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자히드라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말이 옳군. 이 시각부터 제플린 데본셔 백작을 백작저에 감금할 것을 명한다. 알프레드, 당장 근처 치안대에 연통을 넣어 이곳을 감시토록 하라.”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갑작스런 사태에 빛의 전당에 모인 사람들은 끈 떨어진 가방처럼 갈 곳을 몰라 우왕좌왕했다.
“이건 모함입니다! 폐하! 불손한 자들이 저를 위기에 몰아넣은 것입니다! 제가 뭣하러 제가 주관하는 연회에 이런 짓을 벌이겠습니까! 게다가 저 그림은 당신이……!”
제플린은 황제의 기사들에게 끌려 나가면서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자히드라가 짐짓 호통을 쳤다.
“시끄럽다! 어차피 모든 일은 신의 기사단에서 다 밝힐 것이니. 어서 백작을 저택으로 데려가라!”
“자히드라! 황제 폐하!”
제플린의 빛의 전당에서 사라지자 자히드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연회는 여기서 파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저 그림은 증거 인멸을 우려해 황궁에서 보관토록 하지.”
수군거리던 사람들이 자히드라의 말에 일제히 귀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율리안은 저 멀리서 눈물을 쏟으며 어느 남자에게 매달려 있는 알리시아를 곁눈질했다.
‘저자가 옥타비오겠군.’
옥타비오의 얼굴은 처참할 정도로 구겨져 있었다.
그는 평소 늘 지니고 있던 상냥함이란 가면을 벗어 버린 지 오래였다.
옥타비오의 이마에 굵은 힘줄이 솟아올랐다.
부릅뜬 그의 눈은 황제를 향한 적의로 타오르고 있었다.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여버릴 수 있을 만큼 매서운 눈길이었다.
율리안은 그의 험악한 얼굴을 보고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악마의 환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군.’
“내 연기가 어떠했나.”
어느새 다시 인자한 얼굴로 돌아온 자히드라가 율리안에게 넌지시 말했다.
“훌륭하셨습니다.”
자히드라는 저마다의 가설을 내세워 수군거리는 인파들의 목소리를 엿들었다.
“데본셔 백작이 미쳤다고 저런 짓을 하겠어? 어디 높으신 분께 밉보인 거지.”
“백작보다 높은 사람은 몇 없는데 대체 누가 그런단 말이야.”
“높으신 분이 아닐 수도 있어. 어디 데본셔 백작에게 앙심을 품은 자들이 한둘인가. 게다가 신의 기사단이 나선다니 제대로 한 방 먹은 셈이야.”
“그러면 데본셔 백작은 이렇게 망하는 건가? 내 투자금은 어쩌고!”
“일단 지켜봅세. 오늘 새로운 사업에 투자하려던 계획은 잠시 넣어둬야겠어.”
레베카의 예상대로 제플린의 사업에 혹했던 사람들이 고뇌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깟 일로 데본셔 백작이 망하는 일은 없겠지만 큰 타격을 입을 건 분명했다.
자히드라는 이걸로 자신이 어떤 이득을 얻을 것인지 가늠해봤다.
그의 시선이 광신도를 그린 그림을 향했다.
잠시 그림을 관찰하던 자히드라가 눈을 크게 떴다.
“저건…… 제플린이 아닌가?”
표정이 제플린이 평소에 짓던 것과 달라 쉽게 유추할 수는 없었지만 자세히 보니 영락없는 제플린이었다.
율리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예. 장난 좀 쳐봤습니다.”
“자네답지 않게 유치한 짓을 했군. 저러면 빠져나갈 구멍이 생기지 않겠나. 굳이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을 리가 없으니 말일세.”
“사실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뭐라?”
“그림처럼 제플린이 신전에 충성하는 광신도일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증좌가 있는가?”
자히드라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신전과 한번이라도 결탁한 자라면 자신에 대한 배신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당장 내쳐야 했다.
