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되게 무례하시네요. 공작님이면 그렇게 다른 사람을 깔봐도 되는 건가요?”
레베카가 놀란 눈으로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가면 속에 숨겨진 그녀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율리안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했다.
“하. 그래, 누가 무례한 건지 제대로 따져보자고.”
이제야 사태를 파악한 제플린이 짐짓 험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요하네스 공작님. 계속 제 아내를 모욕하실 생각이시라면 여기서 내쫓을 수도 있습니다.”
율리안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제플린을 내려다봤다.
율리안의 눈에 언뜻 분노가 서렸다.
“기억을 잃었다더니 아주 애처가가 다 되셨군. 내가 아는 당신과 아주 다른 것 같은데. 처음부터 그러지 그랬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대체 백작은 아는 게 뭔가. 하긴, 누군가가 당신이 기억을 잃은 걸 이용해 작정하고 속이고 있다면 당신도 별수 없겠군.”
율리안이 의미심장하게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알리시아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제플린도 율리안의 시선을 따라 알리시아를 쳐다봤다.
알리시아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노, 농담이시겠죠. 백작님, 거짓이라니요. 그동안 제가 그 악한 여인에게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 잘 아시잖아요.”
“악해?”
율리안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알리시아를 향해 조금 미소를 내보이던 레베카의 얼굴이 단번에 싸늘하게 식었다.
자세한 내막을 들어보지 않아도 어떤 조잡한 이야기로 제플린을 속여먹었는지 예상이 갔다.
율리안의 손을 잡은 레베카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율리안이 이를 아득 물었다.
“어이가 없군.”
율리안은 잠시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는 조용히 뇌까렸다. 그의 눈에 형형한 빛이 얼핏 서렸다.
하지만 제플린도 그에 못지않게 눈을 홉뜨고는 그를 올려봤다.
“다시 한번 말해 보시죠. 당장 이곳에서 내쫓아 드릴 테니.”
율리안이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이가 없지 않나. 그동안 첫째 부인을 성녀 취급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는 악녀라. 데본셔 백작, 자네의 줏대는 그렇게 가벼운 것이었나 보군.”
성녀라니?
제플린은 순간 말이 없어졌다.
율리안의 말이 헛소리라고 내뱉어야 할 차례였는데 어쩐지 쉽사리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시금 두통이 찾아왔다.
‘백작 부인께서는 누구보다 뛰어난 신의 그릇이십니다.’
알 수 없는 기억이 떠올랐다.
제플린은 머리가 지끈거려 인상을 찌푸렸다.
율리안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어때, 이제 좀 기억이 나시는가?”
알리시아는 서둘러 위층에서 모든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옥타비오를 쳐다봤다.
입 모양으로 어서 빨리 도우라는 신호를 보냈다.
옥타비오는 성가시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손뼉을 두어 번 쳤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연주자들이 전주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활발한 선율이 연회장에 감돌던 긴장을 누그러뜨렸다.
알리시아가 이때다 싶어 와인잔을 들어 올리고 크게 소리쳤다.
“연회를 시작하지요.”
하인 둘이 휘청이는 제플린을 서둘러 부축했다.
알리시아가 율리안을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
“백작님은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으셔서요. 실례하겠습니다.”
돌아서는 제플린에게 율리안이 몇 마디를 더 얹으려는데, 카림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율리안. 대체 이게 다 무슨 짓이지? 설명해.”
카림이 팔짱을 낀 채로 율리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한테 미리 언질조차 주지 않는 것을 원망하는 눈치였다.
카림은 가식 없는 율리안을 마음에 들어 했다.
북부의 거친 삶에 익숙한 카림은 수도에 올 때마다 속이 느글거리는 것 같았다.
끔찍한 화장품 냄새도 싫었고, 진의를 숨긴 채 굳이 돌려서 말하는 귀족들의 말투도 적응하기 힘들었다.
특히 북부의 봄바람에도 동사할 것 같은 딸을 자신에게 팔아치우려는 부모들에겐 환멸이 났다.
황제의 초대로 어쩔 수 없이 수도에 오기는 해야 했으나, 그때마다 파리가 꼬이듯 들러붙는 사람들 때문에 사교 시즌은 그에게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여느 때와 같이 지루하게 술을 기울이고 있을 찰나 율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게 말을 걸지 말라고 했을 텐데. 당신의 얼굴을 보면 구역질이 나. 오늘은 내가 기분이 안 좋으니 제발 다들 꺼지라고.’
율리안이 살기가 어린 험한 말을 내뱉었다. 거무죽죽한 눈 그림자가 인상 깊은 사내였다.
그의 말투엔 권태감이 물씬 묻어났다.
율리안은 저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데본셔 백작이 뭐라 지껄이든 어디서 개가 짖냐며 귀를 후벼팠다.
그러곤 먹이사슬의 최강자 같은 얼굴로 하품을 길게 하더니 의자 위에 몸을 늘어뜨렸다.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태도에 카림은 눈을 빛냈다.
그도 자신과 같은 부류가 틀림없었다.
세상이 단조롭고 재미가 없어 죽을 것 같은 사람.
예전에는 북부에서 심심찮게 전쟁이 자주 일어났지만 자히드라가 황제가 된 이후로 제국은 눈에 띄게 안정되어 갔다.
결국 카림이 라트라니스 공작 작위를 물려받았을 때는 가끔 국경을 넘어오는 산적과 왈패들 말고는 그가 딱히 손쓸 일이 없었다.
연금술의 발달로 마물들은 국경 근처에 오기도 전에 바스러졌다.
