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82화 (82/232)

82.

“그게 아니라…….”

알리시아는 그렇게 짙고 아름다운 푸른색 눈은 흔하지 않다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옥타비오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게다가 요하네스 공작이 뭐가 아쉬워 레베카 같은 여자와 약혼을 해? 그 여자는 백작에게도, 신에게도 버림받은 여자야. 그녀의 처참한 마지막 모습이 기억나? 흉터 하나 없이 단기간 안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불가능해. 그리고 오벨리아가가 그렇게 비싼 드레스를 마련할 재력이 있을 리가 없잖아.”

옥타비오의 말에도 알리시아는 영 불안한지 가슴을 부여잡고 말했다.

“오벨리아가는 분명 빚을 다 갚았다고…….”

“옥타비오.”

싸늘한 그레이스의 부름에 옥타비오와 알리시아가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으로 점검을 해야 하니 이층을 확인해보라는 백작님의 명이시다.”

“아무래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하인들의 움직임이 영 미덥지 않더군요. 그나저나 연회 내내 보이지 않으시던데, 어디에 계셨습니까?”

옥타비오가 한껏 떠보는 어투로 물었다.

그레이스는 기분 나쁘게 저를 훑는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말했다.

“내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자네에게 보고해야 하나?”

차가운 그레이스의 어조에 옥타비오가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물론, 그럴 필요는 없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옥타비오는 인파를 뚫고 유유히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그가 자리를 뜨자 그레이스가 알리시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레이스의 무심한 눈빛이 자신을 향하자 알리시아는 또다시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곧 자신이 백작 부인이고 그레이스는 아랫사람이라는 걸 되뇌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레이스가 모래가 버석거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이렇게 구석에 오래 계시는 건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부인이 연회의 주최자라고 제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나가서 안주인의 역할을 다하십시오. 사교계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셨지요? 페튜니아 후작 부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녀의 마음에만 든다면 사교계 생활이 탄탄해질 겁니다.”

상냥한 말투는 아니었지만 평소에 자신을 깔보던 그레이스의 태도와 확연히 달랐다.

게다가 도움까지 주겠다고 하다니.

알리시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레이스의 뒤꽁무니를 쫓아갔다.

“페튜니아 부인. 이쪽은 알리시아 데본셔 백작 부인이십니다.”

“어머, 그레이스. 오랜만이네요.”

페튜니아가 환한 미소로 그레이스를 맞았다.

그녀의 매혹적인 눈길이 그레이스의 무미건조한 얼굴을 지나 쭈뼛거리고 서 있는 알리시아에게 멈추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연회는 즐기고 계신가요?”

알리시아는 긴장해서 뻣뻣하게 굳은 입매를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써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신의 유일한 장점은 무해하고 순진한 아름다움이니 그 편을 강조하는 게 좋았다.

다행히 효과가 있었는지 예리하게 꽂히던 페튜니아의 시선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당연히 즐기고 있지요. 데본셔의 가을 무도회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연회랍니다. 이번에는 부인께서 주관하셨다고 들었는데, 취향이 고풍스러우시네요. 그동안의 연회와 다를 바 없이요.”

“감사합니다! 많이 애를 썼어요!”

사실 그동안 그레이스가 해온 것과 다를 바 없는 걸 보니 네가 한 일은 거의 없지 않냐는 말을 칭찬을 빙자해 비꼬아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사교계의 복잡한 대화를 알 턱이 없는 알리시아는 페튜니아의 칭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는 정말 기쁜 듯 감사를 표했다.

‘뭐야, 멍청하잖아.’

페튜니아는 알리시아가 레베카를 밀어내고 백작 부인 자리를 꿰찬 여자라기에 조금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천박한 평민에 어리석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페튜니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머리를 염색하고 눈동자 색을 바꿀 정도의 각오라면 굉장한 야심가에 책략가가 아닐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소문처럼 그저 자리에 눈이 먼, 멍청하기 짝이 없는 천박한 소녀가 아닌가.