율리안이 느긋한 어조로 대답했다.
“없습니다. 제 추측일 뿐입니다.”
“실없는 소리 하지 말게.”
자히드라는 조금 힘이 빠진 얼굴로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율리안이 말했다.
“그거야 신의 기사단이 백작을 어찌 대하는지 지켜보면 알게 되겠지요. 황제의 명령도 무시한다는 그 신의 기사단 말입니다.”
“그렇지. 두고 봐야겠지.”
두고 본다는 게 제플린일지 신의 기사단일지 율리안은 잠시 고민했다.
“고, 공작님……!”
그때 누군가가 다급하게 율리안의 팔을 붙들었다.
세차게 떨리는 손길에 율리안이 화들짝 놀라 아래를 내려다봤다.
칸나였다.
칸나의 물기 맺힌 밤색 눈동자가 절실하게 그를 찾고 있었다.
급히 뛰어왔는지 그녀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칸나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득 떨어졌다.
율리안이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레베카 님이! 레베카 님이 위험합니다!”
“뭐……?”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요!”
칸나가 율리안의 손목을 으스러뜨리듯 붙잡고는 입구 쪽을 향해 뛰었다.
그녀에게 어깨를 부딪친 행인들이 눈살을 찌푸렸으나 칸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인파를 헤쳐 나갔다.
율리안도 그녀의 빠른 뜀박질에 맞춰 긴 다리를 내질렀다.
레베카가 위험하다.
* * *
더 이상 뒤져 봤자 아무런 수확이 없을 것 같았다.
레베카는 기억을 더듬어 장부를 모두 원래 자리에 두었다.
금고의 문을 잠그고 책장까지 원래대로 해두자 누가 잠입했냐는 듯 서재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밖에서 말이 우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오는 걸 보니 벌써 연회가 끝난 성싶었다.
분명 일이 잘된 게 틀림없었다.
레베카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챙겨온 줄사다리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발코니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신선한 공기가 훅하고 콧속을 파고들었다.
레베카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만월이구나.”
둥그런 보름달이 구름에 가려 있었다. 새하얀 발코니에 어둑한 그림자가 내렸다.
레베카는 그림자 위를 걸어 난간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발밑을 내려다봤다.
아찔한 높이 밑에는 휑한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침입자를 우려해 나무 한 그루도 심어놓지 않아 발코니 밑으론 숨을 만한 구석이 없었다.
그곳에 멀거니 서 있던 칸나가 레베카를 발견하곤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레베카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칸나와 함께 빠져나가면 완벽한 임무 완수였다.
레베카는 사다리를 난간에 고정하기 전에 발코니와 서재를 연결하는 문을 바라봤다.
통유리창에는 난간을 붙잡고 있는 자신의 모습만이 비쳤다.
‘아, 안에서만 보이는 창문이었지.’
꽤 곤란했다. 그래도 아직까진 인기척이 없는 것 같아 레베카는 서둘러 사다리의 걸쇠를 그러쥐었다.
“네놈 짓이냐!”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군가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레베카가 걸쇠를 난간에 걸기도 전에 우악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얼얼한 통증에 레베카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레베카는 크게 반항하며 서둘러 사다리를 내리려고 했으나 거센 손길의 주인이 그녀를 흔들었다.
그 바람에 레베카의 모자와 줄사다리가 땅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젠장!’
레베카는 맥없이 떨어지는 줄사다리와 경악하는 칸나를 슬쩍 보곤 이를 악물었다.
“어딜 도망치려고! 빛의 전당도 네 짓이지? 배후가 누구야?”
성난 하늘 같은 눈이 레베카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레베카는 목소리만 듣고도 그가 제플린이란 걸 알아차렸다.
제플린이 밑을 내려다보는 레베카를 제 앞으로 돌려세웠다.
“당장 말해! 누가 시킨 짓이야? 자히드라 황제인가?”
