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분명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홀연히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자 걷잡을 수 없는 그리움이 몰려왔다.
순간 공작의 약혼녀의 뒷모습과 꿈에서 보았던 자신의 연인의 뒷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름…… 이름이라도 물어봐야 해!’
율리안의 약혼녀인 것 외에는 그녀의 이름조차 알 수 없었다.
제플린은 황급히 손을 들었으나 이윽고 옥타비오가 그의 앞에 섰다.
“백작님, 빛의 전당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어서 그곳으로 귀빈들을 모시도록 하시지요.”
옥타비오가 슬며시 제플린이 뻗은 팔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의 귀에 속삭였다.
“완벽한 파티를 망칠 생각이십니까.”
그의 말에 제플린은 힘없이 팔을 떨구었다.
그래…… 자신의 착각일지도 몰랐다.
자신의 사랑스런 연인은 여기, 순진무구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알리시아였다.
아직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 헛것이 보이는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 가도록 하지. 손님들께 빛의 전당으로 오시라 전하도록 해.”
“예. 백작님.”
옥타비오가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물러났다.
곧이어 연회장의 모든 불이 꺼졌다.
“와!”
갑작스러운 소등에 어리둥절하던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유리창 너머로 환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잘 다듬어진 정원 사이에 빛의 전당이 눈부신 조명을 받으며 위용을 드러냈다.
작은 유리 조각을 이어붙인 전당의 유리돔은 마치 거대한 다이아몬드처럼 화려하게 빛났다.
모두가 정신없이 빛의 전당을 구경하고 있는 사이, 계단의 꼭대기에 올라선 제플린이 말했다.
“오늘 연회의 가장 큰 여흥이죠. 빛의 전당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곳곳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서둘러 입구 쪽으로 향해 가는 인파는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굶주린 쥐 떼를 떠올리게 했다.
제플린은 먹이를 던져주는 주인처럼 무심한 시선을 허공에 두었다.
분명 고대하던 순간이었는 데도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그의 신경은 다른 곳을 향해 곤두서 있었다.
요하네스 공작과 그의 약혼녀.
물결치듯 흩날리던 아름다운 금발이, 그를 집어삼킬 듯한 깊은 푸른 눈동자의 잔상이 어른거렸다.
단 한 번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도 심장이 땅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가면 안에 감춰둔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를 생각하자 심연 속에 묻혀 있던 이름 하나가 서서히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레베카…….”
제플린이 레베카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 이름은 막 계단에서 내려서려고 치맛자락을 들던 알리시아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알리시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 * *
발을 접질렸다는 건 순전히 연회장을 빠져나오기 위한 핑계였다.
레베카와 율리안은 서둘러 마차가 대기하고 있는 곳까지 갔다.
지금부터는 시간이 촉박했다.
둘은 인장을 가린 요하네스가의 마차에 다급히 올라탔다.
마차는 백작저와 그리 멀지 않은 인적 드문 오솔길에 멈춰 섰다.
커튼을 젖히고 주위의 동태를 살피던 율리안에게 레베카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진짜 결혼은 아니었지만 계약 결혼도 결혼이었다.
곧 남편이 될 율리안이 멋대로 다른 남자와 독대한 일을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레베카는 무서웠다.
“황제와 단둘이 있었는데 화나지 않았어?”
밤이 찾아든 오솔길을 바라보던 율리안의 눈동자가 레베카에게 향했다.
물끄러미 응시하는 그의 눈빛에 레베카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과거의 그림자가 음산하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왜 낯선 남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던 거지?’
‘제플린, 오해예요. 그저 제가 손수건을 떨어트려서…….’
‘시끄러! 그것도 일부러 떨어트린 거지? 요부처럼 행동하다니, 오늘은 벌을 받아야겠어. 앨리스, 당장 이리로 와!’
‘안 돼요! 제플린!’
숨이 가빠져 왔다. 이 망할 과거는 장소를 불문하고 자신의 발을 잡았다.
율리안이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성과는 다르게 몸이 먼저 반응을 했다.
레베카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율리안의 어떤 표정을 보든 지금의 자신은 그 의도를 곡해할 것 같았다.
레베카는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를 맞아 겁에 질린 아기 새처럼 떨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율리안의 눈에 슬픔이 내려앉았다.
율리안은 최대한 자신의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어조로 나지막이 말했다.
“화나지 않았어.”
퍽 상냥한 목소리였는데도 레베카의 떨리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율리안은 당장이라도 레베카를 안아 들어 위로하고 싶었지만 선뜻 그러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그녀는 부서질 것 같았다.
율리안은 주먹을 세게 그러쥐었다.
“설령 그 상황에 내가 질투심이 들었다고 해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레베카는 살며시 눈을 떴다.
차분히 가라앉은 율리안의 따스한 금빛 눈이 레베카를 위로하듯 느리게 깜빡였다.
율리안은 쐐기를 박듯 다시 한번 더 단호히 말했다.
“당신 잘못이 아니야.”
레베카의 떨림이 점차 잦아들었다.
그녀가 진정된 걸 확인하자 율리안은 레베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레베카의 손을 잡았다.
“이제 당신의 곁에는 당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남아 있어. 그러니 그런 버러지 같은 과거가 떠오르거든 당신의 사람들을 떠올렸으면 해.”
율리안의 말에 레베카는 가족을 떠올렸다.
칸나와 오벨리아 식구들, 유스타프, 크로아, 로버트, 그리고 지금 눈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율리안을 생각했다.
그와 맞잡은 손에서 검과 총을 연무하느라 생긴 딱딱한 굳은살이 만져졌다.
고귀한 요하네스 공작의 명성과는 다르게 그의 손은 거칠었다.
하지만 처음 손을 잡았던 그때처럼 따뜻했다.
