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76화 (76/232)

76.

“그럼. 이만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몸조심하고.”

퍽 걱정스러운 눈으로 다나에가 레베카를 바라봤다.

테오는 인사 대신 율리안을 향해 경고가 분명한 눈빛을 보내는 것에 그쳤다.

마치 내 딸에게 수작을 걸 생각이거든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성 짙은 눈빛이었다.

율리안은 살짝 식은땀을 흘리며 테오의 날카로운 눈길을 애써 피했다.

평소였다면 테오의 그런 태도에 그럴 리가 없다고 장담했겠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조금 위험할 법도 싶었다.

식구들에게 손을 흔드는 레베카의 옆모습을 스리슬쩍 훔쳐보던 율리안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자 황급히 눈을 돌렸다.

‘또 시작이군.’

율리안의 훔쳐보는 시선은 이제 연례행사 같았다.

널따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율리안은 다소곳하게 다리를 모으고 앉아 눈을 어디 둬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허둥거렸다.

그 모습에 레베카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조금 귀여운 것 같기도 했다.

“크흠. 그만 출발하지!”

율리안의 명령에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소 과장스럽게 큰 율리안의 목소리에 함께 마차에 오른 칸나와 크로아가 그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율리안은 서둘러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저녁 공기가 그의 당황스런 열기를 조금 식혀주었다.

그렇게 가기 싫었던 무도회가 기대가 되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 * *

“백작님, 보세요. 손님들이 정말 많이 오셨어요.”

알리시아는 속속들이 도착하는 귀족의 행렬을 보고 금세 얼굴을 풀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알리시아는 단단히 토라져 있었다.

그녀는 사흘 전 제가 몇 날 며칠을 고민해서 애써 꾸며 놓은 연회장을 옥타비오와 제플린에게 호기롭게 보여줬다.

오색빛깔이 난무하는 연회장을 발견한 옥타비오는 이마를 짚었다.

유니콘이 튀어나오지 않은 걸 감사히 여겨야 할 만한 처참한 광경이었다.

‘부, 부인. 부인이 한 것도 아름답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꾸며 보는 게 좋을 것 같소.’

제플린은 난감한 얼굴로 알리시아를 설득하려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연회장을 그대로 선보였다가는 비웃음만 살 게 뻔했다.

게다가 제플린은 기억이 온전치 않은 상태로 큰 행사를 치른다는 사실에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싫어요! 이번에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계속해서 떼를 쓰는 알리시아에 제플린의 인내심이 동나버렸다.

‘알리시아 데본셔! 이번 무도회는 완벽해야 해! 알겠어? 지금 내 정신 상태를 왈가왈부하는 쓰레기 같은 것들이 몰려오는 행사라고. 그런 것들에게 내줄 먹잇감은 없어! 그러니 입 닫고 방에 얌전히 틀어박혀 있기나 해!’

예전처럼 알리시아에게 고함을 치는 제플린의 모습에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옥타비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레이스는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이후로 이어진 제플린의 행동에 그레이스는 다시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아, 알리시아! 내가 대체 무슨 말을……. 요새 신경이 날카로워 내가 잠시 제정신이 아니었나 보군. 내가 이렇게 빌 테니 제발 눈물을 거둬.’

알리시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자 제플린이 대번에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직 그의 기억이 돌아온 건 아니었다.

알리시아는 아마 일시적으로 예전 성질이 튀어나온 것이라 생각하곤 안도했다.

하지만 여기서 더 고집을 부렸다간 제플린이 기억을 되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리시아는 결국 제 고집을 꺾었다.

그렇게 그레이스의 지휘 아래 연회장은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

아마 일이 이렇게 될 걸 예상했는지, 그레이스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이 준비한 장식품들을 창고에서 꺼내왔다.

알리시아는 분이 풀리지 않아 연회가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제플린에게 토라진 티를 팍팍 냈다.

그녀의 기세를 보아 일주일은 갈 것 같았는데 이렇게 쉽게 풀리는 거였다니.

잔뜩 설렌 얼굴을 하는 알리시아가 마치 아이 같아서 제플린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연회에 참석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닐 텐데도 당신은 너무나 좋아하는군. 당신은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순수한 사람인 것 같아.”

진심이 담긴 칭찬이었지만 알리시아는 제플린의 말에 움찔 어깨를 떨었다.

“파, 파티는 언제나 즐거운 법이니까요. 오늘 무도회에 방문하신 모든 분이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내 아내는 아름다운데 착하기까지 해.”

제플린이 알리시아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이 참. 백작님, 다른 사람들이 보잖아요.”

알리시아가 수줍게 고개를 떨구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플린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 갔다.

또다. 또다시 이상한 기시감이 찾아들었다.

옥타비오와 주변인들의 말로는 알리시아가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이 맞다고 했다.

꿈에서 나온 그녀와 아마 같은 사람일 거라고.

그런데 어째서 알리시아를 안고 만질 때마다 낯선 기분이 드는 걸까.

그가 기억하는 얼굴 모를 그의 연인은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그의 연인은 조금 더 우아하고, 조금 더 농밀하게 그를 옭아맸다.

알리시아는 꽤 어여쁘고 귀여운 아내였지만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성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빠져들었던 기억 속 자신의 모습과 알리시아의 곁에 선 자신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하지만 기분 탓이겠지.’

기억이 도무지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기억 회복에 좋다는 건 모두 시도해 봤다.

하지만 먹지를 머릿속에 붙여놓은 것처럼 자신의 과거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추억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리고 밤마다 찾아오는 꿈속의 그 여인도.

