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77화 (77/232)

77.

알리시아는 눈을 들어 제플린의 곁을 맴도는 사냥개에게 흘깃 눈짓했다.

레베카에 대해 지껄이는 사람이 있다면 저지하라는 목적으로 세워둔 사냥개였다.

하지만 상대는 라트라니스 공작이었다.

자신의 선에서 처리할 수 없던 사냥개는 서둘러 옥타비오에게 다가갔다.

카림은 눈을 가늘게 뜨고선 다급히 대화를 돌리는 알리시아를 내려다봤다.

“저를 알아봐 주시다니 그것 참 영광입니다만…….”

카림은 알리시아의 금색 머리칼과 짙푸른 눈동자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일순 그의 눈동자에 흥미가 서렸다.

카림은 짓궂게 입매를 틀어 올렸다.

“누굴 흉내 낸 것 같은 눈부신 그 차림새는 백작의 취향인가요, 아니면 욕망의 산물인가요. 제 생각에는 후자인 것 같은데.”

‘이 사람이!’

카림의 말은 노골적으로 알리시아를 곤란하게 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알리시아는 눈에 힘을 주고 그를 노려봤다.

카림은 그런 알리시아의 반응이 즐거운 듯 빙글거리며 웃었다.

제플린만이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대체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공작님! 올해 연회에는 특별히 오십 년 된 장미 와인을 대접해드리기로 했답니다. 한번 들어보세요. 거기, 잠깐 이리 와보겠니?”

와인을 나르던 하인이 쟁반을 든 채 알리시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옥타비오가 보낸 게 분명했다.

나중에 연회의 흥이 최고조로 올랐을 때 나누려고 했던 술이었지만, 카림의 흥미를 돌리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했다.

알리시아는 낚아채듯이 와인잔을 들어 카림의 손에 쥐어 주었다.

카림은 와인을 받아들며 그녀의 다급함을 여유롭게 즐기고 있었다.

“뭐. 이렇게까지 권하신다면야. 연회는 길 테니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나누기로 하죠.”

카림은 태연하게 와인을 음미했다. 그리고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와인잔을 들어보였다.

“역시 제국 최고의 와인입니다.”

알리시아는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잘생겼다고 생각했던 그의 단단한 입매가 이제는 시한폭탄처럼 느껴졌다.

알리시아는 제플린의 팔을 살며시 잡았다. 그리고 재빨리 카림에게 짧게 인사를 했다.

“그럼 이만 맞아야 할 손님이 많아 실례하겠습니다. 백작님, 페튜니아 후작 부인을 소개해 준다고 하셨잖아요.”

알리시아는 저 멀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페튜니아를 쳐다봤다.

제플린은 서두르는 알리시아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부인, 대체 왜 그러는…….”

알리시아가 제플린의 손을 이끄는 사이 갑자기 연회장이 조용해졌다.

페튜니아의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까지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경악에 휩싸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귀빈의 등장을 알리는 하인이 더듬거리며 소리쳤다.

“유, 율리안 요하네스 공작님과! 그…… 약혼녀이십니다!”

* * *

모여서 떠들고 있던 사람들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연회장의 가운데가 텅 비어 마치 율리안을 위해 준비한 무대처럼 마련되었다.

금색 리본을 목에 맨 검은 고양이 세 마리가 제 주인보다 앞서 걸어 나갔다.

일렬을 맞춰 걷는 세 마리의 고양이는 마치 흑표범 같은 위엄이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어떤 여인의 손을 살포시 쥔 율리안이 등장했다.

원래라면 아름다운 율리안에게 모두의 시선이 쏟아졌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율리안의 손을 잡은 여인이 사뿐거리는 발걸음으로 연회장 한가운데를 향해 걸어왔다.

드레스에 수놓아진 무수한 금사가 찬란한 샹들리에의 불빛에 눈부시게 빛났다.

한눈에 봐도 크림처럼 부드러울 것 같은 드레스가 여인의 굴곡진 몸을 따라 유려하게 떨어졌다.

그녀의 목에 건 사파이어 목걸이는 가면 속에 숨겨진 지독하게 푸른 눈동자처럼 짙푸른 빛을 내보이고 있었다.

얼굴 전체를 가리는 가면을 쓰고 있어 그녀의 자세한 외모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몸 전체에서 풍기는 묘한 분위기가 그녀의 매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누가 보아도 엄청난 미인일 게 분명한 여자의 정체를 추측하는 사람들의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분명 소문의 그 여자일 거라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율리안에게 지속적으로 만나는 연인이 있다는 사실도 놀라운 마당에 약혼녀라니. 금시초문이었다.

소란을 뚫고 카림이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율리안? 율리안이 여자를 데려왔어?”

카림은 입을 떡하니 벌리고 섬세하게 제 약혼녀를 에스코트하고 있는 율리안을 바라보았다.

‘레, 레베카?’

알리시아는 순간 수수께끼의 여인이 레베카로 보여 눈을 비볐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요하네스 공작의 약혼녀라는 여인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녀의 드러난 어깨와 선명한 쇄골, 그리고 사슴처럼 기다란 목은 흉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수포로 뒤덮여 있던 레베카가 저런 모습일 리가 없었다.

‘그래, 레베카일 리가 없어. 게다가 설마 그 요하네스 공작과 약혼을 했겠어. 이혼녀 주제에…….’

그런데도 선득한 불안이 알리시아를 뒤흔들었다.

