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도착했습니다.”
그때 하인의 정중한 음성과 함께 마차 문이 열렸다.
레베카는 율리안과 눈빛을 한 번 주고받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세상에…….”
레베카가 입을 떡하고 벌렸다.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근사하군.”
율리안도 흡족하게 미소를 지으며 거대한 건축물을 스윽 훑어봤다.
옛 신전을 연상시키는 웅장한 살롱 건물은 눈처럼 새하얗게 빛났다.
그리고 군데군데를 장식하고 있는 고풍스러운 대리석 기둥과 조각상이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했다.
요하네스 공작령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외관이었다.
입구로 이어진 흰색 계단 위에는 붉은 융단의 카펫이 이곳을 방문하는 손님을 맞았다.
그 위에 발을 올려놓기만 해도 특별 취급을 받는 느낌이 들었다.
레베카는 고개를 들어 돌에 새겨진 간판을 살펴보았다.
<라본느 살롱>
레베카는 잠시 가슴이 벅차올라 먹먹해진 얼굴로 간판을 올려다봤다.
이전 생에서 그녀가 일했던 마가렛의 라본느 살롱은 자그마한 베이커리를 개조한 곳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리베르타 사람들과 마가렛의 노고에 힘입어 라본느 살롱은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레베카가 죽었을 때 즈음 라본느 살롱은 평민 전용 살롱임에도 불구하고 이렌시아에서 손꼽히는 살롱이 되었다.
이전 생에서 살롱 직원들과 동고동락하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힘들었지만 그만큼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레베카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들어가는 걸 보고 율리안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무슨 일 있어?”
걱정 어린 손길에 레베카는 얼굴을 들어 율리안을 바라봤다.
날카로운 눈매 속에 다정한 기운이 서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레베카는 율리안의 팔에 다정히 팔짱을 꼈다.
어찌 됐건 오늘은 결혼을 앞둔 사랑스런 커플로 이 자리에 온 것이었다.
레베카의 맨살이 닿자 율리안의 허리가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그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어서 오십시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대한 살롱 로비가 펼쳐졌다.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높다란 천장에 드리워져 있었고, 접수대나 작은 테이블까지 모두 금박으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직원들이 호화로운 로비의 양옆으로 길게 늘어서 레베카와 율리안을 향해 깍듯이 인사했다.
군더더기 없이 예의 바른 몸짓이었다.
레베카가 직원들의 얼굴을 세세히 보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리베르타의 사람들인지 꿈에도 몰랐을 것이었다.
“레베카, 그리고 공작님. 귀한 발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나에가 활짝 웃으며 둘을 맞았다.
레베카는 다나에의 볼에 가볍게 입맞춤했다.
“어머니, 정말 근사한 곳이에요. 잘 해내실 줄을 알았지만 이 정도일지는 상상도 못했어요.”
“이게 다 공작님 덕분이지 뭐니. 공작님 가문 소속의 연금술사들이 아니었다면 단기간에 이 정도 규모의 건물을 만들 수 없었을 거란다.”
다나에가 율리안에게 공을 돌리자 율리안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건축에 연금술을 조합할 수 있을지 궁금하던 참이었습니다. 어머님 덕분에 귀한 자료를 얻었습니다.”
다나에가 율리안에게 살롱 건축에 사용된 연금술을 설명하고 있는 사이, 레베카는 줄지어 대기하고 있는 직원들을 바라봤다.
모두 기합이 바싹 들어간 채로 곧게 서 있었지만 레베카를 흘깃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다들 입술을 앙다문 걸 보니 레베카에게 말을 걸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이었다.
레베카는 직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떠올렸다.
이전 생부터 그녀에게 알게 모르게 도움을 줬던 사람들이었다.
레베카가 두 팔을 벌렸다.
“편히 대하셔도 좋아요. 보고 싶었어요. 여러분!”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서로 눈치를 살피던 직원들이 에라, 모르겠다, 하고 레베카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레베카 님! 아프셨다던데, 걱정했습니다.”
