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그럼 결혼식 준비는 언제부터 하는 거지?”
열띤 목소리로 율리안이 물었다.
“당장 오늘부터 시작하려 합니다. 일단 기존의 정원을 보여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래? 그러면 내가 고안한 도안이 있는데 한번 보겠나.”
“안 될 것 없지요.”
율리안이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몇 번을 접었다 폈는지 종이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레베카는 종이에 그려진 도안을 흘깃 쳐다봤다. 서류에 그려진 세세한 스케치를 한데 모아놓은 것이었다.
“이건…….”
찬찬히 도안을 살펴보던 마가렛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율리안이 소매를 걷어붙이고는 손가락으로 도안을 짚어 가며 설명했다.
“여기는 테이블 위에 올려 둘 꽃병의 디테일이 중요해.”
“그러네요. 정말 훌륭하십니다.”
마가렛도 어느새 진지한 태도로 율리안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었다.
중간중간 마가렛의 눈에 이채가 도는 걸 보니 율리안의 도안에 만족한 것 같았다.
마가렛의 반응에 레베카는 왠지 자신이 칭찬받은 것처럼 뿌듯해졌다.
레베카는 율리안의 영롱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는 정말 이 일이 즐거운 듯, 평소에는 잘 보지 못했던 미소를 연신 짓고 있었다.
‘흠…….’
레베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율리안의 저런 탁월한 재능을 썩히긴 아까웠다. 어차피 본인이 남는 게 시간이라 외치지 않았는가.
“율리안. 일해 볼래?”
“응?”
율리안은 종이에 박혀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보니까 공간을 꾸미는 데 재능이 있는 것 같아서. 마가렛, 어머니께 들었는데 살롱의 실내 디자인을 맡을 디자이너가 쉽게 구해지지 않아 애를 먹는다고 했었죠?”
“예, 맞습니다.”
마가렛이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레베카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그럼, 율리안이 디자이너가 되는 게 어때요?”
“나더러 그런 일을 하라고?”
“응.”
율리안이 당황해서 입을 살짝 벌렸다.
제 은밀한 취향을 들킨 것 같아 수치스러웠다.
몸을 치장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 따위는 남성의 취미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제국의 남성이라면 본디 무예를 단련하고 탄탄한 근육을 뽐내야 했다.
자그마한 책상에 붙어 아기자기한 그림을 그리는 건 두고두고 술자리에 오를 놀림거리였다.
그 때문에 고상한 취미를 가진 제플린 또한 뒤에서 욕을 먹고는 했다.
율리안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지는 걸 보고 레베카가 말했다.
“그렇게 질색할 필요 없어. 하나도 안 이상해. 네가 잘하는 걸 하는 것뿐이잖아. 그래도 걱정된다면 비밀을 지켜줄게. 당신이 꼭 필요한 인재라서 그래.”
율리안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흠. 뭘로 설득을 해야 할까. 여기에 있는 수십 개의 방을 당신의 상상으로 채우는 거야.”
“…….”
“당신에게 돈은 별 의미가 없을 테니 나는 성취감을 제안할게. 더는 지루할 일이 없을 거야.”
그 말이 율리안의 마음에 단단히 박혀들었다.
사실 레베카를 만난 뒤로 크게 지루하다는 생각이 든 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성취감.
그 단어가 그의 마음을 울렸다.
율리안은 언제나 느꼈던 갈증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레베카가 율리안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요하네스 공작이 아니라 율리안, 당신 자신으로 얻은 성취감 말이야. 그래도 도와주지 않겠다면…….”
레베카는 율리안의 어깨를 만지던 손을 떼고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내 부탁을 언제든지 들어주겠다던 약속을 들먹일 수밖에 없겠네. 도와줘, 율리안. 당신이 필요해.”
“할게.”
레베카의 손을 응시하던 율리안은 별수 없이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치사한 수였다. 레베카가 필요하다고 하면 자신은 죽어도 거절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이 일을 수락한 건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율리안은 제 손에 들린 도안을 바라봤다.
이걸 그리는 동안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즐거웠다.
그리고 레베카가 칭찬을 건넸을 때, 마가렛이 인정해줬을 때 가슴이 벅차올랐다.
잠시였지만 평생을 품고 온 갈증에 누군가가 물을 흠뻑 뿌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 팔 아파.”
레베카가 손을 뻗은 채로 웃었다.
율리안도 그녀를 따라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레베카의 손을 잡고 진한 악수를 나누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디자이너님.”
레베카의 장난 섞인 말에 율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둘 사이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마가렛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마가렛의 놀란 눈이 레베카를 향했다.
공작을 쥐락펴락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바뀐 레베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차갑기만 했던 예전의 그녀는 제플린과 소름 끼치도록 닮았었다.
하지만 지금의 레베카는 꽃봉오리가 꽃잎을 피워내기 시작했을 때처럼 활기가 넘쳐흘렀다.
이제 그녀의 얼굴에선 제플린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마가렛은 율리안을 바라봤다.
레베카를 향한 부드러운 그의 시선이 더없이 따뜻했다.
그가 레베카를 변화시킨 것일까.
레베카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낸 걸까.
레베카가 제플린과 이혼했다고 들었을 때 마가렛은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떨어트렸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
반신반의하며 그녀를 도왔던 것이었지만 정말로 제플린의 손아귀를 벗어날 줄은 몰랐다.
그 끔찍한 곳을 탈출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을지 상상만 해도 가슴이 저려 왔다.
게다가 레베카는 아마도 자신과 비슷한 곳을 향해 칼자루를 쥐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레베카를 타박했던 지난날이 후회되었다.
그래서 레베카를 다시 봤을 때 미안함에 제대로 눈을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레베카의 성장은 눈부셨다.
