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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89화 (89/232)

89.

“전우애.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군.”

율리안이 생각에 잠긴 탓에 둘은 잠시 침묵을 지키며 언덕을 올랐다.

풀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묘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매일같이 듣는 소리였는데도 오늘 밤 듣는 들판의 노래는 어딘가 느낌이 달랐다.

지금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율리안 때문일까.

레베카는 말이 없어진 그가 계속 신경이 쓰였다.

그는 손을 자꾸만 쥐었다가 폈다 했다. 그때마다 힘줄이 불쑥 솟았다가 사라졌다.

잔뜩 구겨진 미간마저 어이없을 정도로 예뻤다.

레베카는 오늘 발코니에서 뛰어내렸던 순간을 상기했다.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는데 율리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곳을 탈출할 수 있겠다는, 알 수 없는 확신이 생겨났다.

그리고 아래에서 손을 뻗고 있는 그의 탄탄한 팔과 듬직한 어깨를 보자 모든 불신이 사라졌다.

망설임 틈도 없이 발이 먼저 나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불에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어리석고 무모한 짓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레베카를 살렸다.

마법 같은 일이었다.

율리안의 딱딱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을 때 밀려들었던 안도감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세찬 심장 소리가 지금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마법사…….’

어릴 적 즐겨보던 동화에 등장하는 용사의 곁에는 항상 마법사가 있었다.

마법사는 쓰러진 용사를 일으켜 세우고 함정에 빠진 용사를 구해냈다.

마법사가 없었더라면 용사가 용을 무찌를 수도, 탑에 갇힌 공주를 구해낼 수도 없었을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그의 주위로 빛무리가 떠오르는 게 보였다.

아름다운 빛의 향연이 순식간에 율리안의 주위를 감쌌다.

레베카는 눈을 비볐다.

설마 진짜 그가 마법을 부린 걸까?

“반딧불이군. 이맘때쯤 여기 근방에 나온다던데 딱 맞춰 찾아온 모양이야.”

레베카가 눈에서 손을 뗐다.

손바닥에 점멸하는 반딧불이를 올려놓은 채 잔잔히 미소 짓는 율리안이 보였다.

“그래. 지금이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어.”

영문 모를 율리안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던 레베카는 다음으로 이어지는 그의 행동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율리안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품 안으로 손을 넣더니 작은 상자를 꺼내 들었다.

율리안은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의 물건을 확인한 레베카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물방울 모양으로 세공된 다이아몬드 반지가 반딧불이 사이에서도 자태를 잃지 않고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레베카 오벨리아. 내 아내가 되어주겠어?”

현실감이 없어 레베카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비단 천에 진주 가루를 흩뿌린 듯한 아름다운 밤하늘과 둘을 축복하듯 그들 사이를 넘나드는 반딧불이들.

그리고 한껏 긴장된 율리안의 숨소리가 들려오는 고요한 들판.

꿈만 같은 광경이었다.

이 순간이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자 심장이 뛰어왔다.

단 한 가지만 빼면 두고두고 꺼내어볼 만큼 낭만적인 청혼이었다.

기뻐하던 레베카는 곧 눈에서 설렘을 지웠다.

‘하지만 이건 가짜야.’

설렘으로 벅차오르던 가슴이 순식간에 식었다.

레베카는 율리안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그리고 잔잔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고마워. 율리안. 그럴게. 당신의 아내가 될게.”

생각보다 담담한 레베카의 태도에 율리안은 멋쩍은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뭐해. 신부의 손에 반지를 끼워줘야지.”

레베카가 낭창한 손가락을 뻗었다.

율리안은 반지를 들어 그녀의 왼쪽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레베카는 반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커다란 다이아몬드는 처음 봐.”

“그게 크면 클수록 좋다고 누군가 그러더군. 마음에 들어?”

“응. 마음에 들어.”

레베카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팔을 활짝 폈다.

“보통은 청혼 이후에 뜨거운 사랑의 키스를 나누지만.”