“이렇게 건강하신 걸 보니 마음이 놓여요.”
“레베카 님 덕분에 이제 쫓겨날 걱정 없는 집을 얻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전보다 더 힘이 넘치시는 것 같아 보기 좋습니다.
“그 제플린 자식이랑 이혼한 것도 놀라운데 공작님과 결혼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아, 물론 비밀은 엄수하고 있으니 걱정 마십쇼.”
“근데 마가렛이 많이 무서워졌어요. 저번에 실수로 욕을 내뱉었다가…….”
많은 질문과 안부 인사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그렇지만 레베카는 지치지도 않고 한 명 한 명의 눈을 마주치며 성심성의껏 답변을 했다.
따뜻한 공기가 순식간에 살롱의 로비를 가득 메웠다.
훈훈한 광경을 지켜보던 율리안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대단하군.”
“예?”
다나에가 율리안에게 되물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레베카를 만나는 사람마다 그녀에게 빠져들지 않는 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처음엔 적대적인 사람도 결국엔 레베카에게 마음을 열게 되더군요.”
율리안의 말에 다나에는 그를 잠시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의 열망 어린 눈빛은 붙박인 듯 오로지 레베카를 향하고 있었다.
레베카에게 빠진 사람 중엔 그도 포함되는 게 분명했다.
혹여나 두 사람의 결혼이 계약 결혼이 아닐까 의심했던 자신이 우스워질 정도로 율리안은 레베카를 사랑스럽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다나에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레베카의 재능인가 봐요. 레베카는 어릴 때부터 어딜 가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거든요. 또래 아이들은 레베카와 놀 수 있다면 무엇이든 다 할 것처럼 제게 매달리곤 했지요. 레베카도 그런 걸 좋아했어요. 모험심이 강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걸 즐거워했죠.”
잠시 행복한 과거를 회상하던 다나에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런 아이가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고립되었으니…….”
율리안도 덩달아 미간을 찌푸렸다.
오벨리아 저택에서 보았던 레베카의 어린 시절 모습이 떠올랐다.
율리안은 그녀의 해맑은 미소를 되찾아 줘야겠다고 다시 한번 굳게 다짐했다.
“걱정 마십시오. 과거를 떠올리지 못할 만큼 레베카를 행복하게 만들겠습니다.”
다나에는 결연하게 입을 꾹 다무는 율리안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낭만적인 말은 테오도 한 적이 없었다.
다나에의 뺨이 기쁨으로 붉게 물들었다.
“대체 다들 뭐 하시는 겁니까!”
소란스러운 말소리를 잠재울 만큼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로비를 찢듯이 울려 퍼졌다.
마가렛이 화가 잔뜩 오른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녀는 냉기가 흘러넘치는 표정으로 레베카를 둘러싼 직원들에게 호통 쳤다.
“제가 언제 어디서나 경거망동하시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기는 시장통이 아닙니다. 귀족을 모셔야 하는 자리입니다. 까다로운 손님들은 단 한 순간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걸 모르십니까?”
“하지만 마가렛, 오랜만에 레베카 님을 보니…….”
마가렛은 대답 대신 변명한 자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녀의 험악한 눈초리에 직원들은 슬그머니 제자리로 돌아갔다.
레베카가 웃으며 마가렛을 말렸다.
“괜찮아요. 마가렛. 제가 격식 없이 대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니 너무 열 내지 말아요.”
“아닙니다. 제가 부족해서 제대로 못 가르친 탓입니다.”
마가렛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예전만큼의 적대감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레베카를 어려워하는 기색은 여전했다.
하긴, 악감정이 그렇게 쉽게 없어지는 게 더 이상했다.
아직도 마가렛은 자신의 얼굴을 보며 제플린을 떠올리는 것일까.
레베카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에요. 잘 해주셨어요. 다들 몸가짐부터 달라졌는 걸요. 개업할 때가 기대되네요.”
