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79화 (79/232)

79.

레베카가 침묵을 지키자 카림이 입을 열었다.

“율리안, 네 약혼녀는 말을 하지 못하는가? 그리고 저 여자가 쓰고 있는 답답한 가면은 뭐야. 나한테도 정체를 숨기는 거야, 지금?”

카림이 레베카에게 거침없이 다가가자 율리안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눈가를 가린 율리안의 검은색 가면 안에서 흑안이 산뜻하게 접혀 들었다.

“카림, 미안하게 됐어. 아까도 말했다시피 사정이 있어서 말이지. 곧 모든 걸 말해줄 테니까 화 그만 내.”

이윽고 춤이 시작된다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율리안은 이를 악물고 있는 카림을 향해 말했다.

“곧 첫 춤이 시작될 모양이야. 자네도 얼른 파트너를 찾아야지. 그럼 나는 이만.”

그에게 고개를 까닥이며 율리안은 레베카의 손을 잡고 춤이 시작될 연회장의 정중앙으로 향했다.

카림은 잔뜩 구겨진 얼굴로 손에 쥐고 있던 와인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 * *

“익숙한 상황이지 않아?”

레베카의 허리를 잡고 빙글빙글 춤을 추던 율리안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와 첫 춤을 추었던 승전 연회에서처럼 넋을 놓고 자신과 율리안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게.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당신이 이렇게 춤을 잘 춘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어.”

가벼운 몸놀림으로 그녀를 리드하는 율리안의 춤 솜씨에 레베카는 미소를 지었다.

“내가 못하는 게 없기는 하지.”

“저번에 보니까 못하는 게 있기는 하던데.”

“어떤 거?”

“사격? 하나도 못 맞췄다면서.”

“그거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잠시 생각에 빠진 율리안의 얼굴 가득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지?”

“내가 모르는 게 있을 거라 생각해?”

“뭐, 뭐라고?”

첫 곡의 연주가 끝났기에 레베카는 치마를 잡고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달아나듯이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자 율리안이 그녀의 팔을 잡고 품 안으로 돌려세웠다.

율리안은 그녀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단단히 레베카를 껴안았다.

그 탓에 둘은 완전히 밀착된 상태였다. 이내 헐떡거리는 두 가슴이 맞닿았다.

율리안이 황금색으로 물든 눈을 하고서 떨리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똑바로 말해줘. 레베카, 설마 나를 못 믿어서 내 성에 세작이라도 심어 둔 거야?”

순간 레베카는 아차 싶었다. 아무래도 말실수를 한 것 같았다.

예상외의 반응에 레베카는 잠시 몸을 굳히고 그를 바라보았다.

율리안의 눈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레베카의 입에서 그렇다는 말이 나오기라도 한다면 그는 산산조각이 나서 이대로 무너질 것처럼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간 레베카의 마음이 일렁였다.

제 믿음을 갈구하는 그의 태도가 선득하게 자신의 마음을 간질였다.

“대답해. 레베카.”

레베카는 그의 타오르는 것 같은 눈을 응시하다 이윽고 조용히 말했다.

“레오가 알려줬어.”

“레오……?”

“그래. 그날 너희 성에 간 날에 저녁 먹고 산책했잖아. 그때 내가 잠시 사라졌었지? 그때 레오가 사격장으로 나를 데려갔어. 사격장을 정리하던 하인이 전후 사정을 설명해줬고.”

“그래……? 그렇게 된 거였구나…….”

율리안은 그제야 안도했다는 듯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약간의 거짓말을 보탠 터라 조금 양심에 찔렸지만 이 자리에서 진실을 밝힐 수 없었다. 아직은 시간이 필요했다.

레베카는 물끄러미 율리안의 미소를 바라봤다.

자신은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걸 알 것 같으면서도 레베카는 알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율리안의 저 예쁜 눈이 불안에 떨게 되는 건 싫었다.

레베카가 덤덤한 태도로 말했다.

