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98화 (98/232)

98.

“예?”

크로아는 제가 잘못 들었는가 싶어 귀를 후벼팠다.

세차게 눈까지 비볐는데도 율리안의 미소는 입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목검을 몇 번 휘두르던 율리안은 별안간 우뚝 제자리에 섰다.

그리곤 여태껏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제 심장에 손을 얹었다.

키스했다.

그것도 레베카가 자신에게 먼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자히드라에게 내 목숨을 바치는 일 따윈 없을 거야. 약조할게.’

키스가 끝난 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숨을 몰아쉬던 레베카가 그에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서 진실이 느껴져 율리안은 안도했다.

하지만 안심되는 것과는 달리 제 심장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거세게 뛰고 있었다.

레베카가 자꾸만 아른거렸다.

제 귀에 맞닿던 그녀의 숨결과 제 입술을 파고들던 그 보드라운 살결이 떠올랐다.

그리고 물기가 채 가시지 않은 그 눈망울까지 생각하자 심장이 미칠 듯이 조여들었다.

“윽…….”

가만히 레베카를 생각하던 율리안이 별안간 가슴을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공작님! 왜 그러십니까?”

크로아는 얼른 제가 앉아 있던 의자를 율리안에게 들이밀었다.

율리안은 의자에 앉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런 그를 크로아가 한껏 걱정을 담고는 쳐다봤다.

“설마…… 가슴에 통증이 있으신 겁니까?”

크로아는 덜컥 겁이 났다.

요하네스 공작들은 이런 식으로 심장 통증을 호소하다 어느 순간 비명횡사하고는 했다.

율리안은 고요한 암흑이 담긴 눈을 들어 크로아를 바라봤다.

안절부절못하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그를 보며 율리안이 입을 열었다.

“요즘 들어…… 심장이 아프더군.”

쿵-

그에 말에 크로아는 거대한 돌덩이가 제 어깨 위로 떨어져 내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아직 후계자가 없었으니 율리안이 죽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아픈 몸을 그대로 방치했다간 식물인간 상태로 후계가 생길 때까지 끔찍한 삶을 이어가야 할 수도 있었다.

크로아는 떨리는 손으로 언제나 품에 지니고 있던 수첩 하나를 꺼내어 들었다.

체니스터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요하네스 공작의 심장병에 관한 대처법이 담긴 비서였다.

그가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비장하게 물었다.

“증상이 어떠십니까.”

율리안은 한층 침울해진 크로아의 얼굴을 한참 훑다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숨겨봤자 증상이 악화될 뿐이었다.

차라리 얼른 증상을 털어놓는 게 해결책이 될 수 있었다.

유능한 집사인 그가 치료법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심장이 두근거릴 때도 있고, 아플 때도 있어.”

“전형적인 심부전증의 전조 증상이군요. 보통 어떨 때 그런 증상이 나타나십니까? 운동을 심하게 했을 때? 아니면 그냥 예고 없이……?”

“누군가를 떠올리거나 만날 때마다 그러더군.”

“아, 예. 누군가를……. 예? 누굴 떠올려요?”

“레베카.”

붉어진 목덜미를 더듬으며 율리안이 말했다.

“레베카를 볼 때마다 심장이 아파 와. 이렇게 꽉 조여들 듯이. 가끔은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통증이 심할 때도 있어. 보통 심부전증에 이런 증상이 동반되나?”

크로아는 수첩을 손에 든 채로 멍하니 율리안을 바라봤다.

그의 침묵이 길어지자 초조해진 율리안이 자못 진지한 얼굴로 크로아에게 되물었다.

“심각해?”

크로아는 율리안의 잔뜩 찌그러진 미간을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껏 제가 완벽하진 못해도 평균 이상의 집사는 된다고 믿었다.

율리안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걸 지켜보며 그는 제 성과에 뿌듯함까지 느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제가 키워낸 건 아주 훌륭한 머저리였다.

