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93화 (93/232)

93.

“이상하군요. 이곳은 언덕이 있던 곳인데…….”

“자네도 라본느 살롱을 모르는가.”

“예. 처음 들었습니다.”

“흐음…….”

자히드라는 서신을 한 번 더 읽고는 접어 두었다.

네 점의 초상화를 훑는 그의 눈에 즐거움이 묻어났다.

자히드라가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애브러햄. 자네는 내 곁에 오래 있었으니 나를 잘 알겠지.”

“비천한 제 의견이 필요하시다면 하문하십시오.”

“신의와 실리. 둘 중에 어느 것을 따랐을 때 내가 흥하던가.”

애브러햄이 자히드라를 바라봤다. 자히드라의 얼굴에 장난기가 도는 게 보였다.

이럴 땐 보통 답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애브러햄의 능력이 퇴화했는지를 확인하는 일종의 시험이었다.

자히드라는 종종 신하들에게 불쑥 이런 시험을 내고는 했다.

틀린 답을 내어놓으면 다음 인사 때 반드시 불이익이 따랐다.

애브러햄은 지금까지 자히드라의 시험에서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도 그는 틀리지 않을 것이었다.

애브러햄이 슬며시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실리입니다. 어떤 이의 신의를 잃었다면 실리를 준 자의 신의를 다시 얻으면 되는 일입니다.”

“좋은 대답이군. 그럼 외출 준비를 하세. 내 직접 친우들을 만나야겠으니.”

애브러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집무실을 나섰다.

* * *

“이렇게 큰 건물이 지어지는 동안 아무도 몰랐단 말입니까!”

마차에서 내린 몽블랑 클럽의 회원 살바도르가 라본느 살롱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 대단하신 요하네스 공작께서 비밀리에 진행하셨다고 하니 그럴 수도 있지요.”

뒤늦게 도착한 테레사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그녀도 라본느 살롱의 규모에 놀란 건 마찬가지였는지 눈동자가 살짝 커져 있었다.

“살롱을 대여하는 곳이라……. 어떤 사업일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군요.”

헬렌이 테레사의 뒤를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두툼한 안경알을 추어올리며 라본느 살롱의 외관을 흥미롭게 살폈다.

“그나저나 요하네스 공작은 신전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 아니요. 어째서 우리 클럽에 관심을 가진다는 건지……. 혹시 신전의 세작은 아닐까 걱정이 되는데.”

살바도르가 부드러운 붉은 융단을 발로 비벼보며 말했다.

융단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의 눈가에 희미한 만족감이 어렸다.

헬렌이 그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폐하께서 직접 고른 인물입니다. 폐하의 안목을 무시하는 겁니까.”

“그, 그럴 리가 있나. 단지 노파심에 그런 걸세.”

“어쨌거나 정말로 공작이 우리 클럽에 들어온다면 엄청난 아군을 얻은 게 아닙니까. 마땅히 기뻐해야 할 일이지요.”

헬렌의 호들갑 섞인 말에도 테레사는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살롱이 마음에 든 듯 그녀의 얼굴이 조금 들떠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혹시 살바도르, 테레사, 헬렌 교수님 되십니까?”

화려한 로비를 둘러보느라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즈음 마가렛이 예의 바른 태도로 세 명을 맞았다.

살바도르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가렛이 적절한 수준의 웃음을 머금었다.

“저는 이곳의 책임자 마가렛 베넷이라고 합니다. 불편한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그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마가렛은 조금 긴장한 채였지만 그 사실이 겉으로는 드러나진 않았다.

오히려 긴장한 탓에 평소보다 더 완벽한 자태를 보일 수 있었다.

지나가던 살롱의 직원들이 교수 삼인방을 발견하자 잠시 멈춰서고 가볍게 목례를 했다.

테레사가 슬쩍 웃으며 헬렌에게 속삭였다.