무릎을 펴던 율리안이 레베카의 말에 주춤거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 또다시 어떤 기대감이 차올랐다. 레베카가 자그맣게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친구니까 우정의 포옹을 나누도록 하자.”

그러고는 율리안을 와락 껴안았다.

지금 레베카가 할 수는 최선의 표현은 이것뿐이었다.

“너는 정말 착해. 계약 결혼일 뿐인데도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다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었다. 단순한 호의나 선의로 한 게 아니었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율리안은 뒤이어 떠오른 의문에 말을 삼켰다.

호의와 선의가 아니라면 대체 뭐지?

내가 왜 몇 주 동안 반지를 고심해서 고르고 장소를 물색했던 거지?

레베카의 웃음이 보고 싶었다는 이유만으로는 불충분했다.

“고마워. 율리안. 정말 기뻐.”

하지만 진심으로 기뻐하는 레베카를 보니 그런 이유 따위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지금 제 품에 안긴 따듯한 사람이 행복해하면 그만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성공적이었다.

율리안은 레베카를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레베카는 고개를 쳐들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기서 더 말을 하면 울고 있다는 사실을 들킬 게 분명했다.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는 자신을 자꾸만 울렸다.

솔직하고 싶게 만들었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솔직할 수 없는 현실이 레베카를 울게 했다.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신 그를 만나지 않을 거라 다짐할 만큼 괴로운 감정이 그녀를 잠식했다.

레베카의 입술이 처참하게 떨려왔다.

하지만 이 기나긴 포옹이 끝나고 그와 얼굴을 마주했을 때는 웃고 있어야 했다.

그가 아프지 않도록 웃어야 했다.

“이제 그만 들어갈까.”

한층 차분해진 말투로 레베카가 말했다.

율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레베카를 놓아주었다.

그를 가득 채우던 따뜻한 온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그 순간이 아쉬워 율리안은 가슴께를 가만히 쓸었다.

때문에 그는 레베카가 빠르게 눈물 자국을 닦아내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언니!”

오벨리아가의 환한 불빛이 가까워지자 저 멀리서 리비아가 쏜살같이 뛰어왔다.

“공작님!”

헤레나도 그 뒤를 따랐다. 잠옷 차림의 두 소녀가 들판을 맨발로 내달렸다.

다나에가 이 장면을 봤다면 분명히 뒷덜미를 잡았을 것이었다.

“아직도 안 자고 뭐 했어.”

질책하는 것 같은 말투였지만 동생들을 보는 레베카의 눈에는 애정이 담뿍 담겨 있었다.

“언니가 걱정돼서 잠을 잘 수 있어야지.”

리비아가 헤실거리며 웃었다.

“어라! 언니 손가락에…….”

헤레나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레베카의 왼쪽 손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봤다.

리비아가 율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공작님, 성공하셨네요! 우와, 헤레나! 다이아몬드 좀 봐봐.”

리비아의 말에 레베카가 율리안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다이아몬드가 크면 클수록 좋다고 조언했던 건 두 동생이었나 보다.

“자매니까 당신을 좀 더 잘 알까 싶어서…….”

율리안이 멋쩍게 제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레베카의 다음 말은 폴짝폴짝 뛰는 헤레나의 말에 가로막혔다.

“그럼 언니, 결혼하는 거야?”

“그런 거야?”

리비아도 설레는 눈을 반짝이며 레베카를 올려다봤다.

레베카는 잠시 율리안을 눈빛을 주고받았다.

율리안의 눈이 접혔다. 그녀가 좋아하는 얼굴이었다.

레베카는 무릎을 살짝 굽혀 리비아와 헤레나의 눈높이에 맞춰 말했다.

“맞아. 결혼할 거야. 그렇다면 그때 들러리를 부탁해도 될까?”

헤레나와 리비아가 서로를 쳐다봤다.

곧이어 선잠에 빠진 다나에를 깨울 만큼의 커다란 환호성이 자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레베카가 어떤 웨딩드레스를 입어야 하는지, 또 자신들은 어떤 드레스를 입어야 하는지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레베카는 열정에 찬 동생들을 뒤로하고 율리안에게 다가왔다.