“율리안. 세상에서 너만큼 내가 믿는 사람은 없어.”

율리안의 눈이 크게 떠졌다.

“우리 부모님보다도 너를 믿어. 그러니 내가 너를 믿지 않을 거라는 오해는 그만뒀으면 해.”

진심이었다. 그는 은인이었고, 이제는 험한 길을 함께 가야 할 동료이기도 했다.

그가 필요한 만큼 레베카는 그를 믿었다.

레베카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눈으로 율리안을 바라봤다.

율리안의 입술이 달싹였다.

연회장의 모든 빛은 레베카가 받는 듯했다. 황당할 정도로 그녀는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요하네스 공작에게 약혼자가 생겼다는 게 거짓은 아닌 모양이야. 벌써부터 낯 뜨겁게 붙어 있는 걸 보니 사이가 퍽 좋은가 보군.”

율리안과 레베카는 날카로운 어조가 날아드는 곳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굳은 얼굴의 자히드라가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한껏 치장한 카트린느 황녀가 손에 쥔 가면을 부서뜨릴 기세로 부들거리고 있었다.

‘이런. 낭패군.’

자히드라가 율리안을 카트린느의 신랑감으로 점찍은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한데 그걸 알면서도 율리안이 자히드라에게 아무런 언질 없이 약혼부터 발표해 버린 것이다.

자히드라가 아무리 율리안에게 후하다 하더라도 제 딸을 배신하듯 내친 것을 쉽게 용서할 리는 없었다.

율리안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고는 여태껏 레베카를 껴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세상의 존엄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율리안이 인사를 올렸다. 레베카도 그를 따라 조용히 치맛자락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그 대단한 공을 사로잡은 약혼녀는 대체 누구인가.”

자히드라가 입매를 삐뚜름하게 끌어올리며 말했다.

감히 제 딸을 거절할 만큼 대단한 여자가 누구인지 두고 보겠다는 노기가 가득한 질문이었다.

율리안이 조금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자히드라가 이렇게 빨리 연회에 참석하는 건 계산에 없는 일이었다.

오늘 황후가 아픈 탓에 자히드라가 무도회에 늦게 도착한다는 소식이 있었다.

틀림없는 정보였기에 최대한 황제와 마주치지 않고 첫 춤만 추고 빠져나가려 했었다.

어차피 오늘 거사가 끝나면 자히드라는 약혼 관련된 건 따위는 싸그리 잊어버리고 그를 지지할 게 분명했다.

게다가 자히드라와 마주치게 되면 그는 분명 레베카에게 지대한 관심을 쏟을 테고 그렇게 된다면 일에 차질이 생겼다.

그래서 그는 황제에게 특별한 언질을 하지 않았다.

자히드라가 다시 크게 되물었다.

“공은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내가 저 가면을 벗기라고 명을 내려야지 대답을 하겠는가?”

율리안이 방도를 꾀하고 있을 찰나, 레베카가 입을 열었다.

평소의 그녀의 목소리보다 낮은 목소리였다.

“역시 영민하신 폐하께는 당해낼 수가 없군요.”

레베카가 허리를 곧게 폈다.

율리안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레베카를 바라봤다.

레베카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나 믿지?’

꼭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 율리안은 맥없이 뒤로 물러났다.

레베카가 공손하게 앞으로 두 손을 모으고 자히드라를 바라봤다.

“저와 요하네스 공작이 내기를 했습니다. 연회가 끝나기 전까지 누군가가 제 가면을 벗길 수 있느냐 없느냐가 내기의 주제였지요. 하지만 제가 질 수밖에 없군요. 황제께서 명령하시면 제가 가면을 벗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율리안이 레베카를 바라봤다. 대체 뭘 하려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여기서 정체를 밝힐 셈인가?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일이 틀어질 건데…….

레베카가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대신…….”

“대신?”

