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80화 (80/232)

80.

레베카가 그의 호기심에 응하듯 대답했다.

“당연하지요. 폐하께서는 결국 제 손을 잡으실 수밖에 없으실 겁니다.”

“어째서?”

“폐하가 원하시는 걸 제가 이루어드릴 수 있으니까요.”

“내가 원하는 걸 자네가 어찌 안단 말이냐.”

레베카는 자히드라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하늘을 바라봤다.

“먼 옛날, 반란이 성공한 뒤 로탄더스 제국은 유례없이 탄탄한 황권을 자랑하고 있었죠. 하지만 신전의 힘이 점차 커지면서 황권은 나약해지고 신전과 손을 잡은 요하네스 공작의 세력도 커졌습니다.”

자히드라는 말없이 달빛이 내려앉은 레베카의 푸른 눈을 응시했다.

“요하네스 공작가의 세를 견제하려 폐하께선 변경의 라트라니스 가문을 공고히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 세력도 황권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데본셔 백작은 제국의 상권을 꽉 잡고 있고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게냐.”

“신전, 요하네스, 라트라니스, 그리고 데본셔. 그 네 개의 세력을 폐하의 발아래 바치겠습니다. 그리하면 폐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제국이 탄생할 겁니다.”

자히드라가 헛웃음을 지었다.

“자네가 무슨 수로? 그 하찮은 미인계라도 쓰겠다는 것이더냐.”

그의 말에 레베카가 피식 쓴웃음을 내뱉었다.

“물론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겠지만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 법입니다. 저는 그런 일시적인 방법에 기대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아름답다는 게 이점은 있지요. 때론 훌륭한 위장술이 될 수 있으니까요.”

“위장술이라?”

“제 미모에 가린 진짜 능력을 아무도 보려 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다들 제 앞에서 허점을 보이곤 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숨겨진 능력이라고?”

레베카는 제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톡 쳤다.

“어쭙잖은 재주는 없고, 머리가 조금 좋습니다.”

자히드라가 미심쩍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자네가 미래를 본다던데. 예지력이 있는 건 아니고? 게다가 성녀라고 하지 않았나.”

그 말에 레베카는 옅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를 바라보는 자히드라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폐하께서도 그런 걸 믿으십니까? 데본셔 백작과 이혼하기 위해 소문을 조금 만들어 낸 것뿐입니다. 미래는 과거와 현재의 산물이 아니겠습니까. 자그마한 예측쯤은 쉬운 일이지요.”

그 말을 들은 자히드라의 입술에 잠시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만약 레베카가 미래를 본다는 이야기를 했더라면 간신히 얻어낸 독대의 시간은 여기서 끝났을 것이었다.

그는 허황된 능력 따위에 휘둘리지 않았다.

미래를 본다는 사실보다는 자료를 수집해 미래를 예측한다는 게 자히드라가 더 납득할 만한 이야기였다.

레베카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운 좋게도 제게 신성력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신전의 노예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런 것에 시간을 낭비하기엔 현생이 너무나 아깝거든요.”

‘통했다.’

레베카는 내내 치켜 올라가 있었던 자히드라의 눈매가 조금 내려가는 걸 확인하고 웃었다.

어차피 가면을 쓰고 있던 터라 그녀가 은연중에 내뱉은 승리의 미소를 자히드라가 볼 일은 없었다.

덕분에 레베카는 마음껏 웃을 수 있었다.

“오늘 제가 율리안과 이곳에 온 것이 우연이라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글쎄, 가면을 쓴 걸 보아하니 그저 전남편에게 잘 산다는 모습을 보여주려 온 건 아닐 테고. 이리 은밀히 나를 불러낸 걸 보면 무슨 거사라도 계획하고 있는 게 아닌가.”

레베카는 속으로 감탄했다.

자히드라, 그는 타고난 황제감이었다.

이전 생에서 그가 통치하는 동안 제국은 내내 평탄했다.

정복욕을 불태운 전쟁도 없었고, 그렇다고 세력이 커지는 이웃 나라를 그냥 두고 보지도 않았다.

조세는 적당한 선에서 거둬들였고, 귀족의 횡포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자히드라는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했다.

그는 평생 성군이라 칭송받았다.

하지만 레베카는 그의 인자한 미소 뒤에 숨겨진 날선 눈을 보았다.

그가 그 정도의 명예를 움켜쥘 수 있었던 건, 그만큼의 피를 손에 묻혔기 때문이겠지.

강력한 황권이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자히드라가 신전을 어떻게 억눌렀더라?’

레베카는 이전 생의 자히드라를 떠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오늘 이 저택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겁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점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워낙 시간이 급박하게 흐른지라…….”

사실 레베카와 율리안은 자히드라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플린에 대한 자히드라의 태도에 대해서.

일전에 그의 별장에 제플린을 가둔 걸 보면 썩 감정이 좋은 것 같진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제가 제플린을 내치는 것에 완전히 동의한 건 아니었다.

데본셔가는 황제의 공신 가문이었고 그것만으로도 아직 이용 가치가 컸다.

때문에 방금까지도 오늘의 거사를 자히드라에게 알리는 걸 망설였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이제 남은 건 운과 자신의 세 치 혀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레베카가 운을 뗐다.

“그 전에 먼저 폐하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해 보게.”

자히드라는 이미 레베카의 말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레베카가 대답했다.

“요하네스 공작과 데본셔 백작. 둘 중에 누굴 선택하시겠습니까.”