페튜니아는 떠오르는 조소를 감추기 위해 얼른 가면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녀의 가면에 달린 공작새의 화려한 깃털이 살랑거렸다.

‘하지만 잠시간의 유흥으론 괜찮겠어.’

데본셔 백작가는 엄청난 재력가였다. 그곳의 부인과 친해져서 나쁠 건 없었다.

보아하니 알리시아는 제가 조금만 잘 해줘도 구하기 힘든 보석이나 장식품 따위를 갖다 바칠 부류였다.

페튜니아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말을 붙이려는 주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알리시아의 팔짱을 꼈다.

“아무래도 만나 뵙고 싶었는데 백작님께서 부인을 놔주시지 않아 말 붙이기가 힘들어서 곤란하던 참이었습니다. 부인께선 소문보다 훨씬 더 아름다우시군요.”

내로라하는 귀족 중 페튜니아가 자신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알리시아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율리안의 도발 이후 손님들이 자신을 은근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기에 속상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사교계의 여왕이라 불리는 페튜니아가 자신과 다정히 팔짱까지 꼈다.

자신을 무시하던 사람들의 멍한 표정이 볼만했다.

게다가 페튜니아는 알리시아와 비슷한 처지의 인물이었다.

랭스터 후작의 정부였던 페튜니아는 후계가 없던 그에게 아들을 낳아주었다.

그리고 본처였던 후작 부인이 노환으로 죽자 당당히 페튜니아 랭스터 후작 부인의 자리에 올랐다.

그녀의 아들이 후계자가 된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랭스터 후작이 페튜니아와 그의 아들을 끔찍히 아낀다고 들었다.

그의 총애가 크면 클수록 페튜니아의 권력 또한 커졌다.

페튜니아는 랭스터라는 이름으로 사교계에 등장했지만, 이젠 페튜니아 그 자체가 하나의 고유명사가 될 만큼 그녀는 유명인사로 자리 잡았다.

알리시아는 존경심이 가득한 눈으로 페튜니아를 바라봤다.

정부 출신이었다고는 하나 이렇게 많은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다니. 자신도 페튜니아처럼 되고 싶었다.

알리시아는 윤기가 흐르는 페튜니아의 정열적인 붉은 머리칼과 시원스럽고 강인한 이목구비를 주시하며 말했다.

“하지만 외모가 다가 아니지요. 많이 가르쳐주세요. 당신처럼 되고 싶어요. 페튜니아 후작 부인.”

페튜니아의 진한 녹색 눈동자에 일순 짜증이 떠올랐다.

알리시아가 자신에게 내거는 기대의 정체가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페튜니아가 저와 같은 처지에 있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웃기는군.’

부유하지는 않은 집안이었지만 이래 봬도 자신은 귀족이었다. 시골 어디서 굴러먹다가 왔는지 모를 알리시아와 자신은 출신부터 달랐다.

게다가 알리시아는 비열한 수를 써서 이혼당한 레베카의 자리를 꿰찼다.

하지만 자신은 정정당당히 때를 기다려 정식 부인의 자리를 물려받은 것뿐이었다.

후작의 재산에 혹하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겠지만 어쨌든 의도적으로 그에게 접근한 건 아니었다.

후작의 애인으로 있는 동안 본부인의 자리를 넘보며 술수를 쓴 적도 없었다. 그러니 세간의 평가가 좋을 수밖에.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나처럼 될 수는 없을 거다.’

페튜니아는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마침 무료하던 참이었다. 헛된 기대를 품는 알리시아를 지켜보는 게 퍽 즐거울 것 같았다.

페튜니아는 열띠게 사업계획을 설명하는 제플린을 슬쩍 바라보았다.

알리시아는 제 남편이 뭐라 떠들든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페튜니아의 팔찌를 흘깃 훔쳐보고 있었다.

‘비슷한 수준으로 어울려 줘야겠군.’

페튜니아가 짐짓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백작님이 뭐라 하시는지 머리가 아파서 도저히 모르겠군요. 우리 이러지 말고 저기 분수대로 가 봐요. 초콜릿 분수라니, 너무 근사하네요.”

