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제플린이 눈을 떴다.
확실했다. 자신을 향한 레베카의 사랑은 맹목적이었다.
그녀는 제 남편이 괴로울까 봐 스스로 버려 달라고 청하기까지 한 여인이었다.
그러니 율리안이 레베카를 손에 쥐고 있을지언정 그는 그녀의 사랑을 절대로 얻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나, 제플린 데본셔를 레베카의 철천지원수라 세뇌했던 거겠지.
나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그만큼 깊은 것이었을 테니까.
제플린의 눈매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끔찍한 감옥 같은 곳에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요새 같은 공작 성 가장 높은 탑에 갇혀 있는 레베카가 그려졌다.
제플린의 가슴이 요동쳤다.
“되찾아…… 와야지.”
제플린은 율리안을 무찌르고 레베카를 구해내는 상상을 했다.
레베카가 감격어린 눈물을 글썽이며 뜨겁게 그를 껴안을 모습을 떠올렸다.
“아…… 레베카.”
제플린은 뺨을 감싸 안았다.
레베카가 매섭게 후려치던 손길이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었다.
제 볼이 퉁퉁 부어올랐는데도 어쩐지 싫지 않았다.
죽은 인형 같았던 그녀가 생기 넘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은근히 흥분되었다.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던 레베카의 모습에는 신나게 눈사람을 만들던, 그 옛날 자신이 첫눈에 반했던 레베카가 깃들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약혼녀라던 여자가 레베카와 닮아 있었다.
그 몸매하며 눈동자색 하며 알아보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였다.
제플린은 주먹을 부들거릴 정도로 세게 그러쥐었다.
“약혼녀 노릇까지 시키다니 더러운 자식…….”
하지만 그는 곧 손을 풀었다.
그녀가 돌아왔다. 그가 사랑해 마지않던 원래의 완벽한 모습으로.
그래, 그거면 됐다.
레베카가 지금 그의 곁에 없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제플린 데본셔의 것일 운명이었다.
처음 본 그 순간부터 깨달았다.
그러니 그녀가 있어야 하는 자리로 데려오면 그만이었다.
지금이야 율리안의 세뇌 아래 자신을 싫어할지는 몰라도 언젠가 레베카는 깨닫겠지.
레베카 데본셔였을 때야말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는 사실을.
제플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눈에 전에 없던 이채가 돌았다. 이제 더 이상 무기력하게 있을 이유가 없었다.
레베카가 다시 제플린의 인생에 등장했다.
잠시 멈춰 있던 그가 꿈꾸던 왕국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오벨리아의 저택으로 올라가는 언덕의 초입에서 율리안은 마차를 세우게 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도록 하지.”
“갑자기?”
레베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율리안을 바라봤다.
율리안은 대답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의 몸짓의 의미를 알아차린 레베카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나도 같이 걸어가자고?”
율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헛기침을 했다.
그의 기침 소리에 크로아가 얼른 레베카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시는 게 좋겠습니다. 오다 보니 오늘 밤하늘이 참 아름답더군요. 큰일이 있었으니 마음을 가라앉힐 겸 짧게 산책하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가요…….”
레베카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가 곧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보니 밤 산책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크로아의 말대로 오늘은 달이 무척 예뻤다.
“그럼, 칸나와 크로아도…….”
“아니. 우리 둘만 가자. 단둘이.”
“단둘이?”
레베카가 놀란 눈을 뜨며 크로아와 칸나를 번갈아 보았다.
크로아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고, 웬일인지 칸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가자. 레베카.”
율리안이 마차의 문을 열었다. 쾌청한 밤바람이 불어왔다.
“날이 춥습니다. 이걸 걸치고 가세요. 저는 먼저 가 있겠습니다.”
칸나가 두툼한 숄을 레베카의 어깨 위에 올려주었다.
레베카는 숄을 여미며 칸나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평소와 어딘가 달라 보였다.
그 사이 율리안이 먼저 마차에서 내려 레베카에게 손을 뻗었다.
레베카는 멍하니 칸나를 바라보다 이내 율리안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알겠어. 칸나, 그럼 조금 이따가 집에서 만나자. 크로아,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아닙니다. 얼른 가십시오. 공작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대요.”
“크로아!”
율리안이 질색하며 크로아의 이름을 불렀다.
크로아는 제 입을 막는 척하며 얼른 두 사람을 내몰았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요. 그럼 빨리 쉬고 싶으니 이 하인들을 위해서라도 얼른 사라져 주십시오.”
그는 축객령을 내리듯 빠르게 마차의 문을 닫았다.
마차 문 너머로 율리안이 꿍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크로아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레베카와 율리안의 발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크로아의 시선이 줄곧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칸나를 향했다.
“오늘은 어째서 순순히 허락해 준 거지?”
칸나가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허락이라니요. 레베카 님은 누구의 허락도 없이 가고 싶은 곳을 가실 수 있습니다. 제가 뭐라고 그분의 앞길을 막겠습니까.”
“그런 말이 아니잖아. 평소와 다르니까 하는 말 아니겠나. 공작님만 보면 으르렁거리던 그 무례한 태도도 고친 것 같고. 무슨 일이 있었나?”
“별일은요. 단지 깨달았을 뿐입니다.”
칸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창문으로 보이는 레베카와 율리안의 뒷모습을 시리게 바라보았다.
푸르른 언덕과 별이 쏟아지는 듯한 밤하늘. 그 아래에 선 눈부신 한 쌍의 남녀.
