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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87화 (87/232)

87.

칸나가 경악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경비가 몰려오면 어쩌려고 그리 큰 소리를 내십니까! 그 소리를 듣고 레베카 님을 누가 해할지도 모릅니다.”

“괜찮아. 어차피 경비는 당신이 다 때려눕힐 거 아니었나? 게다가 지금 이 방법 말고는 없지 않나. 자, 곧 레베카가 뛰어내릴 테니 멀찍이 떨어져 있어.”

도저히 안심할 수 없었지만 율리안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칸나는 그의 말에 따라 몇 발자국 물러섰다.

“레베카다!”

붙박인 듯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율리안이 환호 섞인 외침을 내뱉었다.

정말로 레베카가 난간 위에 올라섰다. 그녀의 뒷모습이 바람에 따라 위태롭게 흔들렸다.

곧이어 몸을 돌린 레베카는 기꺼이 율리안을 향해 뛰어내렸다.

“율리안!”

율리안의 동공이 커졌다.

급박한 상황에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우스웠지만, 보름달 사이로 하락하는 레베카는 마치 땅으로 강림하는 천사 같았다.

그녀는 저를 시궁창에서 건져내 줄 악마 같은 천사였다.

“윽…….”

레베카를 받아든 율리안이 뒤로 넘어졌다. 다행히 부드러운 잔디가 두 사람을 보호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율리안의 손이 레베카의 머리를 안전하게 받치고 있었다.

율리안은 고개를 들어 레베카의 얼굴을 확인했다.

“괜찮아?”

그의 품에 엎어진 레베카가 고개를 살며시 들더니 웃음을 흘렸다.

“정말 무모하기 짝이 없어. 하지만 그 때문에 산 것도 사실이야. 고마워. 율리안.”

칸나는 말없이 레베카의 환한 미소를 응시했다.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 수만의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결코 칸나는 자신의 감정을 얼굴 위에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을 숨길수록 레베카가 더 환히 웃었다. 칸나는 그걸로 족했다.

율리안이 몸을 일으키며 칸나를 슬쩍 바라봤다.

“감사는 내가 아니라 저 아이에게 해야 할 거야. 칸나라고 했나. 저 아이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당신도 나도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야. 나도 고맙다 말해야겠군. 고맙다.”

율리안이 칸나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칸나가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레베카는 벌떡 일어서서 칸나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쓸었다.

“고마워. 칸나. 넌 언제나 나를 구해주는구나.”

칸나는 부스스한 레베카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정리했다.

칸나의 눈 위로 잠시 애틋한 기운이 떠올랐지만 곧 사라졌다.

그녀가 진지하게 말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서둘러 나가셔야 합니다.”

“좋아. 달려드는 잔챙이들 정도는 처리해 줄 수 있겠지?”

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안은 양손으로 레베카를 안아 들었다.

“함부로 환자 취급해서 미안하지만, 지금 당신의 뜀박질 속도로는 조금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레베카는 질책 대신 입꼬리를 올리며 율리안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얼른 돌아가자.”

레베카의 말에 율리안은 고개를 들었다.

칸나가 먼저 빠르게 뛰자 율리안이 그녀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 * *

“침입자들을 잡지 못했습니다. 주도면밀하게 움직인 모양이더군요.”

“그 잔인무도한 자들이 내 서재까지 쳐들어 왔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어. 그리고 빛의 전당의 일은 또 뭐고.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제플린은 이불을 둘둘 싸맨 채 연신 몸을 떨었다. 그리고 무서워 죽겠다는 듯 옥타비오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이 한심스럽기 짝이 없어 옥타비오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입매를 비틀며 그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

“제 불찰입니다. 모든 사냥개를 동원해 그자들을 잡겠습니다. 그리고 빛의 전당의 일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의 기사단이 올 텐데 나더러 걱정을 하지 말라니!”

“빛의 장미께 연통을 넣어두겠습니다. 그분이 수를 써주실 겁니다.”

옥타비오가 향초에 불을 켰다.