“직원들의 수준이 높은 곳이군요. 저잣거리의 노천카페 같은 곳이라 생각했는데 의외입니다.”

그 말을 엿들은 마가렛의 어깨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어젯밤부터 이어져 온 걱정이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마가렛은 많은 사람, 특히 여러 귀족을 만나는 게 아직은 껄끄러웠다.

옛 생각이 떠올라 괴롭기도 했고 사교계에서 몰락한 귀족이란 사실은 조롱거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가렛은 다나에에게 자신이 주방을 맡겠노라 간곡히 부탁했다.

그에 로비 담당과 각종 손님 접대는 다나에가, 마가렛은 주방과 기타 장식관리를 맡기로 했다.

하지만 오늘 있을 깜짝 발표를 위해선 오벨리아가 살롱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겨야 했다.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마가렛이 손님 접대를 맡기로 했다.

‘침착하자…….’

마가렛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문을 열었다.

“여기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먼저 도착한 클럽 회원들이 세 사람을 환한 얼굴로 맞았다.

“어서 오시게. 늦었구먼.”

상기된 얼굴의 클럽 회원들은 흥미가 떠오른 눈을 빛내며 방 안을 살피고 있었다.

* * *

몽블랑 클럽 회원들은 이미 세상의 진귀한 것들을 충분히 맛보고 즐긴 사람들이었다.

취향 또한 확고해서 웬만한 수집품이나 서적으로는 그들의 흥미를 끌기 힘들었다.

그런 회원들이 콧김을 내뿜으며 흥분하고 있었다.

살바도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장정 몇십 명은 족히 들어갈 만한 커다란 방 안에는 짙은 고목으로 만들어진 가구들이 보기 좋게 배열되어 있었다.

살바도르는 한가운데 놓여 있는 기다란 테이블을 손으로 쓸었다.

매끄럽게 칠을 한 나무의 감촉이 기분 좋게 전해졌다.

한쪽 벽면에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거대한 책장이 늘어서 있었다.

그 책장은 무릇 학도라면 지대한 관심을 쏟을 만한 다양한 분야의 서적들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호기심 있게 책장을 살펴보던 헬렌이 이내 환호성을 지르며 사다리에 냉큼 올랐다.

“수집품이 예사롭지 않군요. 이건 초대 황제 시절의 여신상인데…….”

테레사가 투명한 장식장 안을 들여다보며 눈을 반짝였다.

세월이 묻어나는 순백의 데프리아 여신상이 장식장 안을 채우고 있었다.

테레사는 당장 꺼내 보고 싶어 안달이 난 얼굴로 장식장 주변을 맴돌았다.

“이보게, 살바도르! 여기에 자네가 아주 좋아할 만한 게 있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살바도르는 첼스턴 서몬드 백작의 부름에 정신을 퍼뜩 차렸다.

첼스턴이 기다란 독서대 앞에서 그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독서대 위에는 장서가 놓여 있었다. 장서는 귀중한 물건인 듯 쇼케이스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살바도르는 고개를 갸웃하며 첼스턴이 말한 장서를 향해 걸어갔다.

심드렁한 얼굴로 빛바랜 장서를 살펴보던 살바도르는 순간 번개에 맞은 것처럼 얼굴을 번쩍 들었다.

“이, 이건 보니켈러의 신학론이 아닙니까?”

살바도르는 고어로 쓰인 오래된 장서를 찬찬히 해석했다.

장서를 읽어내려갈수록 살바도르의 손이 세차게 떨렸다.

“설마…… 진품은 아니겠지요?”

그는 쇼케이스 유리 위에 떨리는 손을 올려두었다. 유리 위에 그의 지문이 선명하게 찍혔다.

데프리아교의 첫 신학자였던 보니켈러의 저서라니.

신학도라면 누구나 침을 흘릴 만한 책이었다.

정신없이 장서를 살펴보는 살바도르를 보고 첼스턴이 흐뭇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진품일 걸세. 왜냐하면 이 살롱의 주인이…….”

