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84화 (84/232)

84.

레베카는 위로 이어진 돌계단을 멍하니 바라봤다.

지난 생까지 합쳐 몇십 년을 백작저에 있었지만 난생처음 보는 통로였다.

“이런 곳이 얼마나 있는 겁니까?”

그레이스가 열쇠 꾸러미를 내밀었다.

“여기에 있는 열쇠의 수만큼입니다. 예로부터 반란이나 침략에 대비해 대저택에 은밀한 비밀통로를 만들어두곤 했죠.”

레베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저택에 있는 방 개수에 비해 그녀가 지닌 열쇠의 수가 지나치게 많다고 여겼었다.

그게 전부 비밀통로의 열쇠였다니.

그레이스가 주변을 한 번 살피고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나오실 때는 이 통로를 이용하시면 안 됩니다. 여길 아는 건 저와 백작님, 그리고 옥타비오밖에 없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저는 그리 생각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이 들켰을 때 곤란한 건 저도 마찬가지이니까요.”

“그럼 제 할 일은 이제 끝난 겁니다.”

“그전에 잠깐.”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듯 조급하게 등을 돌리는 그레이스를 레베카가 불러 세웠다.

그레이스가 불안한 낯빛으로 물었다.

“뭡니까?”

“빛의 전당 지하에 뭐가 있죠?”

그레이스가 움찔하더니 답했다.

“고문실이 있습니다. 레베카 님께서도 그건 아실 텐데요.”

“아니, 그거 말고, 문이 하나 더 있는 걸로 아는데요.”

그레이스는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모릅니다.”

“당신이 모른다니, 그걸 제가 믿을 것 같아요?”

“믿든 말든 레베카 님의 자유이지만 정말 저는 모릅니다. 빛의 전당이 지어질 때부터 옥타비오와 백작님만 은밀히 드나들던 곳이라는 것밖에는…….”

레베카는 그레이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진 않았다.

“어쩔 수 없죠. 혹여 짚이는 건 없나요?”

일순 그레이스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이걸 레베카에게 말해도 되는지 고민하는 듯했다.

하지만 헛간에서 보았던, 온전한 저택의 주인이 된 자신의 모습이 머릿속에 자꾸만 아른거렸다.

이내 마음을 굳힌 듯 그레이스가 입을 열었다.

“그곳에 대량의 생필품이 은밀하게 드나들고 있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생필품이요?”

“네. 그 이상은 정말로 모릅니다.”

레베카의 얼굴이 굳어졌다.

제플린은 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 걸까. 끔찍한 상상이 그녀의 뇌리에 떠올랐다.

하지만 곧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일단 지금은 눈앞의 일에 집중해야 했다.

레베카가 계단으로 들어서자 등 뒤에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덩굴이 내려오는 소리까지 들렸다.

레베카는 서둘러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문을 밀자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제플린의 잘 짜인 서재가 고요히 그녀를 맞이하고 있었다.

“어디 보자.”

레베카는 품 속에서 마석 두 개를 꺼내 서로 맞부딪혔다.

마석에서 환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살인적인 가격에 일반인은 손에 쥐어보지도 못한다는 빛의 마석이었다.

율리안이 지나가다 주운 돌멩이처럼 레베카에게 던져주었기는 했지만 손에 든 마석의 가격을 생각하면 아직도 살이 떨렸다.

레베카는 조심스럽게 서재를 뒤지기 시작했다.

예전에 뒤져보았던 서랍까지도 탈탈 털었다. 별다른 수확이 없었기에 레베카는 이마에 손을 올렸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건가.’

레베카는 허탈한 표정으로 색과 크기별로 정갈하게 정리해 놓은 책장을 바라봤다.

소름이 돋을 만큼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책장을 바라보던 레베카의 시선이 어느 책 하나에 멈춰 섰다.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이 관리된 다른 책들과 달리 그 책만 유달리 모서리 부분이 닳아 있었다.

“그래. 비밀통로가 하나 더 있어도 이상할 것 없겠지.”

레베카는 조금 의심스러운 손길로 책을 잡아당겼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레베카가 실망어린 표정으로 책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그 순간 책장에서 야트막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소리가 난 책장을 잡아당기자 책장이 부드럽게 열렸다.

책장이 있던 벽면에는 커다란 그림 하나가 걸려 있었고, 그 왼쪽에는 금고가 있었다.

레베카는 황급히 금고를 살폈다. 다행히 열쇠로 여는 게 아니라 특정한 숫자로 여는 금고였다.

정해진 횟수 이상으로 숫자를 틀리게 되면 영원히 열 수 없게 되는 금고가 있다고 들었다. 아니면 경고음이 울리거나 사냥개에게 알림이 갈 수도 있었다.

레베카는 신중히 제플린이 생각할 법한 숫자를 떠올렸다.

뻔하긴 했지만 우선 제플린의 생일에 맞춰 금고의 다이얼을 돌렸다.

금고를 세차게 흔들어 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럼 혹시…….’

레베카는 자신의 생일과 결혼기념일을 합친 숫자를 돌렸다.

긴장했는지 손에서 자꾸만 땀이 나는 탓에 다이얼을 몇 번이나 다시 쥐어야 했다.

마지막 숫자를 돌렸을 때 묵직한 소리가 들리더니 금고의 문이 스르르 열렸다.

‘이런 미친놈이…….’

제플린의 머릿속은 아무래도 레베카로 가득 차 있는 듯했다.

문득 한기가 느껴져 레베카는 손으로 팔을 문지르며 금고 안을 살폈다.