특히 그 여인을 떠올릴 때면 머리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두통이 찾아왔다.

“윽.”

“백작님! 왜 그러세요? 머리가 또 아프신 건가요?”

“아니…… 괜찮아. 잠시 바람을 쐬고 싶군.”

제플린은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붙잡고 잠시 발코니로 향했다.

알리시아는 그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다가 이내 다시 연회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은실로 수놓은 자신의 아름다운 드레스를 만지작거렸다.

이 드레스를 만드는 데 마차 한 대의 가격이 들었다고 했다.

배가 많이 부른 게 조금 흠이기는 했지만 그런 것 따윈 신경 쓰지 않을 만큼 완벽한 드레스였다.

역시 산드라의 솜씨는 최고였다.

‘그래, 난 이제 최고로 좋은 음식만 먹고, 최고로 비싼 옷만 입을 거야. 고귀한 백작 부인이니까.’

단언컨대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자신보다 아름다울 수 없었다.

그 유명한 카트린느 황녀가 오더라도 말이다.

알리시아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자신을 향해 쑥덕거리는 말을 귀에 담았다.

“맙소사. 순간 레베카 님인 줄 알았어요. 데본셔 백작의 취향도 참 한결같군요.”

“최고만 가진다는 사람이잖아. 확실히 두 번째 부인도 눈부시게 아름답군.”

“산달이 다가왔다는데 어떻게 배만 나올 수가 있죠? 저 가녀린 팔 좀 보세요.”

“우아하군. 평민 출신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야.”

알리시아는 금방 기고만장해져서 허리를 곧게 폈다.

무거운 배 때문에 허리에 손을 짚어야 했지만 그동안의 특훈으로 흠잡을 곳 없는 몸짓을 선보일 수 있었다.

한때는 우러러보는 것조차 죄악처럼 느껴지던 귀족들이 자신을 향해 감탄을 내뱉자 기분이 묘했다.

‘그래 여기까지 잘 왔어. 알리시아.’

오늘의 무도회는 정식으로 사람들 앞에 알리시아를 데본셔 백작 부인으로 선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제플린은 레베카가 악랄한 첫째 부인이었다는 걸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 여자 때문에 저와 이 배 속의 아이가 수모를 당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몸이 떨립니다.’

알리시아의 눈물 젖은 연기가 설득력을 더했다. 알리시아는 제플린이 속아넘어갔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 전 제플린이 본래의 모습을 보인 것 때문에 불안하긴 했다.

그래서 알리시아는 오늘 연회에 참석하는 모두에게 제플린의 정신 건강을 위해 레베카에 대해 언급하지 말아 달라는 서신을 보내뒀다.

값비싼 선물도 함께 동봉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완전한 거짓도 아니었다.

레베카 때문에 알리시아가 밤잠을 설치고 곤욕을 당한 건 진실이었으니.

이렇게만 간다면 곧 태어날 알리시아의 아이도 문제없이 데본셔의 후계자가 될 터였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목에 받으며 알리시아는 누가 뭐라 해도 오늘의 주인공은 자신이라 자부했다.

“여기 있었군.”

두통약을 먹고 다시 돌아온 제플린이 알리시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알리시아는 사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백작님! 어서 사람들에게 저를 소개해 주세요.”

“그러지.”

제플린은 단조로운 어투로 알리시아의 요청을 승낙했다.

이윽고 알리시아의 은빛 드레스가 연회장을 휩쓸기 시작했다.

혹여나 이름이 기억나지 않으면 어찌하나 제플린은 걱정했지만 그의 우려와는 다르게 하객들의 얼굴을 보자 금방 그들의 이름과 직책이 떠올랐다.

“이쪽은 트뤼베 남작. 트뤼베 남작, 이쪽은 내 아내 알리시아 데본셔일세.”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쏟아지는 찬사가 아찔할 만큼 달콤했다.

알리시아는 기쁨에 흠뻑 취해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꿈이 이루어진 것만 같은 순간들이 이어졌다.

“오랜만입니다. 백작님. 기억을 잃으셨다더니 괜찮은가 봅니다?”

조금 날카로운 저음의 목소리에 제플린은 고개를 돌렸다.

“아. 라트라니스 공작이시군요.”

알리시아는 눈을 크게 뜨고 라트라니스 공작을 올려다봤다.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그의 미모를 가릴 수는 없었다.

사실 가면 무도회라고 하나 애초에 정체를 숨길 정도의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기골이 장대한 카림 라트라니스는 푸른빛이 도는 흑발에 적안을 가진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북부인 특유의 굵은 선이 매력적인 그는 알리시아와 눈을 마주치더니 픽하고 웃음을 흘렸다.

순간 알리시아는 멈칫했다.

‘비웃었어?’

제플린은 그의 웃음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듯 친절하게 그를 대했다.

북부의 주인이라 불리는 카림은 최근 대공이라 불릴 정도로 세력을 확장했다.

오랜 세월 동안 데본셔 가문은 라트라니스 가문과 우호적인 관계를 쌓아왔다.

두 가문은 자히드라 황제를 지지하는 양팔의 가문이나 다름없었다.

“공은 처음 보시겠군요. 제 아내, 알리시아 데본셔입니다.”

“어느 정도는 회복했다 들었는데, 역시 완전히 기억이 돌아오신 건 아닌 것 같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제플린이 의아하게 그를 쳐다보는 동안 알리시아가 서둘러 말을 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알리시아 데본셔라고 합니다. 공작님의 명성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알리시아의 콧잔등에 짜증 섞인 주름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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