“다들 먼저 모여 있었군.”

그때, 독수리상이 붙어 있던 벽면이 스르르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히드라가 등장했다.

모두가 뜻밖의 장소에서 나타난 자히드라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크흠, 흠!”

자히드라와 함께 나타난 애브러햄이 헛기침을 했다.

클럽 회원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세상의 존엄이신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짐이 이상한 곳에서 등장해 다들 놀랐나 보군. 나도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지. 신기하지 않은가. 은밀히 움직이는 우리 클럽을 위한 전용 비밀 입구라네.”

자히드라가 흐뭇한 얼굴로 순백의 독수리상을 쓸어내렸다.

독수리는 로탄더스를 대표하는 동물답게 용맹함을 뽐내고 있었다.

독수리의 단단한 부리를 매만지던 자히드라는 눈을 데구루루 굴리는 회원들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보아하니 이곳이 까다로운 경들의 취향을 제대로 충족시킨 것 같네 그려. 새 회원이 꽤 애를 쓴 것 같은데 보람이 있겠어.”

“그럼 이제 이곳이 우리의 새로운 본부가 되는 것입니까?”

첼스턴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물었다.

자히드라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근사한 곳이지 않은가.”

“그럼 이 멋진 곳을 마련해준 신입회원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살바도르가 독서대의 쇼케이스를 초조하게 두들기며 말했다.

그는 얼른 신학론의 주인을 만나 이것저것 물어볼 생각에 잔뜩 들떠 있었다.

다른 이들도 살바도르와 비슷한 마음인 듯 눈에 기대감을 한가득 품고 있었다.

자히드라는 궁금증으로 폭발할 것 같은 회원들의 반응을 한껏 즐겼다.

그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것 갈 때 즈음 자히드라가 뜸을 들이다 입술을 열었다.

“자자. 다들 흥분을 가라앉히게. 그럼 이제 자네들을 그만 애태우고 새로운 회원들을 소개해볼까.”

“새로운 회원‘들’이요? 요하네스 공작 말고 또 다른 이가 있단 말씀입니까?”

헬렌이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그녀의 품에는 책 두어 권이 보물처럼 소중히 안겨 있었다.

“다들 반갑습니다.”

헬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율리안이 들어왔다.

회원들의 깜짝 놀란 시선은 율리안의 날카로운 눈매를 거쳐 그의 곁에 다소곳하게 서 있는 어느 여인의 얼굴에 맞닿았다.

그녀를 가장 먼저 알아본 첼스턴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레, 레베카 데본셔…….”

소탈한 초록 드레스를 입은 레베카가 녹아드는 미소를 지으며 우아하게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레베카 오벨리아입니다.”

* * *

“왜 정체를 밝히려는지 잘 모르겠군. 결혼식을 하기 전까진 당신의 정체를 비밀로 하겠다면서.”

몽블랑 클럽을 위해 만든 일명 ‘학자의 방’으로 걸어가던 율리안이 레베카에게 물었다.

레베카가 여유롭게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지금 저 방에 모인 사람들은 신흥 세력이야. 구세력에 비해 결속력이 약하다는 단점이 있지. 지금은 황제라는 구심점이 있어서 꽤 끈끈해 보이지만, 이해관계가 어긋나면 금방 틀어질 만큼 얕은 관계야.”

‘학자의 방’은 장서의 무게 때문에 지하에 마련되어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율리안이 레베카의 어깨를 살며시 부축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에스코트였다. 레베카는 자신의 어깨에 닿은 율리안의 굵은 손가락을 힐끔거렸다.

“그건 나도 잘 알아. 하지만 클럽의 결속력이 약하다는 사실과 당신이 정체를 밝히는 게 무슨 상관관계가 있다는 건지 잘 모르겠는 걸.”

“그건 당신이 요하네스 공작이기 때문이야.”

“내가 요하네스 공작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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