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잠시 시선을 내리깔고 머리를 굴리던 율리안이 고개를 쳐들었다.
“아. 우리 가문이 여태껏 구세력의 편에 서서 그런 거겠군.”
레베카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맞아. 가뜩이나 연대가 부족한 집단이야. 당신이 그동안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해도 요하네스 공작은 구세력의 상징이나 다름없어. 그러니 당신이 그 클럽에 가입한다고 한다면 반발이 꽤 크겠지.”
“그래서 당신이라는 비밀을 통해 결속력을 다지려고 하는 거겠군?”
“그래. 요하네스 공작의 약혼녀에 대한 소문으로 제국 전체가 들썩이고 있어. 아마 그들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일 거야. 비밀을 알려준다면 우리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호감 정도는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우리에겐 호감이 필요해.”
“듣다 보니 괜찮은 작전인 것 같은데.”
“게다가 그 방 안을 회원들의 입맛에 맞춘 물건으로 가득 채워 뒀잖아.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호감은 얻고도 남았을 것 같은데. 그나저나 그 물건들이 전부 가보라며? 나야 좋지만…… 가보를 이렇게 마음대로 공개해도 되는 거야?”
“뭐. 가보라고 해봤자 돌조각 몇 개랑 종이 쪼가리일 뿐이야. 가보 입장에서도 평생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느니 제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들 손에 들어가는 게 더 낫지 않겠어?”
율리안은 어깨를 으쓱 올리고는 하품을 길게 했다.
아무래도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피곤한 모양이었다.
그가 옷을 고른다고 새벽부터 부산을 떨었다고 크로아가 넌지시 일러주었다.
레베카는 졸린 눈을 비비고 있는 그의 자태를 찬찬히 훑어봤다.
율리안은 자신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검은색을 버리고 회갈색의 정장을 빼입고 있었다.
그 탓에 다소 음험하게 보였던 평소의 분위기와 달리 그의 인상이 조금 부드러워 보였다.
게다가 그의 목에 매인 단정한 검은 크라바트가 진중한 느낌까지 들게 해 누군가의 호감을 얻기 위한 적절한 의상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늘어져 있던 옅은 눈그늘도 화장으로 가렸는지 얼굴이 한층 더 화사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얼굴이 빛나는 것 같네. 흑진주 같던 낯빛이 백옥이 되었어.”
레베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의 불량스러움을 장식하던 구릿빛 피부가 유달리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 한동안 하지 않았더니 금방 효과가 나타나나 보군.”
“뭘 안 했는데?”
“아, 아무것도 아니야.”
율리안은 대답을 얼버무리며 품속에서 손거울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리며 말을 돌렸다.
“당신 말대로 연습을 하기는 했는데……. 계속 이러다간 입가에 경련이 일겠어.”
손거울을 들여다보며 마지막으로 제 미소를 점검하던 율리안이 투덜거렸다.
“그래도 크로아가 많이 좋아졌다고 했잖아. 나는 사실 평소랑 똑같은 것 같긴 한데…….”
레베카는 회원들의 마음에 들려면 평소 대중에게 알려진 것과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율리안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라본느 살롱에서 돌아온 날.
공작 성에서 황제에게 서신을 보낸 레베카가 율리안에게 말했다.
‘클럽 회원들이 무조건 특별대우를 받는 것처럼 느끼도록 해야 해.’
‘뭐? 난 특별대우하기 싫은데. 누구에게 아양을 떠는 건 딱 질색이라.’
율리안은 영 내키지 않은 듯 비딱하게 머리를 괴었다.
레베카는 비협조적인 그의 태도에 잠시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못하겠거든 그냥 웃고만 있어.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잠자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크로아가 대뜸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공작님께선 웃는 연습부터 하셔야겠군요. 비웃는 게 아니라 미소 말입니다. 단언컨대, 공작님께서 잘 웃어 주기만 하셔도 반은 넘어올 겁니다.’
크로아의 말에 레베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율리안은 잘 웃는 편이지 않나요? 그의 특기라고 생각해서 말한 건데…….’
‘누, 누가 잘 웃어요? 정녕 저희 공작님을 두고 말씀하시는 게 맞습니까?’
레베카는 자신의 말에 질색하던 크로아를 떠올리곤 웃음을 베어 물었다.
‘아무리 봐도 잘 웃는 것 같은데?’
불만스럽게 입을 비쭉 내민 율리안을 보며 레베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는 꽤 무서운 인상이긴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생각은 사라졌다.
어느 순간부터 레베카를 볼 때마다 율리안의 눈가엔 항상 웃음이 서려 있곤 했다.
때문에 그가 제국의 흑사자라 불리는 악명 높은 사람이었다는 걸 레베카는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하아…….”
어느새 학자의 방 앞에 당도했다.
문손잡이를 돌리기 전에 율리안은 한숨을 내쉬며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입꼬리를 높이 끌어올렸다.
누가 봐도 웃는 게 힘든 모습이었다.
순간 레베카는 율리안이 잘 웃지 않는다던 크로아의 말을 한 번 더 상기하곤 뭔가를 깨달았다.
레베카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직원들의 인사에도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던 율리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는 다른 사람에겐 차가운 편이었다. 레베카가 처음 본 그의 인상과 다를 바 없었다.
그가 변한 게 아니었다.
자신의 앞에서만 상냥해지는 것이었다.
‘귀엽게 왜 저래 진짜.’
특별대우를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레베카는 자꾸만 흘러나오는 웃음을 숨기기 위해 미간을 잔뜩 찌푸려야만 했다.