레베카가 지내고 있다는 곳이 요하네스 공작령이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홀연히 나타나 자신에게 쏟아져야 할 모든 관심을 채간 게 익숙했기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아까부터 저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제플린 때문이었을까.

알리시아는 두려움을 애써 삼키며 제플린의 팔에 떨리는 손을 올렸다.

“백작님……?”

제플린은 알리시아가 부르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자신에게로 미끄러지듯 다가오는 정체불명의 여인을 응시했다.

“다들 당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군.”

율리안이 조금 불쾌한 어투로 말했다.

레베카가 가면 속에서 속삭였다.

“그러라고 이렇게 등장한 것 아니겠어? 얼빠진 얼굴들이 재밌네. 특히 제플린의 반응이 가장 기대 돼. 그가 과연 나를 알아볼까? 오늘 밤 정체를 밝히지 못하는 게 아쉬워.”

레베카가 흡족하게 웃었다.

마치 이곳의 주인공인 듯 아무도 없는 연회장 한가운데를 걸어가던 두 사람은 이윽고 제플린과 알리시아의 앞에서 멈춰 섰다.

율리안이 먼저 제플린을 향해 인사했다.

“이거 백작의 연회에 우리가 모든 시선을 차지해서 어쩌나.”

“요하네스 공작…….”

율리안의 샛노란 눈동자를 마주한 제플린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여기 연회장에 모인 다른 사람들과 달리 율리안에 대한 기억은 뒤죽박죽 얽혀 있어 혼란스러웠다.

제플린은 찌르는 듯한 두통에 눈을 찌푸렸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게 있었다.

‘불쾌하다.’

율리안을 보는 순간 오물이라도 마주한 듯 불쾌한 기분이 들어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그를 부모의 원수인 것마냥 노려보는 세 마리의 고양이를 보고 있자니 호흡기란 호흡기가 죄다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그와 무슨 인연인지는 몰라도 과거의 자신과 상당한 악연임을 제플린은 인지했다.

제플린은 슬쩍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과 율리안을 향하고 있었다.

여기서 헛짓거리를 했다간 비웃음을 사는 건 자신이었다.

그는 곧이어 헛기침을 하며 따끔거리는 목을 풀었다.

“크, 크흠. 아닙니다. 이렇게 찾아와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정말인가? 저번에 만났을 때는 당신의 부인에게 수작 걸지 말라고 하던데. 오늘은 이렇게 환영을 해주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

알리시아가 눈을 크게 뜨고 율리안을 바라보았다.

카림과 그가 친하다더니 하는 짓도 똑같았다.

알리시아가 서둘러 율리안에게 말을 붙였다.

“알리시아 데본셔가 율리안 요하네스 공작님을 처음 뵙습니다. 항상 혼자 다니신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아름다우신 분을 데려오셨군요. 모두들 그녀를 궁금해 하니 소개해 주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율리안은 알리시아의 모습을 스윽 훑어보다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당신, 나랑 친해? 초면인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친밀하게 굴지? 아, ‘부인 같은’ 사람이 그런 예절을 알 턱이 없으려나. 무슨 낯짝으로 이 자리에 있는지는 몰라도, 당신이 이곳과 어울리지 않다는 건 아주 잘 알겠어.”

“예?”

율리안은 한껏 ‘부인 같은’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고 말했다.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여럿이었는지 좌중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레베카는 슬그머니 율리안의 손을 잡았다.

율리안이 그녀를 바라보자 레베카가 그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만해.”

“아, 미안. 저 괴상한 꼴을 보니 기분이 나빠져서 그만.”

율리안은 목까지 새빨개진 알리시아를 바라보았다.

레베카를 죽이려고까지 하고선 그녀의 흉내를 내고 있다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게다가 아까부터 얼뜨기 같은 표정으로 레베카를 훑어보는 제플린의 시선 또한 거슬렸다.

제플린은 율리안이 제 아내를 모욕하고 있는데도 레베카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율리안이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그래도 축하 인사는 해야겠지. 알리시아라고 했나. 드디어 꿈을 이룬 것을 축하하네. 백작 부인의 자리를 가지려고 얼마나 갖은 노력을 했을지 눈물이 날 정도야. 아주 장해.”

한껏 비꼬는 율리안의 말투에도 그의 태도를 지적하는 자는 없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 중에 율리안의 직설적인 말에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철없고 무례하다는 건 내일 아침에 해가 뜬다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오히려 방금 그의 발언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평민 출신의 여자가 귀족 출신인 본부인을 밀어내고 백작 부인이 되었다.

그 본부인이던 레베카가 아무리 병에 걸리고 불임이었다고 한들, 그들 세상에서 이건 하극상이나 다름없었다.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귀족의 자리를 넘보는 알리시아에게 남몰래 분노하는 사람이 많았다.

바늘 같은 시선이 알리시아에게 내리꽂혔다.

알리시아는 자신의 드레스를 꾸욱 쥐었다.

요하네스 공작의 약혼녀가 입고 온 드레스에 비하면 자신의 드레스는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귀족 사회의 일부분이 된 것 같아 행복해하던 알리시아는 처참한 기분에 당장이라도 울고 싶었다.

아무리 화려한 껍데기를 걸쳐도 그들과 자신 사이엔 커다란 벽이 있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 호흡이 가빠져 왔다.

“레베카 님보다 못하네요.”

누군가가 읊조린 말에 알리시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레베카라면, 레베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벽을 부쉈겠지.’

알리시아는 고개를 쳐들었다. 고여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녀의 눈물샘은 다시 채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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