레베카의 굳은 입매가 기나긴 겨울에 얼어 있던 땅이 녹아드는 것처럼 풀렸다.
레베카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그동안 숨기고 있던 그녀의 본심이 청초하게 접힌 눈 사이로 살짝 비쳤다.
율리안은 눈을 크게 떴다.
사랑을 담은 레베카의 눈빛에 그의 가슴이 들끓었다.
미소를 머금은 입술 사이로 나오는 그녀의 음성은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율리안.”
자신의 손을 쓰다듬는 부드러운 레베카의 손길을 따라 온몸에 전율이 도는 듯했다.
율리안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레베카…….”
열에 못 이긴 율리안의 몸이 서서히 레베카에게 기울어졌다.
그가 다가오자 조금씩 새어 나오던 레베카의 본심은 금세 자취를 감췄다.
레베카는 일어서려는 율리안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갈 곳 잃은 율리안의 눈동자는 냉철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 언저리에 머물렀다.
레베카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제 옷을 벗도록 해.”
* * *
“이 조각상은 자유를 향한 갈망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하늘로 뻗친 세심한 물결무늬가 압권이지 않습니까?”
알리시아의 우려와 다르게 제플린은 생기가 가득한 얼굴을 빛내며 사람들에게 작품을 설명하고 있었다.
‘레베카…….’
아까 연회장에서 중얼거리던 제플린의 목소리가 알리시아의 머릿속에 자꾸만 맴돌았다.
알리시아는 혹여나 제플린이 레베카의 이름을 듣게 된다면 그의 기억이 돌아올까 걱정했다.
그래서 레베카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기 위해 그동안 갖은 노력을 들여왔다.
그런데 대체 어디서 그 이름을 듣고는 애틋하게 읊조리고 있었던 걸까.
만약, 들은 게 아니라면?
제플린 스스로 레베카를 떠올린 거라면?
알리시아는 불안한 마음에 손톱을 입으로 가져다 댔다.
심혈을 다해 관리한 그녀의 손톱은 알리시아가 시골뜨기였다는 걸 연상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귀부인의 것이었다.
잘 다듬어진 손톱을 이로 으깨려는 순간 옥타비오가 그녀의 손을 끌어내렸다.
“대체 얼마나 교육을 해야 그 몸에 품위가 깃드는 것이냐.”
옥타비오의 남청색 눈동자가 매섭게 알리시아를 질책했다.
알리시아는 얼른 옥타비오를 구석으로 몰아넣고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옥타비오! 제플린이 레베카의 이름을 불렀어. 이러다가 기억이 돌아오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레베카의 이름을 불렀다고?”
옥타비오가 제 턱을 쓸었다.
조금 생각에 잠긴 듯했지만 이내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게 어쨌다는 거야. 고작 이름을 불렀을 뿐인 걸.”
“그게 어쨌다니! 제플린이 기억을 되찾으면 나나 당신이나 좋을 것 없어.”
“말은 똑바로 해야지, 알리시아. 곤란한 건 너야. 내가 아니라.”
“옥타비오! 나를 백작 부인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잖아!”
옥타비오의 얼굴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래. 그 망할 놈의 약속 때문에 이 이상한 놀음에 장단 맞춰주고 있는 거 안 보여? 그냥 너도 없애버리고 새로운 여자를 구해다 주는 게 더 쉬운 일이었어.”
알리시아는 조금 충격 어린 얼굴로 옥타비오를 바라보다가 이내 눈을 부릅떴다.
“이렇게 나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파비올라와 네 관계를 말해 버릴 거야.”
옥타비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알리시아가 이어서 말했다.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당신이 항상 끼고 있던 그 반지, 파비올라가 목에 걸고 있더라. 그리고 제플린이 파비올라를 내쳤을 때 당신 소유의 저택에 그녀를 숨겨두었잖아.”
‘이 영악한 쥐새끼 같은…….’
옥타비오는 알리시아를 이대로 처리해 버릴까 잠깐 고민하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알리시아는 목적을 위해 독한 약품도 견뎌냈다.
자존심 따위는 버리고 레베카의 흉내를 내기도 했고.
손에 원하는 것만 쥐어주면 그를 위해 기꺼이 움직일 만한 이용 가치가 있는 여자였다.
옥타비오가 적대적인 눈빛을 거두고는 이내 눈웃음을 쳤다.
“꽤 수완이 좋아졌는걸? 네 사람이라도 만든 모양이지?”
“굳이 사람을 쓰지 않아도 추측할 수 있는 일이야.”
“네가 백작에게 말하든지 말든지 상관은 없다만, 백작이 기억을 되찾으면 확실히 귀찮아지긴 하겠지. 대책을 세워야겠어.”
“대책?”
“네 보잘것없는 장점을 한번 잘 살려보도록 하지. 눈물 연기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하잖아.”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옥타비오의 말에 알리시아는 미간을 모았다.
그녀는 주변을 한번 슥 훑어보고 말했다.
“그나저나 요하네스 공작의 약혼녀에 대해 아는 거 있어?”
옥타비오는 이층에 시선을 집중하고 말했다.
“아니. 오늘 처음 봤어. 내가 모르는 정보가 있다니. 요하네스 공작 성에 있는 사냥개는 갈아치워야겠군.”
“그 여자, 조금 낯익지 않았어?”
“가면을 썼는데 누군지 네가 어떻게 알아?”
“하지만 옥타비오, 금발에 푸른 눈이잖아.”
조심스러운 그녀의 말에 옥타비오는 코웃음을 쳤다.
그는 이층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하인들을 확인하고는 알리시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설마, 레베카라고 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그렇게 따지면 오늘 참석한 손님 중에 3할은 전부 레베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