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스산한 시선이 제플린에게 내리꽂혔다.
레베카의 그런 얼굴을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제플린은 얼굴을 굳혔다.
“왜, 왜 나를 향해 그런 얼굴을…….”
레베카는 그의 오른뺨에 손을 올렸다.
부드러운 그녀의 손길에 제플린은 잠시 황홀한 미소를 지었다.
짜악!-
하지만 곧 그녀가 쥐고 있던 오른뺨에 화끈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제플린은 오른뺨을 붙잡고 황망히 레베카를 바라봤다.
“이게 대체…….”
“역시 이걸로는 부족해.”
짜악!-
이번에 왼쪽 뺨이었다.
눈앞에 별이 번쩍였다. 얼얼한 통증에는 현실감이 없었다.
제플린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레베카는 그의 뺨을 쳤던 팔을 흔들었다. 그의 뺨을 내려친 손이 아려왔다.
자신은 제플린의 뺨을 마음껏 내려치지도 못할 만큼 약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단련을 해야겠어.’
제플린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레베카!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거야!”
그의 질문에 레베카가 코웃음을 쳤다.
“대체 왜 그러냐고? 넌 날 지옥 속에 가둬뒀어. 내게 쇠사슬을 채우고 오직 너만의 인형으로 만들려고 했지. 그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알아?”
“다, 당신도 좋아했잖아.”
“당신,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당신은 내 친정을 무너뜨렸지. 당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내 팔다리를 다 잘랐잖아. 그게 좋아한 걸로 보였어? 새장에 갇힌 새가 부르는 노래가 기쁨의 노래 같아?”
레베카의 입가에 오싹한 미소가 번졌다.
“난 널 부술 거야. 제플린 데본셔.”
“나를 부순다고……?”
“그래. 네가 아끼는 걸 모두 짓밟고 깨부순 다음에 불태워 버릴 거야. 그리고 그 불구덩이 안에 네 하찮은 몸뚱이도 던져 버릴 거야.”
“레베카! 어떻게 당신이 그런 험악한 말을! 못 들은 걸로 칠게. 날 떠나더니 정신이 이상해진 모양이군.”
“아니, 똑똑히 들어, 제플린.”
레베카가 제플린의 얼굴을 포악스럽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의 귀에 대고 한 글자씩 새겨 넣는 것처럼 또박또박 읊조렸다.
“네게 지옥을 선사해 줄게.”
제플린이 충격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베카는 무심하게 그의 얼굴을 내동댕이쳤다.
그 탓에 제플린의 몸이 옆으로 내쳐졌다.
중심을 잃어 기우뚱하던 제플린은 황급히 손을 뻗어 바닥을 짚었다.
까슬한 모래의 감각이 그의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제플린은 레베카를 올려다봤다.
레베카의 환멸 가득한 눈빛이 그에게 꽂혀 들었다.
지독한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조용히 레베카를 쳐다보던 제플린이 입을 열었다.
“당신…… 살이 좀 쪘군.”
레베카는 순간 자신이 뭘 들었는지 몰라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매서운 협박을 들은 사람의 입에서 나올 대답이 아니었다.
레베카는 곧 그 대답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제플린은 레베카의 말을 깡그리 무시한 채 그녀의 몸을 훑고 있었다.
그랬다. 그에겐 자신이 어떤 말을 지껄여도 인형이 조잘대는 것 그 이상이 될 수 없었다.
인형의 말을 주의 깊게 듣는 사람은 몇 없다.
그러니 제플린이 그녀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듣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레베카는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사납게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는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제플린 데본셔!”
그녀가 악을 지르듯 소리쳤다. 맹렬한 분노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당신은 정말 깨닫는 게 없구나! 멍청하고, 또 멍청해. 이렇게 어리석은 당신만큼 지옥이 어울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때 레베카의 등 뒤에서 묵직한 외침이 들려왔다.
“레베카! 뛰어내려!”
율리안의 목소리였다.
레베카와 제플린의 시선이 동시에 발코니 밑을 향했다.
“안 돼!”
곧이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깨달은 제플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레베카는 망설임 없이 난간을 향해 내달렸다.
제플린이 레베카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가 절박하게 외쳤다.
“내게서 도망칠 생각 하지 마!”
레베카가 난간 위에 올라갔다. 바람이 불어오자 그녀의 다리가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레베카는 아래를 확인하고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뛰어내리기 전, 그를 향해 차갑게 뇌까렸다.
“난 더는 도망치지 않아. 단지 때를 기다릴 뿐이지.”
“레베카!”
그의 간절함을 비웃듯 레베카는 단숨에 난간을 박차고 뛰어내렸다.
그녀가 사라진 난간을 발견한 제플린의 사지가 미친 듯이 떨려왔다.
그는 푸르른 잔디밭이 레베카의 검붉은 피로 물들었을까 봐 쉬이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제플린은 잠시간 밭은 숨을 내쉬며 텅 빈 발코니를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차마 레베카의 죽음을 확인할 수 없었다.
난간 위에 서서 그를 똑바로 바라보던 레베카의 잔상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카나리아의 깃털처럼 휘날리던 레베카의 머리칼을 떠올리던 제플린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먹으로 내려쳤다.
“젠장! 움직여! 이대로, 이대로 레베카를 잃을 수는 없어!”
제플린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떨리는 다리를 끌다시피 해서 난간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난간을 잡고선 레베카가 추락한 아래를 바라봤다.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어떤 사내가 레베카를 받아 안고서 드넓은 잔디밭을 달리고 있었다.
제플린은 사내의 갈색 머리를 망연히 바라보다 주르륵 바닥에 주저앉았다.
* * *
줄사다리가 발코니에서 떨어지자 칸나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이 난간 밖으로 레베카의 상체가 불쑥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레베카의 몸을 붙잡고 있는 건 제플린인 것 같았다.