마치 그림과 같은 광경에 칸나는 마음을 빼앗겼다.
“뭘 깨달았다는 거지?”
“공작님은…… 제가 죽었다 깨어나도 레베카 님께 드릴 수 없는 걸 줄 수 있다는 걸요.”
“네가 줄 수 없는 거라니.”
“웃음…….”
크로아가 멍하니 칸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체 저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완전한 행복…….”
침묵이 흘렀다.
자욱하게 울려 퍼지는 구슬픈 풀벌레 소리가 크로아와 칸나 사이에 벌어진 이해의 간극을 메웠다.
“그거 아십니까. 레베카 님은 공작님과 있을 때 항상 웃고 계십니다. 저는 레베카 님을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을지언정 그렇게 환히 웃을 수 있게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 아, 이제 안전하게 지켜드리는 것도 공작님이 더 잘하시려나…….”
“하지만 레베카 님은 널 소중히 여기시잖아. 너와 있을 때도 행복해 보이셨어.”
칸나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부족합니다. 그분은 단지 그 정도의 행복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될 분이십니다.”
“그게 무슨…….”
“레베카 님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행복을 가져야 마땅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건 당신의 주인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크로아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질문이 떠올랐으나 그는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입을 꾹 다물고 창밖을 바라보는 칸나의 얼굴이 무척이나 슬프고 또 한편으로는 만족스러워 보였다.
크로아도 말없이 칸나를 따라 멀어져가는 율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제 허리춤에도 미치지 않던 소년이 어느새 단단한 고목처럼 불쑥 커져 있었다.
그리고 고독하게 홀로 서 있는 황무지의 나무인 줄 알았던 그 아이는 지금 제 발치에 스스로 꽃을 피우려고 하고 있었다.
크로아의 입가에 아득한 미소가 번졌다.
어쩐지 칸나의 뜻 모를 말이 조금 이해가 가는 것 같았다.
* * *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레베카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레베카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환한 달무리가 탁 트인 언덕 위를 내리쬐고 있었다. 그리고 잔물결 같은 은하수가 어두운 밤하늘에 빼곡히 수놓아 있었다.
“예쁘다!”
잇새 사이로 탄사가 흘러나왔다. 율리안의 말대로 잠시 걷는 걸 택하길 잘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제플린을 만난 뒤로 더러운 기분이 가시지 않았던 참이었다.
‘당신…… 살이 쪘군.’
여전히 그는 자신을 인형 그 이상도 그 이하로도 보고 있지 않았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대체 자신은 뭘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애초에 그에겐 기대할 게 없었는데.
레베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레베카를 살피고 있던 율리안이 불쑥 제 얼굴을 그녀 앞에 들이밀었다.
시원하게 뻗은 눈매가 레베카를 향해 접혀 들었다.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가 꼭 별 같다고 레베카는 순간 생각했다.
“또 무슨 끔찍한 생각을 떠올리려나 본데. 그럴 때마다 내 얼굴을 보는 게 정신 건강에 좋아.”
“계속 칭찬해줬더니 자만심이 아주 하늘을 뚫을 기세인걸?”
“당신이 그랬잖아. 보기 좋다고. 나 잘생겼다고 그랬잖아. 원래 아름다운 걸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법이거든. 인생에 추악한 것만 남았다는 생각이 들 때 고개를 들어 나를 봐.”
실없는 농담이었다.
그런데도 레베카는 어느새 율리안의 얼굴을 훑어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보기 좋게 솟은 이마와 날렵한 콧대. 그리고 짓궂게 자신을 바라보는 금색 눈동자.
그 찬란한 빛이 레베카의 시선을 오랜 시간 잡아두었다.
“…….”
그의 요청대로 레베카가 지그시 그를 응시하자 오히려 먼저 물러난 건 율리안 쪽이었다.
율리안의 광대뼈 언저리가 금방 붉게 물들었다.
그 색이 예뻐서 레베카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질 뻔했다.
“이, 이제 그만 보도록.”
율리안은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며 레베카에게 숙였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율리안이 황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아무래도 신장 차이가 크게 나는데 그가 고개까지 쳐드니 레베카는 율리안의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달아오른 귓불을 미뤄보아 그가 당황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레베카가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 보라고 했잖아.”
“보라고 했지만 그렇게 오래 보라고는 하지 않았어.”
“닳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
“닳아. 당신이 내 얼굴을 볼 때마다 조금씩 닳는다고. 그러니까 앞으로 몇 초 정도만 바라봤으면 좋겠군.”
레베카의 입가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왜? 날 보면 너무 좋아서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래?”
“뭐……?”
제 얼빠진 표정을 숨기려 레베카에게서 등을 돌린 채 앞서가던 율리안이 그녀의 말에 멈칫했다.
그의 넓은 등짝 위로 열기로 확하고 치솟는 게 느껴졌다.
그가 얼굴을 조금 돌리고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야 당신이…….”
날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봐주니까. 자꾸만 날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줄 것처럼 구니까.
하지만 레베카는 속에서 맴도는 말을 차마 내뱉지 못했다.
어느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율리안의 얼굴에 어떠한 기대감이 떠오르는 게 보였다.
레베카는 무심코 떠오르는 말을 뱉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든지 미래의 그를 상처 입힐 게 확실했다.
레베카가 곧 쓰게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야. 당신이 날 이성으로 좋아할 리가 없잖아. 전우애라고 하면 또 모를까.”
율리안의 가슴에서 한껏 부풀어 오른 기대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