제플린은 당장이라도 레베카를 떨어트릴 기세로 멱살을 움켜쥐고 난간 밖으로 그녀의 몸을 밀었다.
레베카의 젖혀진 허리가 아슬아슬하게 난간에 걸쳐졌다.
여기서 제플린이 손을 떼기라도 한다면 그녀는 그대로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칠 것이었다.
‘침착하자.’
사지가 떨려왔다. 하지만 레베카는 애써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아래를 향했던 눈을 서서히 들었다.
“그만해. 머리가 울리잖아.”
레베카는 제 멱살을 단단히 쥐고 있는 제플린의 손목을 탁하고 잡았다.
그리고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제플린의 입이 벌어졌다.
“너는……?”
모자가 벗겨진 탓에 레베카의 긴 금발이 그녀의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어느덧 구름 걷힌 달이 레베카의 하얀 얼굴 위로 아낌없이 빛무리를 뿌렸다.
그 탓인지 그녀의 짙푸른 눈동자가 잔잔한 호수처럼 맑게 빛났다.
그녀의 강인한 눈매가 제플린을 찌르듯이 치켜 올라갔다.
잘 익은 사과 같은 빨간 레베카의 입술이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잘 지냈어?”
예상치 못한 아름다운 레베카의 모습에 제플린이 주춤했다.
그 틈을 타서 레베카는 힘을 짜내어 그의 머리통을 향해 머리를 날렸다.
빡!
머리뼈가 크게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중심을 잃은 제플린은 휘청거리다 레베카의 멱살을 잡은 채 뒤로 넘어졌다.
그의 위로 엎어졌던 레베카는 불쾌한 표정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제플린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조용히 뇌까렸다.
“머리가 단단한 걸 보니 다 나았나 보네. 낯짝도 반반한 게 잘 먹고 잘 살았나 보군. 못 지내길 바랐는데 참 아쉬워.”
“당신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눈을 하고서 제플린이 일어섰다.
바람이 불어와 레베카의 머리칼이 나부꼈다.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칼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레베카는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날 잊으면 안 되지. 아직 내게 갚아야 할 게 산더미잖아. 그렇지 않아, 전남편님?”
“레베카…….”
제플린은 레베카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머릿속에 욱여넣었다.
점점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안개 서린 흑백 기억에 색이 새어들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를 채우고 있던 안개가 서서히 걷혔다.
“아악!”
제플린이 머리를 움켜쥐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수한 기억이 순식간에 그를 집어삼켰다.
새하얀 눈밭에서 뛰어노는 어떤 소녀는 레베카였다.
구혼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손바닥 위로 기다란 손가락을 살며시 뻗는 여인은 레베카였다.
눈밭에서 얼굴을 붉히며 청혼을 수락하던 레베카는,
화려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수줍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레베카는,
달뜬 얼굴로 침대에서 숨을 몰아쉬며 황홀한 체취를 뿌리던 레베카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아름다운 오로지 나만의 신부, 나의 꿈이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제플린은 레베카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레베카가 입을 살짝 가리며 말했다.
“어머, 기억이 돌아왔어? 내 박치기가 효과가 있어 다행이네.”
제플린이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눈물로 젖은 그의 얼굴 위로 만연한 기쁨이 차올랐다.
“돌아왔구나. 나의 레베카.”
레베카는 제플린의 행복한 미소를 아니꼬운 시선으로 물끄러미 응시했다.
역시 그가 기뻐하는 건 불쾌했다.
레베카는 아직 무릎을 꿇고 있는 제플린에게 고개를 숙이고 속삭였다.
“맞아. 돌아왔어. 하지만 너의 레베카로 돌아온 게 아니야.”
“아니야. 넌 나의 레베카로 돌아왔어. 아아, 아름다운 나의 레베카.”
제플린은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레베카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레베카는 코웃음을 치며 자신을 향하는 제플린의 손을 차갑게 내쳤다.
“날 만질 생각하지 마. 소름 끼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