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빛의 전당으로 향한 율리안은 자연스럽게 인파 속에 섞여들었다.
가면 무도회라 천만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연단에 서서 열변을 토하는 제플린을 향해 혐오를 표하는 율리안이 금세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율리안은 주변에 모인 사람들을 흘깃 훑어봤다.
제국에서 영향력이 있다는 귀족은 전부 모인 것 같았다.
개중에는 이름난 예술가들과 무명 예술가들이 섞여 있었다.
데본셔의 가을 무도회에서 제플린이 주목한 작품의 주인은 엄청난 명예를 얻었다.
제플린이 선택한 작품의 값이 껑충 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겨울에 있을 제국 박람회에 출전할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 이곳에 모인 예술가들이 눈에 불을 켜고 제플린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혹시나 제플린이 갈채를 보낸 작품 중에 제 작품이 있을까 싶어 가슴을 졸였다.
게다가 제플린을 주시하는 자는 예술가뿐만이 아니었다.
최근 들어 사업에 손대는 귀족이 많아졌다.
자히드라가 황제가 되고 난 뒤 귀족이 소유한 땅에서 거둬들일 수 있는 세금의 양이 한정되었다.
게다가 쇄국 정책을 펼치던 지난 황제들과 달리 자히드라는 활발한 수출입을 장려했다.
그 탓에 값싼 곡류가 외국에서 다량으로 들어와 귀족들이 땅에서 거둬들이는 수익이 현저하게 줄었다.
예전에는 어느 정도 뒷돈을 주면 세금을 재량껏 올리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자히드라는 그런 면에 있어서 엄격하게 처벌을 내렸다.
이제 귀족들이 자신들의 씀씀이를 감당하기에는 땅에서 나는 세수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자연스럽게 노동을 천시하는 시대는 지나고, 바야흐로 직접 사업을 운영하는 시대가 찾아왔다.
제플린은 시대 변화에 발맞추어 일찌감치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일종의 선두주자였다.
그가 손대는 사업은 승승장구했고, 제플린의 사업 비법을 궁금해 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의 사업에 투자하고 싶은 사람이 많은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모두가 제플린의 사업이 자신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줄지 생각하며 눈을 도르륵 굴리고 있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능력 하나는 타고났군.’
율리안은 자신마저 혹하게 하는 제플린의 화려한 언변을 들으며 생각했다.
자신감 넘치는 그의 반반한 얼굴을 보니 배가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곧이어 처참히 구겨질 그의 표정을 상상하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율리안, 자네인가.”
어느새 다가온 자히드라가 율리안의 옆에 섰다.
율리안은 못 당하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용케 알아보셨군요.”
“여기서 데본셔 백작에게 적대적인 눈빛을 보이는 건 자네 하나밖에 없으니 금방 알아봤지. 그나저나 또 변장한 겐가. 자네 커플은 변장이 취미인가 보군. 평소에도 그러고 노는 건가?”
“더한 취미도 공유하고 있는데 알고 싶으십니까?”
율리안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자히드라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다가 곧 허탈하게 웃음을 내뱉었다.
“됐네. 내게 이렇게 오만방자하게 구는 것도 자네 한 명뿐일 줄 알았는데, 레베카 그 여인도 만만치 않더구먼. 하긴 그러니 자네를 이렇게 휘어잡았지.”
“그래서 제 약혼녀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지켜보려고 하네. 나는 첫인상으로 호와 불호를 가리는 사람은 아니니. 지금까진…….”
자히드라는 레베카를 떠올리는 듯 눈을 가늘게 좁혔다.
“꽤 흥미롭군. 조만간 자네의 약혼녀와 같이 황궁으로 오게.”
“그렇지 않아도 가려고 했습니다.”
“최근 들어 나를 찾는 횟수가 잦군?”
“청접장은 직접 드려야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카트린느와 자네의 혼사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 청첩장 이야기를 꺼내다니 여전히 당돌하기 짝이 없군. 자네의 느닷없는 약혼 소식에 내 딸이 울면서 황궁으로 돌아갔어.”
“이런. 전혀 모르던 사실입니다. 이거 죄송스러워서 어쩌지요. 황녀께서 부족한 탓이 아니라 제가 사랑에 빠진 탓이라고 잘 전해주십시오.”
율리안이 야살스럽게 입술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자히드라는 줄곧 제플린을 응시하고 있던 시선을 돌려 율리안을 빤히 쳐다봤다.
“인상이 변했군. 자네.”
“어떻게 말입니까?”
“겨울 같던 사내가 봄처럼 변했어. 연기를 잘하는 건지 아니면 진심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야.”
“그런가요.”
율리안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사는 게 즐거워진 것 같기도 했다.
지난날에는 아침에 눈을 뜨는 것조차 괴롭기 그지없었다.
오늘도 이 끔찍한 생명을 연명해야 하나 싶어 침대에 누워 몇 시간을 멍하니 있기도 했다.
그렇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삶이었다.
자신은 명예직이나 다름없는 공작이었다.
서류에 대충 도장만 찍고 평생을 먹고 놀아도 창고에는 재화가 그득하게 쌓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리만 지켜도 사람들이 알아서 칭송해 주었다.
그런 삶이 싫어 몸을 단련하고, 이런저런 사업을 벌여 봤다. 한때는 방탕함에 취해 있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뭘 하든지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 공허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운명을 거부하며 몸부림칠수록 허전함은 커지기만 했다.
삶이 무료하고 허망했다.
그러나 레베카를 만난 뒤로는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만큼 바빴다.