‘아주 형편없어. 형편없는 집사야. 크로아 체니스터.’

전대 공작 부인이었던 이벨리나는 죽기 전 크로아에게 편지를 한 통 남겼다.

편지 속에는 크로아에 대한 짤막한 감사 인사와 함께 율리안의 교육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벨리나는 연령대 별로 필수적으로 받아야 하는 교육과 가정교사의 이름까지 세심하게 신경 썼다.

그녀는 율리안이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을 강인한 사람으로 자라길 원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사랑을 모르는 냉혈한이 되길 원했다.

<이 저주받은 가문 때문에 또다시 희생자가 생겨나선 안 되네. 그럴 바에 차라리 이 대에서 끊어버리게. 신부를 맞이하게 해서도 안 되고, 율리안이 사랑에 빠져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게 두지 말게. 내 간곡한 청일세.>

크로아는 이벨리나의 유언 대부분을 철저히 따랐다.

덕분에 율리안은 영민하고 강한 사내로 자랐다.

율리안은 크로아가 별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또래 영애와의 교제를 피했다.

그가 어릴 때는 ‘사랑’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몸에 두드러기가 돋곤 했다.

율리안은 필사적으로 이벨리나의 마지막 유언을 지켰고, 크로아는 그런 그가 안쓰러웠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라는 걸 크로아는 알았다.

때문에 자신도 수절을 하며 그를 도왔다.

자신이 사랑에 빠진다면 율리안에게 감히 사랑을 하지 마라 조언하기 힘들어질 테니까.

그런데 레베카가 나타났다.

크로아는 그녀를 보는 순간부터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다 싶었다.

율리안이 그녀에게 빠져들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거짓이든 진실이든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했고, 율리안이 그 손을 잡아버렸다.

이미 일이 시작된 이상 크로아는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건 언젠가 끝이 날 계약 결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레베카는 복수 이외에는 정말 아무런 욕심이 없는 듯했다.

율리안이 그녀에게 빠져들어도 레베카가 알아서 거절해 주겠지 하고 크로아는 막연한 희망을 가졌다.

이 정도는 저승에 있는 이벨리나도 눈감아 주리라 여겼다.

“크로아. 무슨 생각을 그리 오래 하는 거야? 심각하냐니까?”

율리안이 보채듯이 물었다.

크로아는 최근 율리안의 모습을 떠올렸다.

언제나 그늘이 져 있던 그의 얼굴이 레베카를 만난 뒤부터 환해졌다.

크로아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사랑에 빠진 율리안은 행복했다.

말려야 했다.

말려야 하는데 크로아는 레베카를 바라보는 율리안의 미소를 떠올리면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이벨리나 님.’

밝아진 율리안을 보고 있으면 유모의 장례식 날 서럽게 울던 그 소년이 생각났다.

이 불행한 소년을 기필코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던 그때의 다짐이 떠올랐다.

레베카에게는 미안한 말이었지만, 크로아는 그녀를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율리안이 웃었으면 했다.

율리안이 사랑을 받았으면 했다.

생각을 정리한 크로아가 수첩을 탁, 하고 소리 나게 덮었다.

“큰일 났네요. 불치병입니다.”

“뭐? 진짜?”

“예. 아주 지독한 병에 걸리셨어요. 거, 유모에게 가서 소설 몇 권만 빌려보십시오. 무슨 병인지 금방 아실 거니까요.”

제가 아무리 백번 넘게 이건 사랑이라고 말해봤자 율리안은 고개를 저을 게 분명했다.

그가 스스로 깨달아야 의미가 있었다.

크로아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율리안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소설 속에 나오는 병? 전설 속의 불치병이라는 건가? 그렇게 내 상태가 안 좋아?”

“그게 아니라……. 아, 됐습니다. 나머지는 스스로 알아보세요. 밤이 깊었으니 불충한 저는 이만 쉬러 가보렵니다.”

