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가슴 저린 그녀의 이야기를 감명 깊게 듣고 있던 헬렌이 얼른 레베카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헬렌은 벌게진 눈시울로 레베카에게 진심을 담은 위로를 건넸다.
“정말 힘드셨겠어요.”
“감사합니다.”
레베카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는 시늉을 하며 침을 한 번 삼켰다.
누가 봐도 먹먹한 감정을 추스르느라 힘에 겨운 모습이었다.
처연한 레베카의 자태에 여기저기서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율리안은 비틀거리는 레베카를 부축했다.
눈물을 찍어내는 자신의 약혼녀를 보자 율리안의 등 뒤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레베카와 절대 척지면 안 되겠어.’
율리안은 레베카가 순식간에 동정표를 따낸 걸 보고 혀를 내둘렀다.
레베카의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흔해 빠진 신파극이었지만 그 주인공이 레베카와 율리안이라는 점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전남편에게 버림받은 성녀 레베카와 무례하고 오만한 율리안 요하네스 공작.
게다가 두 사람의 눈부신 외모마저 한 폭의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외적 가치보다 내적 가치가 더 중요하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보기 좋은 외모가 끼치는 영향은 무시할 수 없었다.
흔해 빠진 이야기여도 아름다운 두 남녀가 주인공이라면 얼굴을 감상하기 위해서라도 기꺼이 돈을 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때문에 제국의 다이아몬드라 불리던 레베카와 고고한 흑사자 율리안을 흔해 빠진 신파극에 대입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가슴을 얼마든지 절절하게 만들 수 있었다.
‘날 아름답다고 찬양한 걸 철저히 이용해주지.’
레베카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지금껏 제 인생에서 아름다운 외모는 독이었다.
하지만 이젠 자신을 죽이던 그 독을 이용할 차례였다.
레베카는 율리안의 팔을 잡고는 휘청거리는 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리고 아직 물기가 가시지 않은 눈을 들어 자히드라를 바라봤다.
“하지만 자비로우신 황제 폐하께서 이 딱한 사정을 들으시고는 저희를 도와주겠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꿈꾸던 세상을 같이 일궈갈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됐죠. 그래서 이렇게 여러분들을 뵙고자 폐하께 청했습니다.”
“저희가 꿈꾸는 세상이라, 그게 대체 뭡니까.”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지금까지 삐딱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테레사가 다소 날 선 말투로 질문했다.
그녀의 적대적인 태도에 율리안의 눈썹 한쪽이 슬쩍 올라갔다.
하지만 레베카는 별다른 타격 없이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희가 원하는 건…… 누구나 평등하게 여신의 행운을 누릴 수 있는 세상입니다.”
“하! 고귀하신 요하네스 공작님께서 진정 그런 걸 원하신단 말씀이십니까. 전 제국을 통틀어 신전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고 계신 분께서 뭐가 아쉬워 그러십니까. 혹여나 동정심이 들어 그런다는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그런 분이 아니라는 건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레베카는 총명함이 엿보이는 테레사의 적안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 색만큼이나 화려한 붉은 머리칼이 팔짱을 끼고 있는 그녀의 팔 위로 흘러내렸다.
신성 예술학의 대가라는 테레사는 타협하지 않는 성정으로 유명했다.
그녀의 그런 성격 때문에 어느 파티에서 누군가와 말싸움을 했다더라, 어느 영식의 머리채를 잡았다더라, 하는 구설수가 항상 뒤따라왔다.
때문에 레베카도 이전 생에서 그녀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레베카는, 절대 당신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닫혀 있는 테레사의 입술을 응시했다.
레베카의 눈썹이 살짝 치켜올라갔다.
그녀가 테레사를 설득할 방도를 찾고 있을 때 율리안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제가 요하네스 공작이기에 그런 걸 원하는 겁니다.”
여유롭게 머리를 쓸어올리는 율리안의 얼굴에는 평소의 음험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도리어 나긋하게 짓는 미소에서 인자함까지 느껴졌다.
‘요하네스 공작이…… 저런 인상이었나?’
테레사는 율리안의 온화한 얼굴에 눈을 비볐다.
현 신전에 큰 반감을 보이는 테레사에게 요하네스 공작은 신전의 하수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의 시종일관 건방진 태도는 먹이사슬 정점에 서서 수많은 신도를 착취하는 권력자를 떠올리게 했다.
몽블랑 클럽 회원들은 율리안을 고귀한 요하네스 공작이 아닌 파렴치한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제대로 설명해 주시죠? 어리석은 저희로선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요.”
한껏 비꼬는 테레사의 말투에도 율리안은 입가에 떠오른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
“이곳에 계신 여러분들은 누구보다 제가, 아니 요하네스 공작가가 신전의 허수아비일 뿐이란 걸 잘 아실 겁니다.”
그에 말에 레베카는 깜짝 놀라 아까부터 조금 맞닿아 있던 율리안의 손을 저도 모르게 덥석 잡았다.
이곳에서 약하게 보이는 건 자신이면 족했다.
율리안이 굳이 하이에나 같은 저들 앞에서 약점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굳어 있는 레베카의 손에 율리안이 부드럽게 손깍지를 꼈다.
그의 견고한 손마디가 여린 레베카의 살에 감겨들었다.
평소보다 대담한 그의 스킨십에 레베카는 순간 움찔했지만 곧 긴장된 어깨를 내렸다.
