린 건 사실이었다. 그레이스가 알아서 자신의 욕망에 빠져들었으니까.
하지만 레베카는 이런 물건을 다시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해를 끼칠 수 있는 물건이었다.
환상에 젖어 사는 건 현실을 내 버릴 정도로 누구에게나 혹할 일이었다.
레베카는 눈을 들어 전경을 바라봤다.
어느덧 달이 떴다.
오벨리아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이곳은 버려진 농가였다.
인적이 드물어 은밀한 일을 꾸미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레베카는 헛간의 뒤편으로 가서 마른 나뭇가지들을 모았다. 그리고 그 위에 불을 피웠다.
타닥- 타닥-
평화로운 소리를 내며 모닥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레베카는 밤색 드레스를 벗어서 불 위에 던졌다.
드레스의 허리춤에 옮겨붙은 불길이 야금야금 드레스를 집어삼켰다.
레베카는 타오르는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미안해. 레일라. 이제 다시는 저 옷을 입을 일은 없을 거야.”
그녀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불이 하늘을 향해 두어 번 거세게 솟아올랐다.
* * *
오벨리아의 저택에서 레베카를 기다리던 율리안은 마지막으로 계획을 점검하고 있었다.
이윽고 흡족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오늘 열리는 가을 무도회는 그 어떤 때보다 즐거운 행사가 될 것이었다.
레베카는 혹여나 일이 틀어졌을 때를 대비해 계획을 무려 다섯 가지나 짜두었다.
철두철미한 그녀의 성미에 율리안은 연신 혀를 내둘렀다.
“오늘따라 더 근사하시네요!”
리비아가 수줍게 볼을 붉히며 율리안의 곁에 쪼르르 달려왔다.
맵시 좋은 연미복을 갖춰 입은 그는 지나가다 뒤를 돌아볼 만큼 눈부셨다.
“나도 무도회 구경하고 싶었는데…….”
이윽고 뒤따라온 헤레나가 볼멘소리를 내며 율리안 옆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곧 서로 질세라 조잘거리는 리비아와 헤레나의 수다가 이어졌다.
율리안은 자매의 이야기를 기분 좋게 감상하다 입을 열었다.
“내년에 누구보다 화려한 데뷔탕트를 치르게 해주겠다고 약조할게.”
“그게 정말이죠? 약속하셨어요!”
헤레나가 기뻐서 환호성을 질렀다. 그녀는 머릿속에 어떤 드레스를 입고 갈지 벌써부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능력 있는 형부가 있으니까 너무 좋아요!”
리비아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율리안은 순간 눈을 크게 떴다.
“형부…… 라고?”
“에이, 우리가 모를 줄 알았어요? 베키 언니를 보는 공작님의 눈빛이 심상치 않던데요?”
“맞아요. 베키 언니도 싫은 눈치는 아니고.”
“싫은 눈치가 아니었어?”
율리안의 입꼬리가 어느새 숨길 수 없이 샐쭉 올라가기 시작했다.
리비아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새침한 얼굴로 말했다.
“프러포즈는 언제 할 거예요?”
“아, 그게…….”
“저번부터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혹여나 그냥 넘어갈 생각하지 말아요! 프러포즈도 없이 냉큼 결혼만 하려는 거라면 형부로 인정해드릴 수 없어요!”
헤레나도 끼어들었다.
“당연하죠. 우리 언니가 어떤 사람인데 프러포즈도 없이 결혼하게 둘 수는 없어요.”
율리안이 빙그레 웃다가 물었다.
“그럼 내 처제들은 대체 어떤 프러포즈를 해야 나를 인정해주실까?”
“흠……. 사실 진심이 담기면 상관없긴 해요.”
리비아의 말에 헤레나가 핀잔을 줬다.
“무슨 소리야. 무조건 커다란 알이 막힌 반지가 필요하지. 성의를 보여야지, 최소한.”
리비아가 헤레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안이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알이 큰 거면 어느 정도여야 하는 건지…….”
“이 정도면 될 걸요?”
헤레나가 테이블 접시에 담겨 있던 동그란 초콜릿 하나를 들어 그의 앞에 들이밀었다.
율리안은 초콜릿의 크기를 가늠해 보더니 안심하듯 말했다.
“그 정도는 충분히 되겠군.”
리비아가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보석의 크기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호기심이 동해 율리안은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헤레나와 리비아가 동시에 외쳤다.
“공개 청혼은 절대 금지예요!”
다소 험상궂은 두 소녀의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율리안은 순간 움찔하다가 입을 열었다.
“왜 안 된다는…….”
그때 하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엇을 보았는지 그녀는 흥분감으로 잔뜩 상기된 상태였다.
“레베카 아가씨께서 준비가 다 되셨다고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말을 마친 하녀는 꾸벅 인사를 하더니 서둘러 사라졌다.
율리안과 쌍둥이는 서로를 쳐다보다가 이윽고 응접실을 나섰다.
“아. 율리안. 오래 기다렸지?”
계단 위에 서 있는 레베카를 보고 율리안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그의 커다래진 눈동자가 순식간에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세상에…….”
계단 밑에 옹기종기 모인 오벨리아가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감탄을 내뱉으며 한껏 차려입은 레베카를 올려다봤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상아빛의 실크 천 위에 금사로 만든 섬세한 레이스가 덧대어 있었다.
레이스의 끝마다 달려 있는 비즈가 영롱한 빛을 뿜어내었다.
가히 화려함의 끝을 달리는 디자인의 드레스였지만 레베카에게는 전혀 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에게 딱 맞게 어울리는 옷이었다.
레베카는 흰색 바탕에 금색 문양으로 장식한 가면을 한 손에 살포시 쥐고 있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황금빛 물결 같은 기다란 머리칼이 한껏 드러난 쇄골 근처에서 너울거렸다.
계단 아래까지 내려온 레베카는 흰 장갑을 낀 손을 들어 율리안에게 내밀었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레베카를 처음 본 것도 아닌데 고장 난 것처럼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어흠…… 어흠흠!”
리비아와 헤레나가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율리안에게 얼른 손을 잡으라고 눈치를 주었다.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있었던 율리안은 그제야 퍼뜩 정신 차리고 레베카를 에스코트했다.
레베카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왜 이렇게 넋이 나가 있어. 율리안.”
“엄청난 광경을 봐서 말이지.”
“무슨 광경?”
그 의미를 모르는 게 아닐 텐데도 레베카는 말간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
한껏 양 볼이 달아오른 율리안은 그런 레베카를 슬쩍 노려보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제국 최고의 미녀라는 수식어가 그녀에게는 아깝지 않았다.
아니, 제국이 아니라 세상 통틀어 레베카보다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사람은 찾을 수 없을 거라 율리안은 순간 확신했다.
이런 여자가 내 옆에 서 있다니.
꿈만 같은 일이었다.
율리안은 긴장된 손으로 재킷 안주머니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묵직한 무게가 느껴지자 비로소 안도한 그는 레베카가 마차에 오르는 걸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