“굳이 칭찬해 주실 것 없습니다. 이건 제 사업이기도 하니까요.”
율리안은 마가렛의 딱딱한 음성에 충격에 휩싸였다.
그는 레베카를 차갑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눈을 깜빡였다.
크로아마저 레베카를 면전에서 대할 땐 금방 무장 해제된 얼굴이 되곤 했다.
방금 다나에도 그러지 않았는가. 레베카는 항상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었다고.
레베카를 향해 시선을 돌린 율리안은 또다시 충격에 빠졌다.
레베카가 긴장한 듯 마가렛의 앞에서 쭈뼛거리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쩔쩔매는 레베카는 처음 봤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그녀가 침울해 있던 이유가 바로 마가렛 때문인 것 같았다.
레베카를 미워할 수 있다니. 율리안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는 사르르 웃기만 해도 보는 사람을 웃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율리안은 수심에 잠긴 레베카를 보자 마가렛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는 단지 이를 앙다무는 걸로 분노를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이건 마가렛과 레베카 간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자신은 레베카가 말해 준 것을 제외하고는 그녀의 과거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보아 둘 사이에는 자신이 끼어들 수 없는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는 마음대로 끼어드는 건 주제 넘는 짓이라고 중얼거리며 입 안에서 맴도는 질문을 억눌렸다.
문득 율리안은 심장이 조여드는 것 같아 가슴을 부여잡았다.
레베카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실이 있다는 게 분하고 서글펐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마가렛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는데, 마가렛이 돌연 몸을 돌려 율리안을 바라봤다.
냉철한 시선이 이번에는 율리안을 향해 꽂혀 들었다.
율리안은 움찔하며 부릅뜨고 있던 눈꼬리를 내렸다.
“공작님께서 지난번에 요청하신 피로연에 사용할 디저트 샘플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 고맙네.”
지나치게 사무적인 마가렛의 태도에 율리안은 그녀의 생각을 읽어낼 수 없어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럼 메인 정원으로 가시죠.”
칸나가 직원 몇 명을 지목하자 그들이 마가렛의 뒤를 따랐다.
“난 잠깐 검토해야 할 일이 있으니 공작님과 다녀오려무나.”
다나에가 웃으면서 레베카와 율리안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레베카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인 뒤 율리안의 팔짱을 꼈다.
‘또…….’
율리안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는 레베카를 보니 절로 입꼬리가 들썩였다.
이제 자신이 예전보다 더 편해진 게 틀림없었다.
율리안은 잔뜩 긴장한 레베카의 손을 토닥였다.
레베카는 물끄러미 자신을 다독이는 그의 커다란 손을 바라보았다.
옅게 들려오는 토닥거리는 소리가 꼭 괜찮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순간 마가렛에 대한 고민이 사라지고 맞닿은 살갗에 집중이 되었다.
따뜻한 온기에 레베카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 * *
“이곳이 결혼식이 진행될 메인 정원입니다.”
몇백 명은 거뜬히 수용할 만한 넓은 정원이 펼쳐졌다. 늘어서 있는 푸르른 상록수가 보기 좋게 다듬어져 있었다.
수려한 분수대와 조각상이 곳곳에 있긴 했지만 그래도 어딘가 휑해 보였다.
조금 당황한 듯 인상을 찌푸리는 레베카를 보고 마가렛이 말을 덧붙였다.
“결혼식뿐만 아니라 야외 무도회 같은 큰 규모의 행사를 열 수 있도록 만든 장소입니다. 행사의 목적에 따라 그때마다 새롭게 꾸밀 수 있도록 했기에 평소에는 조금 황량합니다.”
마가렛의 말에 레베카는 납득을 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살롱의 목적에 걸맞은 정원이었다.
율리안을 흘깃 보니 그는 벌써 이 도화지 같은 정원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머릿속으로 열심히 상상하고 있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