금고 안에는 진귀한 보석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고, 서류 더미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레베카는 서류 몇 개를 꺼내 펼쳐봤다.

“장부……?”

꺼내는 서류마다 수입과 지출 내역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장부가 중요한 서류이기는 했으나 이렇게 은밀한 금고에 넣어 둘 만큼의 것은 아니었다.

장부를 훑던 레베카의 손이 어느 이름에서 멈추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는 검토했던 장부를 다급하게 다시 꺼내 들었다.

“뭐지?”

<빛의 장미>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름으로 다달이 수입이 들어오고 있었다.

게다가 데본셔 백작가의 전체 수입의 2할을 웃돌 정도의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데본셔 백작가가 사업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엄청났지만 그만큼 제플린이 사치품과 예술품 수집에 쓰는 돈도 만만치 않았다.

사냥개를 유지하는 비용까지 합친다면 남는 것 없이 근근이 운영되고 있는 판국이었다.

‘빛의 장미’로부터 들어오는 수입이 없었더라면 파산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레베카는 장부를 좀 더 뒤지다가 수상한 항목을 더 찾아냈다

‘감옥 섬’과 ‘왕국’이라고 적힌 비밀스런 내역이었다.

‘감옥 섬’은 확실히 사냥개의 인질을 잡아두는 곳임이 틀림없었다.

이로써 그들이 잡힌 곳이 섬이라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하지만 ‘왕국’은 대체 무슨 의미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곳에도 적지 않은 돈이 빠져나가고 있었는데 자세한 내역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긴 왜 이렇게 추운 거지?”

주변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까 느꼈던 한기는 단지 불쾌한 소름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차가운 바람의 원천을 찾던 레베카의 시선이 그림으로 향했다.

그림에 가만히 귀를 대어보니 안쪽에서 바람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베카는 그림에서 귀를 떼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뒤로 물러나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바라봤다.

이제 보니 그림은 사람 한 명쯤은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통로를 가리기 딱 좋은 크기였다.

도금된 액자 안에 들어 있는 그림은 어느 궁궐의 연회장 모습을 담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부드러워 보이는 레드 카펫이 가운데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레드 카펫의 시작점에는 연단이 있었다.

연단 위에는 왕과 왕비가 거대한 금색 의자에 앉아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고, 황후의 품에는 공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안겨 있었다.

셋 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아름다운 얼굴의 가족이었다.

그리고 레드 카펫 옆으로 늘어선 사람들의 얼굴도 그에 못지않게 아름다운 이들뿐이었다.

그들은 모두 왕실 가족을 향해 선망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특별한 것 없이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는 평범한 장식용 그림이었다.

그림에는 아무 뜻이 없는 걸까?

레베카는 생각이 잠긴 채로 천천히 그림 쪽으로 다가갔다.

“……역시 어딘가로 이어지는 문이었어.”

그림 옆에 있는 벽면에 자그마한 열쇠 구멍이 보였다.

레베카는 열쇠 구멍을 들여다보다가 혹시나 싶어 그림을 밀어봤다.

벽에 완전히 고정된 듯 그림은 움직이지 않았다.

레베카는 미간을 모았다.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야. 제플린 데본셔.”

* * *

뒤를 돌아본 제플린은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원래라면 황제의 위엄 있는 모습을 담은 초상화가 네 점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제 눈앞에는 신전을 모욕하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림 속에선 홀딱 벗은 현 교황이 아름다운 사제를 끌어안고 희롱하고 있었다.

사제는 가난한 소작농에게서 돈을 갈취하고, 데프리아 여신상을 품에 안은 도박꾼은 제 자식을 신전에 팔아넘기고 있었다.

무엇보다 눈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주사위를 굴리는 광신도의 모습은 분명 누군가를 특정한 것이었다.

‘나잖아!’

제플린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문득 기억 하나가 그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희대의 걸작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바리니카……! 이 자식이 날 속였어.”

분명 자신과 닮지 않게 그리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림 속의 사내는 제플린의 초상화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광기 어린 자신의 표정을 보던 제플린은 핏기가 가실 정도로 손을 움켜쥐었다.

더 화가 나는 건, 지금 내걸린 작품이 진품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림의 내용은 그가 봤던 것과 일치했지만 제플린은 저게 모조품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깨달았다.

바리니카가 저렇게 거친 붓질을 할 리가 없었다.

‘자히드라. 이딴 싸구려로 나를 능멸해?’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주먹을 꾹 쥐고 부들거리던 제플린은 이내 심호흡을 했다.

먼저 억울함을 호소해야 했다.

누구보다 먼저 당장 이딴 짓을 벌인 수상한 자들을 잡아들이라 명을 내려야 했다. 그래야 후에 빠져나갈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다.

제플린은 다급히 뒤돌아서서 크게 입을 열었다.

“이건 모함……!”

하지만 황제의 고함이 더 빨랐다.

“백작을 당장 추포하라! 감히 신성을 모독하는 더러운 그림을 내보이다니!”

자히드라가 루비가 박힌 황금 지팡이를 거세게 바닥에 내려치며 말했다.

“하지만 폐하. 지금 당장은 백작을 추포할 인원이 부족합니다. 감금령을 내리시는 게 어떨지요. 어차피 내일 아침이면 신의 기사단이 심판을 내릴 것입니다.”

처음 보는 갈색 머리의 청년이 자히드라에게 첨언했다.

‘우리가 안전하게 빠져나가기 전에 기사단이 들이닥치면 곤란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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