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조사해 볼 필요가 있겠어. 그나저나 제플린의 기억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없었니?”
“예? 아닙니다. 예전보다 성질이 조금 포악해졌을 뿐, 여전히 레베카 님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분명 발코니에서 제플린은 자신을 알아봤다. 헛소리까지 하던 걸 보면 그의 기억이 돌아온 건 확실했다.
그런 그가 기억을 돌아왔다는 사실을 숨길 이유가 있을까.
생각을 거듭하던 레베카의 입가에 미소가 슬며시 떠올랐다.
‘옥타비오를 의심하고 있겠구나.’
그레이스의 말로는 제플린이 기억을 잃은 뒤 알리시아와 옥타비오가 저택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다고 했다.
기억을 되찾은 제플린이 뭔가 이상함을 느꼈던 게 틀림없었다.
이대로 그들의 사이가 틀어지면 레베카로선 무척이나 좋을 일이었다.
“일을 잘해주었구나. 칸나, 너도 여기는 처음 와보지? 온 김에 리베르타 사람들이랑 회포도 풀다가 어머니를 모시고 집에 오렴.”
“레베카 님은……?”
“나는 급히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괜찮아. 푹 쉬고 와.”
칸나는 거대한 살롱을 바라보았다.
입구 쪽에서 칸나를 발견하고 몰래 손을 흔드는 리베르타 사람들이 보였다.
“걱정하지 마. 내가 레베카와 동행할 테니.”
둘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율리안이 말했다.
칸나는 믿음직스럽게 어깨를 펴고 있는 율리안을 쳐다보다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 * *
“황제에게 연락하려는 거지?”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율리안이 레베카에게 물었다.
“맞아.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으니 이참에 확실히 제플린을 황제의 눈 밖에 나게 해야겠어.”
“마치 하늘이 돕는 것 같군.”
“글쎄. 뿌린 대로 거두는 게 아닐까. 제플린이 한 짓이 있으니까 결국 이렇게 일이 잘 풀리는 거야. 난 하늘의 뜻 같은 건 믿지 않아.”
“그 말을 신의 기사단이 들었다면 당신은 바로 잡혀갔을 거야.”
“그러면 당신이 구해 줄 거니까 괜찮아.”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왜 그렇게 나를 믿는지는 모르겠군.”
“당신은 마법사니까.”
“뭐?”
황당한 말에 율리안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레베카는 소리 내어 웃었다.
“아니야. 실없는 농이었어. 어쨌든 나는 아무런 대답 없는 신보다는 당신을 믿어. 적어도 당신은 온기가 느껴지니까.”
레베카는 쓸쓸한 시선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자신을 불쌍히 여긴 신이 자신에게 삶을 한 번 더 준 것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고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신이 불쌍한 인생을 살 동안 침묵한 자 또한 신이 아니던가.
이전 생에서 목이 부르트도록 신께 기도했지만 돌아오는 건 어두운 현실뿐이었다.
결국 삶을 바꾼 건 자신의 의지였다.
그러니 레베카는 신을 버리기로 했다.
엎드려서 기도할 시간에 제플린의 뺨을 한 대라도 더 치는 것이 나았다.
“그 대답, 마음에 들어.”
신의 축복을 받는 요하네스 공작이 신을 믿지 않는다는 그녀의 대답에 활짝 웃었다.
“어디 한번 부숴보자고.”
“좋아. 그러니 당신은 당분간 디자이너 일에 집중해야 해.”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야.”
아직도 디자이너라는 말이 불편한 듯 율리안은 헛기침을 했다.
“모든 게 사라졌을 때 그게 당신을 살릴 테니까. 뭔가에 집중할 수 있다는 건 많은 걸 잊게 해주거든.”
레베카의 얼굴 위로 황혼이 내려앉았다.
율리안은 한층 가라앉은 눈으로 너울거리는 붉은빛을 바라봤다.