지루하기 그지없는 나날이 이어지자 카림은 가끔 국경에 쳐진 결계석을 부숴버릴까 고민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하릴없이 주변 영지에 시비를 걸어대는 것만이 유일한 낙이던 그의 단조로운 삶에 율리안은 파란을 일으켰다.
자신이 다가가면 언제나 기뻐하는 사람들과 달리 율리안은,
‘꺼져.’
……라는 한마디로 그를 밀어내곤 했다. 그런 점이 카림의 승부욕을 자극했다.
율리안은 매번 자신에게 친밀하게 구는 카림에게 항상 욕을 내뱉거나 주먹을 날리곤 했다.
하지만 그래도 카림이 싫지는 않은 듯 자신의 곁을 내주었다.
세월이 흐르고, 둘은 친구라 부를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율리안은 아주 드물게 카림에게 제 속내를 털어놓을 때가 있었다.
카림은 율리안이 속을 내보이는 사람이 된 것에 은근히 자부심을 느꼈다.
‘공작님, 요하네스 공작이 희대의 바람둥이라는 소식 들으셨습니까?’
‘하? 뭐라고? 그 꼬맹이가? 자네는 율리안에 대해 뭘 모르는군.’
숙맥이나 다름없는 그가 제국 최고의 바람둥이라는 소문이 돌았을 때는 배를 잡고 웃은 적도 있었다.
소문의 주인공이 자신이면 몰라도, 율리안은 그럴 만한 위인이 못 되었다.
율리안을 붙잡고 캐봤더니 혼담을 피하기 위해 그런 소문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의 심복 크로아와 율리안밖에 모르는 사실이라고 했다.
카림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렇지.
자신이 율리안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여자는 대체 누구인가.
율리안에게 연인이 생겼다는 것조차 수도에 들어와서야 알았는데, 지금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카림을 분노하게 만들 만큼의 소식이었다.
“아. 내 약혼녀일세.”
카림은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분명 신전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또 술수를 쓴 거겠지.
정체불명의 여자는 가짜 약혼녀일 거라고 카림은 단정 지었다.
“약혼녀라고? 네게 여자가 있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 날 초대도 하지 않은 약혼식을 올렸다니.”
“그건 미안하게 됐어. 사정이 있어서 약혼식은 우리끼리 조촐하게 치렀어. 결혼식은 꼭 초대해 줄 테니 인상 좀 풀지 그래. 네 험악한 표정에 내 약혼녀가 겁먹겠어.”
‘이놈 봐라.’
카림은 헛웃음을 지었다.
율리안은 이따금씩 자신에게 이런 장난을 치곤 했다. 그는 오늘도 그러하리라 생각했다.
카림이 율리안에게 속삭였다.
“지금 나한테까지 거짓말을 하겠다는 거야? 이봐, 율리안. 내 눈은 못 속여. 말해. 또 어떤 책략이지? 기꺼이 도울 테니까…….”
“아니, 카림. 이번엔 헛다리 짚었어. 우린 정말 사랑하는 사이야.”
율리안이 빙그레 웃으며 제 약혼녀의 손을 잡았다.
카림은 율리안이 거짓말을 할 때 왼쪽 광대뼈가 씰룩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거짓말인 게 틀림없었다.
그 율리안 요하네스가 사랑에 빠질 리가 없었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카림은 율리안의 광대뼈 부근을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떠오르는 율리안의 표정을 보고 카림은 얼굴을 점점 굳혔다.
여자를 바라보는 율리안의 뺨은 씰룩이지 않았다.
오히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율리안의 광대는 옅은 핑크빛으로 물들어 있기까지 했다.
공중제비를 세 번 하고 다시 본다 하더라도 명확하게 율리안의 눈에는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말도 안 된다.’
그 율리안이, 세상 모든 사람을 혐오하는 율리안이 사랑에 푹 빠져버린 얼간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림은 충격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율리안의 약혼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카림의 시선을 느낀 여자가 똑같이 그를 응시했다.
오만한 눈빛이 카림을 꿰뚫듯 노려봤다. 흔들림 없는 푸른 눈동자가 깊게 팬 그의 미간을 훑었다.
카림은 순간 놀라 움찔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어릴 적부터 여러 종류의 전장을 누빈 카림은 사람마다 뿜어내는 특정한 기운을 알아채곤 했다.
일종의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심약한 사람이라거나 비열한 인간이라거나 언젠가 배신 할 것 같은 인물이라거나 하는 걸 그는 곧장 느꼈다.
카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율리안의 손을 잡은 여인에게선 세상 이치를 통달한 노장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대체 어떻게…….’
그녀의 외관은 여느 연약한 여자들과 다를 것 없었다.
객관적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보호본능을 일으킬 만큼 여린 자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자 처참한 전장 한복판에서 호적수를 만났을 때처럼 등줄기에 전율이 일었다.
그녀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꽃향기가 마치 피비린내처럼 느껴졌다.
최근에 검을 잡을 일이 별로 없어 제 감각이 무뎌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카림은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카림은 제 약혼녀의 손등에 키스를 퍼붓는 율리안을 바라봤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저 여자의 곁에 있으면 율리안이 크게 위험해질 것만 같았다.
카림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레베카는 자신을 탐색하는 붉은 눈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떨궈 그의 부들거리는 주먹을 내려다봤다.
율리안의 말로는 라트라니스 공작은 우리의 편이 되어줄 가장 유력한 사내라고 했다.
자신을 못마땅하게 훑어보는 눈길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굳이 나서서 밉보일 필요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