그와 맞잡은 손에서 자신을 믿으라는 그의 전언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지금껏 율리안이 자신을 도와서 나빠진 일은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를 믿어보자고 생각하며 레베카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판단이 맞았는지 율리안의 이어지는 폭탄 같은 말에 테레사의 매서운 눈매가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신전의 덫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을 어릴 때부터 익히 봐왔습니다. 전 요하네스 공작으로 살면서 제가 누리는 것이 온전히 제 것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율리안은 씁쓸한 웃음을 집어삼켰다. 여기서 속마음을 털어놓으리라는 건 자신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테레사의 질책이 가득한 눈빛을 보자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음에도 누구보다 피하고 싶었던 가문의 부끄러운 역사가 그녀의 눈에 담겨 있었다.
꼭 어린아이가 잘못을 실토하는 것 같아 수치심이 밀려들었지만 어쩐지 피하고 싶지 않았다.
율리안은 레베카에게 진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서로의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던 부모를 보며 자랐다.
때문에 율리안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언젠가 자신이 아내를 얻게 된다면 그녀에게만큼은 솔직해지자 다짐했었다.
비록 계약 결혼이긴 했으나 레베카는 이제 그의 아내가 될 여자였다.
내 아내.
그 말이 어딘가 섬찟하게 들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처음엔 강인해 보이고만 싶었다.
사춘기 소년처럼 자신의 능력을 그녀에게 과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무리해서라도 레베카의 요구는 모두 다 들어줬다.
자신이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레베카가 알았으면 했다.
하지만 이젠 제 모든 걸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한심한 작자라도 받아줄 수 있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니 들어줘. 레베카.’
율리안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먹먹함을 밀어내기 위해 레베카의 손을 꾹 쥐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저는 그리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축복받은 요하네스 공작이라는 이미지와 제 본성은 아주 큰 차이가 있지요. 저는 그 간극에 항상 괴로워하며 살아왔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겁쟁이처럼 숨어 살았죠.”
레베카가 율리안의 손을 쓸었다. 그 덕에 율리안의 긴장된 입매가 조금 풀어졌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숨고 싶지 않습니다. 여기 서 있는 제 사랑하는 약혼녀가 제게 꿈을 주었기 때문이죠. 레베카는 제게 무기력하게 신전에 휘둘리는 공작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축복을 나눠줄 수 있는 진정한 요하네스 공작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려 주었습니다.”
진심이었다. 클럽 회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아갈 길을 알면서도 한 발도 내딛지 못하던 자신에게 레베카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레베카는 그를 목적지를 향해 달릴 수 있도록 했다.
“지금껏 그 꿈을 위해 혼자 외로운 싸움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제겐 여러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들과 함께 했으면 합니다. 우리 함께 썩어빠진 신전을 무너뜨리고 데프리아교의 진의를 세상에 널리 알립시다.”
곱게 접어든 그의 눈동자가 신이한 황금빛을 뿜어냈다.
율리안의 미소에 자비로움이 깃들었다.
세기를 거쳐 그의 몸속에 각인된 축복의 유전자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아아…….”
율리안의 말을 듣던 신학자들이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마치 성스러운 계시를 전하는 신의 사자 같아 보였다.
존재할 리 없는 후광이 그의 뒤에서 비쳐드는 것 같았다.
반면에 신앙심은 없다시피 한 신흥귀족들은 다른 의미로 놀랐다.
율리안이 예의 바르게 말하는 것을 처음 봤거니와, 심지어 그의 말에 설득력까지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금 이 순간에 그는 완벽한 요하네스 공작이었다.
“하, 함께 합시다!”
살바도르가 살짝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뜬금없이 결연한 외침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지만 다들 살바도르와 비슷한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럼 이제 투표를 해야겠으니 요하네스 공작과 레베카 양은 잠시 뒤돌아서 있게나.”
자히드라가 속을 알 수 없는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클럽 회원들을 모았다.
레베카와 율리안은 부산스러운 소음을 들으며 몸을 돌려세웠다.
등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율리안의 관심은 오로지 레베카를 향해 있었다.
어느 정도 그럴듯한 포장을 해서 말하긴 했으나 어찌 됐건 반 이상은 솔직한 생각이 담긴 연설이었다.
그 안에 담긴 의미를 그녀가 알아주었으면 했다.
율리안은 입 안이 바싹 말라 입술을 축였다.
곧이어 레베카가 그를 올려다봤다. 율리안의 두려움이 가득한 눈동자가 그녀와 마주쳤다.
“용기 내어 말해줘서 고마워. 힘든 시간을 용케 잘 버텼네.”
레베카가 한없이 깊은 눈동자로 그에게 속삭였다.
그녀는 율리안의 연설이 순간적으로 꾸며낸 거짓말 따위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평생 동안 이어진 그의 고뇌가 고스란히 이해가 됐다. 레베카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는 변함없는 신뢰의 눈빛을 보내며 마주 잡은 그의 손을 토닥거렸다.
레베카의 작은 몸짓 하나하나가 전부 그를 위로하는 것만 같았다.
율리안은 조금씩 젖어 드는 눈동자를 황급히 돌렸다.
심장이 꽉 조여 들어왔다. 지금만큼 죽고 싶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율리안은 가슴이 술렁거리는 걸 느끼며 레베카의 손을 좀 더 단단히 쥐었다.
따뜻한 그녀의 손을 잡고 있으면 꼭 햇살을 손에 쥐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