불꽃이 서서히 타오르자 불안한 듯 떨던 제플린의 눈매가 일순 날카로워졌다.

“오늘 많은 일이 있었으니 잠시나마 푹 쉬십시오. 제가 다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옥타비오는 제플린을 침대에 눕게 한 뒤 그의 몸을 둘둘 감싸고 있던 이불을 걷었다.

그리고 주름진 얇은 이불을 똑바로 펴서 제플린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마치 자식의 잠자리를 준비하는 자상한 아비 같은 모습이었다.

방금까지도 패악을 부리던 제플린은 고분고분 옥타비오의 손길을 따랐다.

옥타비오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모두가 기억을 잃은 제플린이 상냥하게 변했다고들 생각했겠지만 실상은 달랐다.

갓 의식을 차린 제플린은 극도로 불안한 상태였다.

그의 귀에 옥타비오가 속삭였다.

‘가여우신 분……. 제 말만 들으십시오. 당신이 할 일은 그뿐입니다. 그럼 예전처럼 당신이 원하는 걸 모두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옥타비오는 어린아이를 가르치듯 제플린에게 데본셔 백작의 일을 차근차근히 알려주었다.

백지 같은 제플린의 세상에 옥타비오는 길을 그려 넣었다.

제플린은 매달리다시피 그에게 의지했다.

제플린은 빙그레 미소를 짓다가도 옥타비오와 단둘이 있게 되면 본래의 고약한 성질을 부리곤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좋은 징조였다.

그만큼 자신을 믿고 따른다는 반증이었으니까.

게다가 제플린은 성을 내다가도 결국 옥타비오의 말을 들었다.

제플린은 그의 지시에 따라 서류에 사인을 하고 사람들을 처벌했다.

옥타비오는 이런 제플린의 상태가 참으로 만족스러웠다.

어차피 여태껏 백작가를 유지해 온 건 자신이었다.

제플린은 형식상의 데본셔 백작으로 남아주면 족했다.

그리고 훗날 알리시아가 낳은 아이도 제플린과 똑같은 전철을 밟게 할 생각이었다.

제가 알리시아의 약점을 쥐고 있는 이상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하루빨리 알리시아를 제플린의 새로운 레베카로 만들어야 했다.

진짜 레베카는 통제하기 힘들었으나 알리시아는 쉬웠다.

적절한 먹이만 던져주면 알리시아는 그가 만든 판에 따라 착실하게 움직였다.

옥타비오는 멍하니 천장을 향해 눈을 깜빡이는 제플린을 내려다보다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알리시아 마님께 들어오시라 전할까요?”

제플린은 옥타비오의 섬뜩한 웃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혼자 있고 싶군.”

“그러시다면야.”

“옥타비오.”

“예. 말씀하십시오.”

“알리시아가 정말 내 기억 속 연인이 맞는가?”

제플린의 말에 옥타비오의 입술에서 일순 미소가 사라졌다.

곧 그의 시선이 은은하게 타오르는 향초를 향했다. 방 안에는 벌써 자욱하게 향기가 가득히 차고 있었다.

옥타비오는 말간 제플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빙그레 웃었다.

“글쎄요. 백작님의 기억 속 연인이 누군지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머릿속에 들어가 본 게 아니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백작님, 지금 당신 곁에서 당신을 성심성의껏 보살피는 금발의 푸른 눈의 여인은 알리시아 마님밖에 없습니다. 백작님의 아이를 품고 있는 여인도 그녀밖에 없고요.”

모호한 대답이었다.

옥타비오는 한 번도 알리시아가 제플린이 찾아 헤매는 그 여인이라 단언한 적이 없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여나 제플린의 기억이 돌아왔을 때 빠져나갈 구멍을 남겨두는 것이었다.

제플린이 저를 속였다고 화를 내도 상관없었다.

다 저를 위한 일이었다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알리시아가 눈물을 곁들어주면 더할 나위 없었고.

어차피 제플린은 자신을 버릴 수 없다고 옥타비오는 자신했다.

제플린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래. 알겠으니 이만 나가도록.”