“부인도 저랑 비슷한 생각인가 봐요. 저걸 처음 봤을 때 저도 깜짝 놀랐답니다. 맛도 좋으니 한번 드셔보세요.”

“좋아요.”

계산 없이 수줍은 웃음을 내보이는 알리시아에게 페튜니아는 화답하듯 환히 웃어 보였다.

벌써부터 자신과 알리시아를 비교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알리시아를 까내리고 자신을 추켜세우는 칭찬뿐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 질 나쁜 장난이긴 했지만 어찌 됐건 이런 상황은 언제나 즐거웠다.

올 시즌에는 꽤 괜찮은 들러리를 구한 것 같았다.

* * *

“아직 멀었어?”

“거의 다 돼가.”

율리안을 기다리며 마차 밖에 서 있는 레베카는 할 일 없이 돌멩이를 툭 찼다.

그 모양새를 보던 칸나가 발끈해서 말했다.

“감히 레베카 님을 기다리게 하다니. 건방진 자로군요.”

“꾸밀 게 많다잖니. 아무래도 빛의 전당으로 가야 하니까.”

“누가 저를 눈여겨본다고. 굳이 필요한 역할도 아니지 않습니까. 조용히 마차에서 기다릴 것이지.”

“어이. 다 들리거든? 너처럼 나한테 불손한 사람은 처음 봤다. 게다가 그놈의 일그러진 낯짝을 구경하고 싶지 않은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율리안의 볼멘소리와 함께 둔탁한 소리를 내며 마차의 문이 열렸다. 그가 마차의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레베카는 갈색 가발을 뒤집어쓴 율리안을 바라봤다.

그는 남청색의 연미복으로 갈아입었다. 흰색 가면까지 쓰니 영락없이 다른 사람이었다.

레베카가 그의 갈색 가발을 매만지며 말했다.

“당신은 갈색 머리도 잘 어울리네. 자연스러운 가발로 잘 구했구나.”

율리안이 눈을 반짝이며 레베카를 바라봤다.

“어울려?”

“응. 머리를 내린 것도 마음에 들어. 아무도 당신이라고 생각 안 할 거야.”

“당신도 하녀 복장이 잘 어울……. 아, 이건 칭찬이 아닌가?”

“뭐든지 잘 어울린다는 건 칭찬이긴 하지.”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칸나는 제 검은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염색약을 어디서 구해야 하나 하고 자신이 아는 상점들을 떠올렸다.

그때 레베카가 손뼉을 쳤다.

“잡담은 이제 그만하고. 다들 자리로 돌아갈 시간이야.”

“크로아는?”

“크로아는 벌써 빛의 전당에 잠입했어. 준비가 다 됐다고 방금 레오가 서신을 가져왔지.”

레베카는 발치에 서서 크게 하품하는 레오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율리안이 못마땅할 정도로 사이가 좋은 레오와 레베카를 번갈아봤다.

일순 심기가 불편해진 그는 레오를 향해 딱딱하게 내뱉었다.

“넌 여기서 망이나 잘 보고 있어. 누가 마차를 발견하면 즉시 내게 알리러 오고.”

‘알아서 잘 할 테니 명령하지 마. 애송아.’

레오가 퉁명스럽게 말을 건네왔다.

율리안은 레오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는 레베카에게 레오의 앙칼진 실체를 알려주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하지만 말해도 믿지 않겠지.

율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면 레오와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자신뿐이란 게 답답하기만 했다.

세 마리의 검은 고양이가 레오를 보필하며 마차 근처에 늠름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럼 이제 가 볼까.”

레베카는 하녀 모자를 꾹 눌러썼다.

칸나도 그녀와 같은 차림새로 레베카의 곁에 섰다.

레베카는 저택으로, 율리안은 빛의 전당으로 향할 참이었다.

갈림길에서 헤어지기 전에 율리안은 뒤를 돌아 레베카에게 말했다.

“행운이 따르기를.”

레베카도 싱긋 웃고는 말했다.

“행운이 따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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