“바람이 차. 이제 집에 돌아가야지.”

율리안은 순간 레베카가 말하는 집이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오벨리아 저택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건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겠지.

율리안은 씁쓸하게 웃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래. 이만 갈게. 부디 좋은 꿈 꾸길.”

* * *

결혼식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율리안이 그동안 알게 모르게 결혼식을 준비해 왔기에 준비 기간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제 중요한 건 성대한 결혼식을 올릴 장소였다.

지금 율리안과 향하는 곳이 바로 레베카가 오랫동안 생각해두었던 완벽한 예식장이었다.

“초조해?”

연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레베카를 보고 율리안이 물었다.

오늘 아침부터 드디어 라본느 살롱을 보러 간다고 한껏 들떠 있던 레베카는 살롱이 가까워지자 눈에 띄게 침울해졌다.

“걱정하지 마. 어머님이 훌륭하게 마무리 지으셨을 거야.”

율리안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아마 레베카의 초조한 기색이 사업에 대한 걱정이라 생각하는 듯 싶었다.

레베카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허둥지둥 율리안이 공들여 작성한 결혼식 리스트를 집어 들었다.

“그래. 어머니가 잘해주셨겠지…….”

애써 웃어 보이던 레베카의 손에 종이가 팔랑거리며 넘어갔다.

율리안은 무심한 척하면서도 빠르게 넘어가는 종이를 힐끔거렸다.

“당신, 아예 결혼식 매니저로 적성을 전향해도 되겠는걸?”

대강 서류를 다 훑은 레베카가 감탄했다.

살짝 긴장했었는지 레베카의 칭찬에 율리안이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난 원래 못하는 게 없지.”

율리안은 내심 뿌듯한 표정으로 레베카의 반응을 살폈다.

그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결혼식 식순부터 악단에, 그리고 자잘한 장식품들까지 빠진 것 하나 없이 꼼꼼하게 계획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번 건은 크로아의 도움 없이 율리안이 직접 발품을 팔아 준비했다고 들었다.

율리안의 의외로 섬세한 면모에 레베카는 조금 놀라는 중이었다.

“내 결혼식은 내가 직접 준비해야지, 안 그래?”

“내가 정말 남편감 하나는 잘 고른 것 같네. 아무래도 결혼식 준비할 생각에 골머리를 앓았는데. 언제 이렇게 몰래 준비한 거야?”

“그때 그랬잖아. 나와 최대한 빨리 결혼하고 싶다고. 바쁜 당신 대신 남는 게 시간과 돈인 내가 준비하는 게 효율적이겠지.”

율리안은 시원한 라즈베리 차를 홀짝이며 덧붙였다.

“뭐, 사실 준비하는 게 즐겁기도 했고…….”

“응?”

“아, 혼잣말이었어. 신경 쓰지 마.”

레베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율리안을 바라보자 그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결혼식만큼 치장에 신경을 써야 하는 행사도 없을 터였다.

평소 꾸미는 것에 진심이었던 율리안에게 결혼식 준비는 놀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레베카가 입을 웨딩드레스를 고안하는 것도 큰 기쁨 중 하나였다.

율리안은 조만간 산드라를 만나 자신이 디자인한 드레스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마음에 들어. 제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장식이야. 그런데도 과하지 않고 세련됐어.”

레베카는 결혼식장의 도안 스케치를 손으로 짚어가며 말했다.

“당신이 이렇게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걸 보니 진심인가 보군.”

율리안은 눈을 반짝거리는 레베카를 보고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만족하는 걸 보니 즐거움이 샘솟았다. 지난 몇 달간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러지 말고 거기 악단 목록도 좀 봐봐. 섭외하느라 애를 좀 먹었거든.”

어느새 율리안은 레베카의 옆에 바싹 붙어 결혼식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꼭 종이공예를 만들고 엄마에게 자랑하는 아이 같아서 레베카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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