불이 완전히 꺼지기 전 단 한 번 거세게 타오르는 불꽃 같은 색이었다.
지금 이 순간 레베카는 율리안과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었지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너머에 있을 진실이 율리안은 두려웠다.
사실은 레베카가 자신과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엄습했다.
율리안은 레베카가 그녀가 속한 세계로 돌아가 버릴 것 같아 레베카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나는 아무것도 잊지 않아.”
부들거릴 정도로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슬픔에 잠식당한 눈이 레베카를 향했다.
“그러니 사라지지 마. 레베카.”
레베카는 아플 정도로 제 손을 잡고 있는 율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도 어렴풋이 뭔가를 깨닫고 있는 걸까.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도와주는 것과 잠시나마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 사이에서 레베카는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계속 이렇게 그에게 불안감만 심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앞으로 있을 일에 머뭇거림은 독약이나 다름없었다.
레베카는 마음을 정하고는 율리안의 손아귀에서 조용히 자신의 손을 빼내었다.
“계약이 끝나면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게 당연한 거야.”
“계약이라고…….”
“그래. 우리가 계약 관계란 걸 잊지 마. 계약이 끝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야. 서로를 몰랐던 그때로.”
레베카는 얼음송곳 같은 말로 율리안을 날카롭게 찔렀다.
하지만 그를 아프게 한 건 레베카의 말이 아니었다.
어설프게 차가운 척하는 레베카의 표정이었다.
그녀는 거짓을 말하는 게 버거운지 호흡이 떨렸고, 미간을 있는 힘껏 모으고 있었다.
다른 이들 앞에서는 감정을 잘만 숨기면서 율리안 앞에서 레베카는 종종 날것의 얼굴을 보이곤 했다.
율리안은 그게 좋았고 그게 싫었다.
그는 제 입술을 짓이겨버리듯 다물었다. 심장이 난도질당한 것처럼 아렸다.
율리안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모든 게 끝나고도 당신의 생각이 여전하다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지.”
레베카는 그의 눈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눈부신 황혼의 빛은 아주 짧은 시간만 머물고 사라져버렸다.
순식간에 둘 사이로 어둑한 밤이 내려앉았다.
* * *
“데본셔 백작이 풀려났다고…….”
자히드라는 비서관 애브러햄의 보고에 침음을 흘렀다.
레베카의 말이 예언처럼 들어맞았다.
‘제가 율리안을 선택한 이상 그는 승승장구할 것이고, 제플린은 이제 지는 해가 될 것입니다. 누구를 택하시겠습니까?’
당시엔 그저 호기 어린 말인 줄만 알았다.
그래서 자히드라는 그 자리에서 결단을 내리지 않았다.
레베카의 말처럼 침묵한 채 일이 흘러가는 걸 지켜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결국 자히드라가 우려한 대로 흘러가고 말았다.
‘그 아이가 수를 쓴 것인가? 아니면 제플린의 검은 속내가 이 기회로 발각된 것인가.’
자히드라는 내심 오래된 충신 가문을 내치고 싶지 않았다.
제플린을 볼 때마다 절친한 친우 같았던 자킴 데본셔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그에게 이제 선택지는 없었다.
황권 강화의 마지막 종지부가 코앞에 있었다.
신전의 몰락을 기다리는 이때 변수가 있는 건 곤란했다.
자히드라의 이마에 깊게 팬 주름을 보고 비서관이 말했다.
“폐하께서 데본셔 백작을 의심하도록 요하네스 공작이 수를 쓴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는 여러모로 신전과 관계가 깊은 자니까요.”
“그럴 수도 있지.”
자히드라는 손깍지를 낀 채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날카로운 안광에 애브러햄은 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언제 보아도 살 떨리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럴 것 같진 않네. 백작을 빼내려면 율리안이 직접 교황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 일이거든. 죽는 한이 있어도 그 오만한 율리안 요하네스가 그럴 리가 없지.”