“잠시만, 크로…….”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크로아는 이미 빠른 발걸음으로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허망하게 텅 빈 연무장에 홀로 남은 율리안은 크로아의 생각을 곰곰이 되새겨 봤다.

“불치병이라니…….”

율리안은 가만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적어도 레베카의 소원을 들어주고 난 뒤에 죽어야 했다.

“유모의 책 안에 정답이 있을 거라고 했지?”

그는 고개를 들어 동쪽 별채를 바라봤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아직 환한 빛이 별채의 창문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유모에게 책을 빌리려면 별채 쪽으로 가야만 했다. 그러다 보면 릴리와 마주칠 수도 있었다.

릴리를 떠올린 율리안의 얼굴에 수심이 내려앉았다.

릴리아나 바니니.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불운의 씨앗.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는 요하네스가의 외모 중 어떤 것도 물려받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릴리는 제 어미와 같은 분홍색 머리에 붉은 눈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니 훗날 그녀가 세상에 나갔을 때 그녀를 요하네스가의 사람이라고 추측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릴리를 처음 봤을 때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릴리는 율리안을 보자 웃음을 터뜨렸다.

그 아이는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율리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율리안은 크로아의 재촉에 마지못해 릴리에게 손가락 하나를 내어주었다.

이제 막 손을 쓰기 시작했다던 릴리는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힘으로 율리안의 손가락을 붙들었다.

부드러운 아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말캉한 아이의 손이 손가락을 죄어들자 율리안은 어떻게 응해야 할지 몰라 굳어 있었다.

자신이 조금만 움직여도 이 작고 여린 생명체가 부서져 버릴 것만 같았다.

릴리의 해맑은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율리안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이 떠올랐다.

‘이 아이를 지켜야겠다.’

추잡한 요하네스 공작가와 상관없는 아이로 키워야겠다.

어차피 여자인 이 아이가 후계자로 지목될 리는 없었다.

릴리가 아들만 낳지 않는다면 요하네스 공작의 모든 저주를 율리안 혼자 짊어지고 살아갈 수 있었다.

이대로 대가 끊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저주를 풀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릴리를 먼발치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릴리는 하루 종일 울다가도 율리안을 보면 울음을 그치고 그에게 손을 뻗곤 했다.

그게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어느새 릴리는 음침한 요하네스 공작 성과 어울리지 않는 해사한 아이로 자랐다.

정원에서 그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올 때면 공작 성의 모든 사람이 미소를 짓곤 했다.

율리안도 마찬가지였다. 릴리는 어느새 요하네스 공작가의 보물이 되었다.

그런 소중한 아이를 율리안은 쉽게 내보낼 수 없었다.

‘만약 밖에서 비명횡사라도 한다면? 누가 납치라도 하면 어떡해? 안심은 금물이다.’

처음엔 걸음마를 뗄 때쯤 그녀를 죽은 걸로 위장해 밖으로 내보내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 기간이 점차 늘어다더니 결국 그녀를 성인이 될 때까진 성안에서 보호하기로 했다.

소중했다. 제가 증오해 마지않던 아버지가 남긴 흔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릴리는 사랑스러웠다.

그녀를 안전하게 지키고 싶었다.

율리안은 잘 쓰지 않던 별채를 화려하게 꾸미고 그 안에 릴리의 방을 꾸며 놓았다.

그리고 훗날 릴리가 자신을 그리워하지 못하게 그녀와 말조차 섞지 않았다.

아무런 추억도 만들지 않았다.

그리움만큼 끔찍한 감정은 없었다. 그런 걸 릴리가 겪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율리안은 요하네스 공작가의 가장 소중한 보물을 별채에 가둬두었다.

어느새 별채에서 새어 나오던 불이 꺼졌다.

릴리가 잠이 든 모양이었다.

천사처럼 잠든 아이의 얼굴을 그려보던 율리안의 눈이 깊게 침잠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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