율리안은 그 모습에 레베카가 긴장한 줄 착각하곤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테니까.”
갑작스레 들어온 율리안의 아찔한 미소에 레베카의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레베카는 고개를 홱 하고 돌려 그를 향한 시선을 끊어냈다.
“……?”
레베카가 말없이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그런 그녀를 의아하게 보던 율리안은 제 나름대로 이유를 추측했다.
‘레베카도…… 심장이 안 좋아졌나?’
율리안은 걱정스레 레베카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아직 레베카의 몸에는 중독 증상이 남아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가 식은땀을 흘리며 가슴을 부여잡고 있을 이유가 있겠는가.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생각했더니 역시나 유스타프는 돌팔이 의사였다.
그는 조만간 다른 의사에게 레베카를 진찰하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문고리를 잡았다.
* * *
‘헬렌 몬타나, 살바도르 윈스터, 테레사 바르바라, 첼스턴 서몬드…….’
클럽 회원들은 경계심을 숨기지 못한 채 레베카를 노려봤다.
레베카는 회원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봤다.
그리고 칸나가 추려왔던 클럽 회원 예상 명단과 대조해 봤다.
몽블랑 클럽이 워낙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탓에 정확한 회원 명단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오늘 이곳에 모인 이들도 클럽 회원의 전부는 아니었다.
회원들도 서로의 정체를 모두 알진 못했다.
몽블랑 클럽의 모든 것을 아는 건 오직 황제뿐이었다.
그래도 어렵사리 추정은 할 수 있었다.
레베카는 칸나에게 활발하게 활동하는 신학자와 신흥귀족 세력의 명단을 조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자들 모두가 그 명단 위에 있었다.
‘역시 칸나야.’
레베카는 명단에 적혀 있는 그들의 신원을 되새기며 입꼬리를 사르르 말아 올렸다.
그녀의 허를 찌르는 아름다운 미소에 모두가 잠시 넋을 잃었다.
“다들 제가 왜 이 자리에 서 있는지 궁금하시겠죠.”
레베카는 의심이 가득한 사람들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쳤다.
흔들림 없이 단단한 그녀의 눈빛이 속마음을 꿰뚫어 보듯이 날카롭게 내리꽂혔다.
그녀의 시선에도 여전히 삐딱한 태도로 레베카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레베카와 눈을 마주친 대부분의 사람은 게슴츠레 뜨고 있던 눈을 원래대로 돌리거나 한껏 꼬고 있던 다리를 풀었다.
어느덧 방어적으로 굳어 있던 얼굴 위로 호기심이 고개를 내밀었다.
레베카는 그제야 예리하게 치켜든 눈꼬리를 내리고는 입을 열었다.
“제가 바로 여러분이 그토록 궁금해하시던, 요하네스 공작의 약혼녀입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제 남편 될 사람과 뜻을 함께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좌중이 잠시 얼어붙었다. 다들 방금 제가 뭘 들었는가 싶어 수군거렸다.
그들에게 레베카는 아직 데본셔 백작 부인으로 익숙했다.
그런데 이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 요하네스 공작의 약혼녀가 됐다고?
쉽사리 믿을 수 없는 황당한 이야기였다.
“요하네스 공작! 또 무슨 장난질을 하는 건 아니요?”
회원 한 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맞습니다. 저번처럼 거짓말로 저희를 우롱하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또 다른 회원도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율리안을 노려봤다.
노골적인 불신의 태도에 레베카는 율리안을 흘깃 바라보았다.
대체 평소에 무슨 짓을 하고 다녀야 신뢰가 이 정도로 바닥을 칠 수 있을까.
정작 율리안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그저 기계처럼 웃고만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웃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꽉 차 있어 다른 사고를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레베카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곤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런 중요한 자리에 거짓을 고할 만큼 생각이 없지는 않습니다. 믿지 않으시면 어쩔 수 없겠지만 저희는 정말 약혼한 사이입니다. 곧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기도 하고요.”
잠시 좌중이 술렁거렸다.
레베카가 이런 장난에 동참할 것 같은 인물은 아니었기에 다들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레베카는 그들의 의심을 잠재워줄 이야기를 시작했다.
“괜한 오해를 살 것 같아 말씀드리자면, 저희 둘 사이에 불륜은 없었습니다. 애초에 데본셔 백작가에 묶여 있던 몸이니 그럴 수도 없고요. 백작가에서 내쳐진 저를 여기 요하네스 공작께서 받아주셨고, 서로의 뜻이 맞는 걸 확인했지요.”
준비된 대본도 없었는데 레베카는 실제로 있었던 일인 듯 둘의 사랑 이야기를 술술 읊었다.
순식간에 제플린은 천하에 둘도 없는 의처증 환자가 되었고, 율리안은 레베카를 구렁텅이에서 구해준 영웅이 되었다.
그녀의 언변에 율리안까지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레베카는 둘의 눈물겨운 사랑의 서사에 종지부를 찍고는 회원들을 둘러봤다.
그녀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어느새 그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곤 그녀의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레베카는 시선을 살짝 밑으로 내렸다. 그녀의 기다란 속눈썹 밑으로 그림자가 졌다.
“아시다시피 제 남편이었던 제플린 데본셔 백작은 저에 대한 집착이 강하신 분이셨죠. 그래서 제 정체를 숨기고 비밀리에 약혼식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데본셔 백작의 성격상 어떤 방해를 할지 몰라서요. 일전의 무도회에서도 당당히 공작님의 파트너가 되지 못하고…….”
차마 다음 말을 하지 못하겠다는 듯 레베카가 고개를 쳐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