“폐하께만 알려드리도록 하지요. 폐하 이외의 사람이란 조항을 넣지 않은 제 잘못이긴 하나, 너무 불공평한 내기가 아닙니까? 이 제국의 어느 누가 폐하의 명을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나에게만 알려주겠다 이 말인가.”

“예. 그리하면 저와 요하네스 공작은 내기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제가 좀 큰 상품을 내걸어서 말입니다.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네요. 어떠십니까. 폐하. 제 독대를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어때요? 당신도 내기의 규칙을 바꿔도 괜찮겠지요?”

레베카의 질문에 율리안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히드라는 레베카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가면에 가려져 있어 그녀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흥미가 동한 듯 입가를 매만지는 자히드라를 발견한 호위기사가 질색하며 그를 저지했다.

“폐하! 안 됩니다! 정체를 모르는 자와 독대를 하실 수는 없습니다.”

호위기사의 말에 율리안이 대번에 흉흉한 얼굴로 말했다.

“정체를 모르는 자라니. 말조심하게. 여기 서 있는 여인은 내 약혼녀야.”

“하오나…….”

자히드라가 호탕하게 웃었다.

“괜찮네. 그래, 당돌한 게 마음에 드는구만. 이런, 이런. 나 때문에 연회 분위기가 엉망이 되어 버렸으니 큰일이군. 다들 이쪽은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즐기시게!”

자히드라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연주자들이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멈춰 있던 하인들도 진귀한 음식이 담긴 쟁반을 손님에게 내놓았다.

자히드라가 레베카를 응시하며 말했다.

“독대를 허락하지.”

“감사합니다. 폐하. 저기 발코니가 한적하니 좋을 듯합니다.”

레베카가 연회장 이층에 있는 발코니를 가리켰다.

데본셔 백작저의 연회장은 지금껏 수도 없이 봐왔다.

때문에 어디가 가장 엿보기 어려운 장소인지 레베카는 잘 알았다.

자히드라는 그녀의 제안을 흔쾌히 허락하곤 레베카와 동행했다.

레베카는 율리안을 지나치며 그에게 눈짓했다.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이었다.

레베카의 뒤를 밟으려던 율리안은 그녀의 눈빛을 보고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그의 얼굴에 걱정어린 기색이 떠올랐지만 그는 레베카의 뒤를 따라가지 않았다.

레베카가 그러라면 그러면 되는 것이었다.

* * *

레베카는 발코니로 다가가서 커튼을 쳤다.

사냥개가 붙을지 모르는 일이니 발코니 앞에는 황제의 호위를 세워두었다.

자히드라가 난간에 비스듬하게 기대어서 레베카를 바라봤다.

자히드라는 잘생겼다고 하기는 힘든 얼굴이었으나 풍채 좋은 몸집과는 달리 날카로운 인상이 꽤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젊었을 적에는 매섭다는 평을 많이 받았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노련함이 깃든 그의 얼굴은 예리한 눈매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인자해 보이기도 했다.

“얼마나 대단한 정체이기에 이렇게 짐을 불렀지?”

레베카는 대답 대신 천천히 가면을 벗었다.

자욱하게 깔린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얼굴에선 빛이 났다.

자히드라가 난간에 기대어 서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의 입가에 놀라움과 즐거움이 동시에 피어났다.

“레베카! 그래 내 자네의 소식을 궁금하던 참이었네. 어딘가 낯이 익어 의심은 하고 있었다만 정말 자네일 줄…….”

정체를 밝힌 레베카는 다시 가면을 썼다.

“예상하고 계셨습니까.”

“율리안의 약혼녀가 되어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순순히 이혼을 당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지.”

“그렇다면 앞으로 제가 할 일도 아시겠군요.”

자히드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복수를 할 참인가.”

“폐하께서 이리 영민하신 줄 알았더라면 진작에 폐하께 도움을 요청할 걸 그랬습니다.”

“꽤 건방지게 변했어. 율리안에게 물들기라도 한 건가?”

불손함을 꾸짖는 듯한 말투였지만 자히드라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호기심을 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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