칸나의 눈이 빠르게 굴러갔다.
그녀는 서둘러 레베카가 탈출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봤다.
하지만 운 좋게 제플린의 손에서 빠져나간다 해도 레베카가 탈출할 경로가 없었다.
이미 저택 감금령이 내려져 사방에 감시하는 눈이 깔렸을 것이었다.
게다가 그레이스가 협조했다는 사실이 드러날 테니 레베카의 성격상 그녀는 절대 비밀통로를 이용하지 않을 것이었다.
레베카가 난간에서 뛰어내려 안전하게 착지를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긴 했다.
하지만 레베카의 운동신경으로 가능할 리 없는 방법이었다.
누군가가 그녀를 받아 안거나 푹신한 구조물을 바닥에 깔아둔다면 승산이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긴급한 이 상황에 푹신한 구조물을 구할 수도 없거니와 그걸 찾았다 하더라도 옮기는 동안 들킬 위험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한들 저 높이에서 추락하는 레베카를 아무 일 없이 받아 안을 가능성도 없었다.
레베카와 자신은 신장 차이가 크게 났다.
칸나는 무력한 상황에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남자였으면 했다.
레베카보다 더 큰 키에, 한계가 없는 근력으로 레베카를 안전하게 받아 안을 수 있다면.
그랬다면 지금 레베카가 저 위에서 수모를 당하지 않아도 될 텐데.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눈물이 차올라 눈앞이 흐려졌다.
하지만 자책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칸나는 최후의 희망을 떠올리며 그를 향해 다급히 뛰어갔다.
“레베카 님이! 레베카 님이 위험합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칸나의 머릿속엔 오로지 레베카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율리안은 자신의 손목을 잡은 칸나의 거친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칸나의 손은 고단했던 삶을 대변하는 흉터로 가득했다. 그녀의 단단한 손끝에서 간절함이 느껴졌다.
율리안은 찬찬히 시선을 올려 자신의 손을 잡고 달리는 칸나의 뒷모습을 살폈다.
그녀의 상의는 땀으로 투명해져 있었다.
‘단순한 충심이 아니었나.’
대체 레베카가 칸나에게 어떤 사람이기에 이토록 절박하게 레베카를 구하러 가는 걸까.
율리안은 칸나가 레베카에게 충성스러운 자라 생각했다.
주군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은 종종 있어 왔으니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칸나에게 레베카는 충성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를 이렇게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다는 사실에 경외감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에게 그동안 불손했던 칸나의 태도가 조금 이해가 됐다.
‘보호하려던 거였나…….’
율리안은 크로아를 떠올렸다.
그도 칸나가 자신에게 그러하듯 레베카에게 적대적인 건 마찬가지였다.
‘아니야. 뭔가 달라…….’
그 간극의 정체를 쉬이 찾을 수 없어 율리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그는 상념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레베카였다.
율리안은 칸나를 앞질렀다.
“잠시 실례하지.”
그리고 칸나를 냅다 둘러메고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 편이 좀 더 효율적이었는지 방금보다 속도가 빨라졌다.
칸나가 이리저리 방향을 지시하면 율리안이 그녀의 손짓에 따랐다.
지나가던 사냥개 몇몇이 둘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칸나의 얼굴을 확인하자 그들은 침묵하곤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냥개들은 율리안과 칸나가 향한 방향으로 가는 고용인들을 저지하기도 했다.
레베카는 며칠 전 데본셔 저택의 사냥개들에게 미리 연통을 넣었다.
이혼한 뒤로도 레베카는 꾸준히 저택의 사냥개들과 접촉했다.
그리고 결국 옥타비오와 베이츠를 제외한 모든 사냥개를 그녀의 편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그레이스가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긴 했으나 그녀의 욕망이 가득한 눈빛을 보아하니 곧 레베카의 편이 될 게 자명했다.
데본셔 백작가를 지탱하던 네 개의 주춧돌 중 하나가 휘청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는 사냥개들을 보고 율리안은 혀를 내둘렀다.
신기할 정도로 모든 것이 레베카의 뜻대로였다.
“저기입니다!”
모퉁이를 돌자 칸나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칸나는 너른 잔디밭을 샅샅이 살폈다.
다행히 그녀의 걱정처럼 바닥에 부상당한 레베카가 쓰러져 있진 않았다.
칸나는 서둘러 율리안의 어깨에서 내려왔다.
잔디밭이 핏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율리안은 구석에 떨어져 있는 줄사다리를 주워들고서 위를 올려다봤다.
서재의 발코니가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곳엔 레베카도 제플린도 보이지 않았다.
칸나가 걱정스런 눈으로 아무도 보이지 않는 발코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떡합니까. 제플린 그 자식이 레베카 님을 저택 안으로 끌고 들어간 거라면…….”
“그럴 리는 없어.”
율리안이 단호히 말했다. 한껏 찡그린 그는 흔들림 없이 눈으로 발코니를 올려다봤다.
칸나가 의아하게 그를 쳐다봤다.
“레베카가 그리 쉽게 당할 리 없잖아. 레베카는 분명히 저곳에 있어. 오히려 곤란한 건 데본셔 백작이겠지. 그는 기억을 잃은 상태였으니 레베카가 혼이라도 내고 있지 않을까?”
한 치의 의심조차 없는 그의 단단한 표정 위로 미소가 희미하게 번졌다.
칸나는 묘한 얼굴로 율리안의 레베카를 향한 믿음을 확인했다.
율리안은 조금 뒤로 물러나 발코니를 향해 손바닥을 폈다. 거리를 가늠하는 것 같았다.
대충 거리를 계산한 그는 알맞은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이내 크게 소리쳤다.
“레베카! 뛰어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