“그럼 편히 쉬십시오.”

달칵하고 문고리에 걸쇠가 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의 기사단이 당도할 때까지 그는 이 방안에 갇혀 있어야 했다.

문이 닫히자마자 제플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서둘러 향초를 끄고 창문을 열어 방 안의 공기를 환기했다.

“나를…… 속이고 있었군.”

레베카의 얼굴을 본 순간 그의 모든 기억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동안 옥타비오와 알리시아가 자신을 가지고 논 사실도 명확해졌다.

“하지만 대체 왜.”

제플린은 침대에 끄트머리에 털썩 앉았다.

알리시아야 백작 부인의 자리를 줄곧 탐내 왔으니 놀랍지도 않았다.

하지만 옥타비오는 달랐다.

제플린은 옥타비오에게 모든 것을 다 주었다.

그는 제플린의 인생에서 이정표 같은 자였다.

혀를 내두를 만한 그의 지략에 존경심을 가졌던 때도 있었다.

옥타비오도 자신과 다를 바 없이 자신을 아끼고 있다 생각해왔다.

제플린은 향초의 윗면을 조금 깎아내어 봉투 안에 넣었다. 그리고 불을 붙인 향초를 발코니에 뒀다.

향초가 밤새 타올랐다는 걸 옥타비오가 확인하게끔 해야 했다.

옥타비오가 자신을 속인 이유를 알아내기 전까진 평소와 다름없이 지낼 생각이었다.

그가 나를 속인 게 선의였을까, 아니면 악의였을까.

부디 전자이길 바라며 제플린은 손에 얼굴을 묻었다.

고독이 적막한 방 안에 짙게 깔렸다.

요즘처럼 외로웠던 적이 없었다.

기억을 되찾기 전에는 꿈속의 연인에 관한 진실을 알 수 없어 외로웠다.

하지만 기억을 되찾은 지금, 그 연인이 제 곁에 없다는 사실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문득 레베카를 안고 달려가던 갈색 머리의 남자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 남자를 올려다보던 레베카의 다정한 눈빛까지.

그녀가 자신 말고도 다른 이에게 그런 눈빛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미친 듯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제플린은 침대에 털썩 누워 눈을 굴렸다.

‘율리안인가…….’

머리 색 따위야 얼마든지 변장할 수 있는 노릇이었다.

알리시아는 눈동자 색까지 바꾸지 않았는가.

게다가 그만한 덩치를 가진 남자는 제국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제플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차분히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불꽃이 튀듯 갑자기 찾아온 기억은 언제 사라졌냐는 듯 온전한 형태로 그에게 많은 것을 일러주었다.

그가 기억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레베카의 소재를 파악한 건 요하네스 공작령이었다.

레베카의 곁을 맴돌던 검은 고양이도 요하네스 공작의 것과 똑같았다.

그래서 율리안이 레베카를 납치해 간 것이라 믿었다.

그녀를 간악한 율리안의 손아귀에서 구해오기만 한다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본 레베카는…….

‘그래. 네가 아끼는 걸 모두 짓밟고 깨부순 다음에 불태워 버릴 거야. 그리고 그 불구덩이 안에 네 하찮은 몸뚱이도 던져 버릴 거야.’

‘네게 지옥을 선사해 줄게.’

그가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사랑스런 레베카가 분기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쏘아봤다.

그는 순간 레베카가 정말로 자신을 무너뜨릴 거라 믿을 뻔했다.

하지만 제플린은 곧 코웃음을 쳤다.

‘그럴 리가 없지.’

분명 율리안에게 세뇌를 당한 게 틀림없다.

레베카를 어딘가에 가둬놓고 그녀가 자신의 말을 들을 때까지 학대라도 하는 게 분명했다.

율리안 정도의 세력가라면 그 정도의 세뇌야 눈 감고도 쉽게 할 터였다.

‘아, 가엾은 나의 레베카.’

심신이 미약한 레베카가 그걸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율리안의 간계에 넘어가 자신을 일생 최대의 원수 보듯 했던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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