게으름을 피울 새가 없었다.
레베카가 부탁한 사안을 처리하고 결혼식 준비를 하다 보면 어느새 밤이었다.
밤에는 낮에 처리하지 못한 공작가의 자잘한 서류를 살펴봤다.
그렇게 정신없이 일하다 문득 창문 밖을 바라보면 새벽이 찾아오곤 했다.
어쩌다 짬이 생기면 오벨리아가의 따뜻한 환대를 그리며 레베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렇게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했던 적이 있었을까.
율리안은 지금의 삶이 썩 나쁘지 않았다.
레베카 한 사람의 등장만으로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레베카는 그의 세상을 변하게 했다.
“율리안.”
상념에 젖어 있던 율리안은 자히드라의 중후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명하십시오.”
“보기 좋네. 계속 그대로 봄이었으면 하는군.”
“예?”
“겨울은 사람을 죽이지만, 봄은 사람을 살리는 법이니.”
자히드라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율리안은 그의 말을 곰곰이 되새겨보다가 이내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입니다.”
제플린의 사업 설명이 끝났는지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자히드라도 무심한 얼굴을 숨긴 채 손뼉을 쳤다.
제플린은 흡족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럼 이번 연회의 목적이자 주인공을 소개하겠습니다.”
예술가들은 바짝 긴장을 한 채 제플린의 다음 말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올해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을 발표하는 시간이었다.
여기저기서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작품의 정체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기에 모두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율리안은 슬쩍 이층을 바라보았다.
하인으로 변장한 크로아가 난간에 서 있었다.
모두가 제플린의 뒤로 드리워진 그림을 바라보는 가운데, 홀로 이층 난간을 바라보고 있는 율리안이 눈에 띄었다.
구석에서 연회를 관망하고 있던 옥타비오가 율리안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의 시선을 따라 이층을 바라본 옥타비오가 멈칫했다.
몇 분 전에 점검할 때는 없었던 이름 모를 하인이 보였다. 하인은 그림을 가리려 난간에 매어둔 흰 천의 매듭을 풀고 있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옥타비오는 서둘러 제플린에게 신호를 보냈으나 이미 자신에게 한껏 취해 있던 제플린은 옥타비오에게 관심이 없었다.
‘빌어먹을.’
옥타비오는 제플린을 향해 서둘러 나아갔다.
하지만 밀도 있게 들어차 있는 인파에 막혀 쉽게 속도가 나지 않았다.
한참 뜸을 들이던 제플린은 좌중의 인내심이 한계치에 다다랐을 즈음 크게 외쳤다.
“희대의 명작을 소개합니다!”
촤르륵 소리를 내며 그의 뒤로 거대한 천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플린은 사람들의 감탄사를 기대했다.
특히나 그는 황제의 얼굴을 예의주시했다.
오늘의 연회는 황제를 위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며칠 전, 제플린은 빛의 전당에서 그림을 정리하다 문득 황제가 자신을 감금했던 기억을 되찾았다.
그는 기억을 더듬으며 그 당신의 상황을 정리해봤다.
감금당한 당시엔 도무지 황제가 자신에게 왜 그런 벌을 내렸는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찬찬히 생각하다 보니 황제의 감금령이 일종의 길들이기였다는 걸 깨달았다.
황제는 그가 화가 중에 바리니카를 가장 좋아한다는 걸 알고 바리니카를 이용해 자신을 시험한 것이었다.
마치 이래도 자신을 따르겠냐고 압박을 하는 것 같았다.
‘폐하께서도 참 짓궂으시지.’
돌이켜 보면 다른 황제파 귀족들보다 조금 오만방자하게 굴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조금 반성하는 마음을 담아 황제를 위한 선물을 준비했다.
황제에게 밉보인 게 뭔지는 몰라도 이번 일로 만회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그가 예상하던 찬사는 그 누구의 입에서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다들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 제플린의 뒤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제플린은 황망하게 자히드라의 안색을 살폈다.
자히드라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다.
“제플린 데본셔 백작! 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돌연 들려오는 노기 가득한 질타에 제플린은 서둘러 뒤를 돌아봤다.
“이, 이게 어떻게 여기에…….”
제플린은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믿을 수 없어 입을 뻐끔거렸다.
섬찟한 기운이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세게 훑고 지나갔다.
다리에 힘이 풀린 그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휘청거렸다.
* * *
“이쪽입니다.”
개구멍을 통과하자 그레이스가 기다렸다는 듯 레베카를 안내했다.
뒤를 따라오는 칸나를 본 그레이스는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앞장섰다.
“그럼 저는 제 자리에 있겠습니다.”
칸나가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저택의 뒤편으로 향했다.
“저 아이가 대체 어딜 간단 말입니까.”
그레이스가 의심이 가득한 어투로 물었지만 레베카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당신이 할 일과는 상관없는 것 같은데. 어서 들어갑시다.”
할 말이 많은지 그레이스는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침묵을 지키는 걸 택했다. 제가 여기서 뭘 묻든지 레베카가 쉽게 답해줄 리가 없었으니까.
“이 이상은 동행하지 못합니다. 보는 눈이 많으니까요.”
그레이스는 벽에 늘어져 있는 수북한 담쟁이덩굴을 치웠다. 덩굴 사이로 투박한 나무 문이 나왔다.
그녀는 능숙하게 허리춤이 달린 열쇠 꾸러미에서 열쇠 하나를 찾아내어 나무 문에 꽂았다.
그레이스가 문고리를 잡아끌자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