자신도 그녀의 성장에 이바지하고 싶었다. 응원하고 싶었다.
그래서일까.
마가렛의 얼굴에 찬찬히 웃음이 번졌다.
“그럼, 다나에 님께는 제가 말씀드려 놓겠습니다.”
한층 상냥해진 말투에 레베카는 화들짝 놀라 마가렛을 바라봤다.
인자한 미소가 자신을 반겼다. 이전 생에서부터 그토록 받고 싶었던 격의 없는 미소였다.
레베카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마가렛…….”
레베카는 감격스런 마음에 저도 모르게 마가렛을 끌어안았다.
“나, 잘할게요. 열심히 할게요. 그러니 마가렛도 날 도와주세요. 당신이 곁에만 있어 준다면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어린아이 같은 맹세였다.
마가렛은 영문을 몰라 율리안을 쳐다봤다.
율리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뭔가를 골똘히 고민하는 눈으로 레베카의 떨리는 어깨를 응시했다.
“예. 잘하실 거라 믿습니다.”
마가렛이 레베카의 등을 살며시 토닥거렸다. 마가렛에게선 고소한 버터 냄새가 났다.
레베카는 마가렛의 어깨에 묻었던 얼굴을 떼었다.
그리고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눈물을 닦았다.
“미안해요.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네요.”
“아닙니다. 큰일을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감정을 억누르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차라리 지금처럼 내뱉으십시오. 억누른 감정은 마음속에서 날뛰다가 결국에는 레베카 님을 병들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마가렛도…….”
레베카는 잠시 말끝을 흐리다가 이내 고개를 들어 물었다.
“마가렛도 울 때가 있나요?”
의외의 질문에 마가렛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내 조금 쑥스럽다는 듯 제 목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저도 인간인 걸요. 리베르타 구휼원에 오기 전까진 매일 밤을 울면서 잤습니다. 요즘도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날 때면 눈물이 그렇게 납니다. 주책이지요.”
레베카는 놀라움에 숨을 들이켰다.
이전 생에서 그녀는 마가렛이 무너지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마가렛은 무슨 일이 닥치든지 초연한 얼굴로 어떻게든 일을 해결하곤 했다.
그래서 레베카는 가끔 마가렛이 철로 만들어진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 마가렛이 눈물을 흘리다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레베카는 마가렛을 바라봤다.
호의 가득한 눈빛이 자신과 눈을 마주쳐왔다.
레베카는 자신이 지나치게 이상으로 삼은 나머지 마가렛을 인간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억지로 자신을 그 이상에 맞추고 있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무슨 문제라도…….”
그녀의 침묵이 길어지자 마가렛이 물어왔다.
레베카는 얼굴을 흔들었다.
“아니에요. 그나저나 오늘 안으로 살롱을 다 소개받으려면 시간이 많이 부족하겠군요. 얼른 가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율리안. 미안해. 본의 아니게 세워뒀네. 이제 피로연 디저트를 확인하러 가자. 마가렛이 만든 거니 분명히 맛있을 거야.”
“그래.”
다시 미소를 되찾은 레베카를 보고 율리안도 따라 웃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레베카가 마가렛을 만난 건 불과 몇 달 전인 걸로 알고 있었다.
저렇게 울면서 애틋한 사이로 발전할 사건이 있었다면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하지만 율리안은 묵묵하게 레베카의 뒤를 따랐다. 뭔지 몰라도 둘 사이에 남아 있던 앙금이 풀어진 모양이다.
레베카가 기쁘다면 그만인 일이다.
* * *
피로연 디저트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배를 두둑이 채워서 살롱 전체를 돌기에 체력이 넉넉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살롱의 규모는 레베카의 생각보다 컸다.
덕분에 살롱의 편의시설까지 전부 돌아보고 난 뒤에 레베카는 거의 녹초가 되었다.
살롱 직원들의 융숭한 작별 인사를 받고 레베카는 휘적거리며 안락한 마차를 향했다.
“레베카 님!”
마차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칸나가 레베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칸나!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구나. 피곤하지는 않니?”
“괜찮습니다. 수잔 뒤에 감시가 붙은 듯해 떼어내느라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습니다.”
“그래. 수잔은 뭐라고 하니.”
칸나는 사위를 잠시 살피다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신의 기사단이 제플린을 포박해 갔습니다.”
“얌전히 따랐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택이 떠나가라 반항을 했다고 하더군요. 한데…….”
“뭐가 또 있구나?”
“기사단에 잡혀간 뒤 사흘도 채 안 되어서 풀려났답니다. 거액의 배상금을 주기로 하고요.”
“배상금으로 끝났다라…….”
신의 기사단은 자비가 없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신전은 신전 소속 고아원의 아이 중 신체조건이 우수한 이들을 뽑아 군사 훈련을 받게 했다.
혹독한 군사 훈련과 함께 종교적 세뇌도 이루어졌다.
그렇게 데프리아 여신을 향한 맹목적인 헌신을 부르짖는 무장 집단이 탄생했다.
그들은 신성 모독을 했다거나 교리에 위반하는 행위를 한 신도들을 잡아들여 가차 없이 응징한다고 들었다.
신분의 고하와는 상관없이 그곳에 잡혀가면 죽어서 나오거나 아니면 미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전대 황제 때는 그 기세가 무척이나 드세 황자가 잡혀들어 가기도 했었다.
지금이야 조금 기세가 누그러졌다지만 그래도 신의 기사단은 아직까지 데프리아교의 신권을 공고히 만들어 주는 일등 공신이었다.
그런데 모든 귀족 앞에서 신전을 비난하는 그림을 내건 제플린이 아무런 해도 받지 않고 풀려났다?
레베카가 눈을 가늘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