“내가 선택해야 하나?”

“예. 선택하셔야 합니다.”

“왜지?”

“제가 요하네스 공작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레베카가 턱을 높이 쳐들었다.

강력한 상대 앞에선 때론 당당함이 해결책이 될 수 있었다.

“제가 율리안을 선택한 이상 그는 승승장구할 것이고, 제플린은 이제 지는 해가 될 것입니다. 누구를 택하시겠습니까?”

자히드라가 코웃음을 쳤다.

“자네의 그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의 원천이 무엇인지 궁금하군. 아까부터 대체 내 자네의 뭘 믿고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한단 말이야.”

“제 질문에 답을 주시면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세운 계획의 모든 것을요.”

자히드라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자네가 그렇게나 계획에 빈틈이 없다 확신하니 요하네스를 선택해야겠지. 재물로 봤을 때는 데본셔가 한 수 위일지는 모르나 재물이야 뺏으면 그만이지 않는가.”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레베카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앞으로의 계획을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늘 밤에 일어날 일까지 모조리 말하자 자히드라가 흥분한 낯빛을 숨기지 못하고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게 정말 성공한다면 엄청난 일이 아닌가.”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자신 있다고요.”

“그럼 내가 뭘 도와주면 되겠는가.”

레베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침묵하십시오.”

“뭐라?”

“저와 요하네스 공작이 뭘 하든 아무것도 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희를 크게 옹호하지도 배척하지도 말아 달란 말입니다.”

“나더러 아무것도 하지 말고 지켜만 보아라?”

“예. 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대는 항상 조건이 있군. 그래, 말해 보거라.”

“한 번. 단 한 번만 저희를 구해주십시오. 어떤 상황이라도 저희를 한 번은 도와주셔서 합니다. 그러면 폐하께 약속한 것을 드리겠습니다.”

조금 유해졌던 자히드라의 눈매가 단숨에 냉혹해졌다.

모든 걸 지원해달라고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당장 데본셔를 멸문해 달라고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레베카는 한 번을, 세 번도 아닌 단 한 번을 도와달라고 했다.

자히드라는 숨길 수 없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짐짓 눈을 험상궂게 떴다.

“내가 약속을 지킬 거라 보는가? 일이 틀어지면 나는 자네들을 내칠 수도 있다. 그깟 약속 따위 저버리고 말지.”

“괜찮습니다. 폐하께서 꼭 약속을 지키실 거니까요.”

“어찌 그리 확신하는가.”

“침묵하시다 보면 아시게 될 겁니다.”

에둘러서 말하긴 했으나 그녀의 말에 담긴 진의는, 그 외의 것들은 알아서 하겠으니 당신은 신경 끄라는 이야기였다.

참, 불손하고 당돌하지 않은가.

하지만 동시에 흥미가 동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레베카라!’

확실히 그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승전 연회에서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던 그녀의 행동 역시 계획된 것이었다.

자히드라는 고고한 자세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레베카를 바라봤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특히 자신과 처음 독대하는 사람이라면 으레 두려움에 몸을 떨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앞에서 전혀 동요가 없었다.

오히려 억겁을 살다 온 것 같은 초연한 눈으로 자히드라의 대답을 차분히 기다리고 있었다.

자히드라는 레베카의 눈을 찬찬히 읽어내렸다.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몸을 웅크리고 어떤 것을 기다려 온 사람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익숙한 눈빛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황태자를 독살하려고 마음먹은 날, 거울 속에서 본 자신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자히드라의 고민은 짧지 않았다.

그는 뒷짐을 진 채 오늘따라 유달리 밝은 보름달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켜보겠네.”

화려한 가면 속에서 레베카가 차갑게 웃었다.

“손해 보실 일, 없을 겁니다.”

* * *

알리시아는 약혼녀를 부축해서 빠져나가는 율리안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들은 폭풍처럼 등장해 모두의 혼을 빼놓고 또 폭풍처럼 퇴장했다.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고 황제와 발코니로 사라진 공작의 약혼녀는 계단을 내려오다가 발을 접질렸다.

“나의 햇살!”

율리안은 낯간지러운 애칭을 부르더니 주저앉은 약혼녀를 끌어안았다.

한껏 걱정에 빠진 율리안의 태도에 사위가 경악에 빠진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단지 발을 접질린 것뿐이었는 데도 율리안은 약혼녀가 다리 전체가 부러진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평소의 과묵하고 냉소적인 그의 입에서 나올 리 없는 과도한 애정이 섞인 말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꼴사납군.”

어느새 회복한 제플린이 알리시아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한껏 찡그린 얼굴로 율리안의 행각을 노려봤다.

“봐라. 황제께서도 불쾌해하시잖아.”

그의 말에 알리시아는 황제를 바라봤다.

미간을 모으고 있긴 했지만 알리시아는 어쩐지 그가 웃음을 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혼녀가 아프니 이제 그만 돌아가야겠군.”

율리안은 약혼녀를 부축해서 제플린과 알리시아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공작의 약혼녀는 제플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고개만 살짝 수그렸다.

제플린이 움찔하며 가면 속으로 보이는 크고 날카로운 눈매를 바라봤다.

그녀의 차갑고 깊은 푸른 눈을 마주하는 순간 그의 눈 한쪽에서 눈물이 툭하고 떨어졌다.

‘어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무도 그의 눈물을 눈치채지 못했다.

제플린은 손가락으로 뺨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이슬처럼 매달린 그 눈물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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