하지만 자히드라는 연회장에서 레베카를 바라보던 율리안의 눈빛을 떠올리고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사랑에 미친 사내가 못할 일은 없지. 그건 확실히 사랑에 빠진 눈이었어. 거참, 사는 동안 율리안의 그런 낯짝을 보는 날이 오다니.”
자히드라는 이마를 짚었다.
“그러고 보니 카트린느는 어쩌고 있는가.”
“아직도 식음을 전폐하고 계십니다.”
“제국의 황녀라는 아이가 그렇게 정신이 약해서야 어디 쓰겠는가.”
“아직 여린 소녀이시지 않습니까.”
“그 아이는 내 딸이다. 내 자식은 약해서는 안 돼.”
단호한 자히드라의 음성에 애브러햄은 어깨를 움찔했다.
본인에게 하는 것만큼이나 자히드라는 자식들에게 엄격했다.
자히드라는 황녀와 황자들이 매달 자신의 쓰임을 증명하는 발표회를 열게끔 했다.
그리고 순위를 매겨 하위권의 자식에겐 벌을 내렸다.
카트린느는 언제나 하위권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외모와 사내를 홀리는 듯한 목소리로 가까스로 자히드라의 눈 밖에 나지는 않았다.
자히드라가 눈가를 매만지며 말했다.
“최대한 빨리 카트린느의 혼처를 알아봐야겠구나. 괜찮은 조건을 약조한 왕국들을 추려와 주겠나.”
“예. 알겠습니다.”
자히드라는 마치 장터에서 물건을 흥정하는 것처럼 카트린느의 혼약에 대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애브러햄은 순간 카트린느의 운명에 연민이 들었으나 곧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바꿀 수 없는 운명이었다.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려와 애브러햄이 문을 열고 나갔다.
자히드라는 의자에 고개를 젖히고 복잡한 머리를 정리했다.
“저어…… 폐하.”
애브러햄이 다시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요하네스 공작이 선물을 보냈습니다.”
“선물을? 가지고 오라 하여라.”
자히드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정한 하인 여럿이 커다란 그림 네 점을 들고 들어왔다.
그들은 자히드라가 보기 쉽게 그림을 손에 들고 일렬로 늘어섰다.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던 자히드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건…….”
그림 속엔 늠름한 모습을 하고 있는 자히드라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미화가 심히 많이 된 것 같았지만 썩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애브러햄이 감탄했다.
“정말 훌륭한 작품입니다. 폐하의 기백을 충분히 담아냈군요. 이렇게 황홀한 초상화는 난생처음 봅니다.”
“제플린 그자가 작품 보는 눈은 탁월하지. 그래, 이걸로 내 환심을 사려 했던 게로군.”
“예? 이건 요하네스 공작이 보낸 것인데…….”
“아니다. 알 것 없다.”
“아, 서신도 하나 같이 왔습니다.”
자히드라는 꽃향기가 은은하게 나는 서신을 받아 들었다.
율리안이 자신을 위해 서신에 향수를 뿌렸다고 생각하니 무척 끔찍했다.
자히드라는 레베카가 서신을 썼을 거라고 믿기로 했다.
< 지난번 무례의 용서함을 구하고자 보잘것없는 선물을 보내드렸습니다.
심의를 기울여 골랐을 것이 분명하니 부디 마음에 드셨기를 바랍니다.
다름이 아니라 청첩장을 전해 드리고자 작은 다과회를 열까 합니다.
다과회의 메인 디저트는 몽블랑 케이크로 할까 합니다.
부디 마음에 맞는 친우분들과 함께 아래에 적힌 장소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
자히드라는 서신에 적힌 장소를 쳐다봤다.
라본느 살롱이라…….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게다가 살롱은 본디 자택에서 개최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서신에 동봉된 주소는 공작 성이 아니라 수도와 인접한 요하네스 공작령이었다.
자히드라가 애브러햄에게 서신을 보여주자 애브러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