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날씨 한번 더럽게 좋군.”
늦은 가을장마에 요 며칠간 부슬비가 내렸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신이 축복을 내린 듯 거짓말처럼 날씨가 맑았다.
따사로운 햇볕에 제플린이 손차양을 하고선 눈살을 한껏 찌푸렸다.
“저도 가고 싶었는데…….”
두 하녀에게 부축을 받으며 알리시아가 울상인 채로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막 마차에 오르려는 제플린을 배웅했다.
제플린은 알리시아의 둥그런 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맞춤을 했다.
“산달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무리하면 안 돼. 부인의 건강이 우선이니 여기서 편히 쉬고 있어. 돌아올 때 후한 선물을 사오지.”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제플린의 공개적인 애정 행각에 알리시아가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이제 이런 것쯤은 익숙해질 법도 한데 제플린이 그녀를 백작 부인처럼 대할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근사한 그의 얼굴이 자신을 향할 때면 알리시아는 어쩔 수 없이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되어버렸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제플린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사랑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심장이 뛰는 건 인간이 본성일 뿐이었다.
그녀는 제플린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가지고 싶었다.
알리시아는 배를 쓰다듬었다.
의사의 말로는 배 모양을 봐서는 완벽한 딸이라고 했다.
그녀는 제플린을 닮은 딸이 태어났을 때 자신이 얻을 것을 생각했다.
상상만 해도 미소가 저절로 떠올랐다.
“조심히 잘 다녀오셔야 해요!”
알리시아는 멀어지는 마차를 향해 손수건을 흔들었다.
제플린은 마차의 창문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어 자상하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창문이 닫히자 내내 입가에 머물던 그의 웃음도 사라졌다.
‘어떻게 얻은 혼자만의 시간인데 알리시아와 동행할 순 없지.’
알리시아는 수다스러웠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귀가 쉴 틈이 없어 머리가 울렸다.
오랜만의 고요함을 누리다 보니 피로가 몰려왔다.
제플린은 짙은 한숨을 내쉬며 푹신한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었다.
기억을 잃은 상냥한 제플린을 연기하는 건 무척이나 고단했다.
성미에도 안 맞는 친절한 척을 하느라 언제나 입안이 바싹 메말랐다.
그래도 그 덕분에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주인의 냉소적인 얼굴만 맞대던 그들은 제플린의 상냥한 미소와 나긋한 말투에 넋이 나가곤 했다.
아홉 번 착했던 이가 한 번을 나쁘게 굴면 욕을 먹었다.
하지만 아홉 번 나쁜 짓을 저질렀던 이가 한 번을 착하게 굴면 그 사람은 착한 사람으로 대접받는 법이다.
아름다운 주인이 천사처럼 굴자 고용인들은 제플린에게 쉽게 입을 열었다.
대수롭지 않은 그들과의 대화에서 제플린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다.
옥타비오는 제 생각보다 더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백작가의 어떤 일을 들추어 봐도 그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심지어 백작인 자신이 모르는 일들도 모두 옥타비오의 지시로 이루어진 일들이었다.
데본셔가는 그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제플린이 만든 사냥개들도 옥타비오의 소관이었다.
제플린이 사냥개에게 보고받는 것들은 이미 옥타비오가 걸러낸 정보였다.
제플린의 시선이 밖을 향했다.
이렌시아의 평화로운 풍경이 그의 눈 안에 아낌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일전 은밀하게 만남을 가졌던 약재상의 말이 떠올랐다.
‘이것들은 기억력을 감퇴시키는 독초들로 배합된 겁니다. 대체 어디서 이런 걸 구하셨습니까? 시중에선 유통이 금지된 것들인데…….’
‘이걸 계속 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 백치가 될 겁니다.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멍청이가 되는 것이지요.’
향초의 부스러기가 행여나 가게 안에 남을세라 약재상은 서둘러 종이를 싸맸다.
질겁하던 약재상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했다.
분명 옥타비오는 그 향초가 기억을 되찾아 주는 효능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오히려 기억을 감퇴시키는 것이라니. 게다가 남용하면 백치가 될 수 있다고?
제플린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 보니 자신은 이미 백치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레베카를 쫓아버린 것도 옥타비오의 짓이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사제가 찾아왔었지…….”
레베카가 신병에 걸렸단 걸 확인한 사제는 옥타비오가 데려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마치 준비했다는 듯이 레베카가 불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레베카가 아파도 자신은 그녀와 이혼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그녀처럼 아름다운 아이를 얻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시기적절하게도 그가 그런 다짐을 하자마자 레베카의 불임 사실이 알려졌다.
알리시아가 레베카에게서 받은 찻잎이 결정적인 증거였다.
그리고 그건 파비올라가 레베카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우연치고는 너무나 이상해…….”
어느새 허리를 곧게 새운 제플린의 눈빛이 날카롭게 좁혀들었다.
아무리 파비올라가 생각이 없다고 한들 들키면 내쫓길 게 분명한 일을 독단적으로 꾸밀 리가 없었다.
알리시아가 그 배후로 떠올랐지만 제플린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 멍청한 계집이 그런 수를 쓸 리가 없어.”
남은 건 옥타비오와 그레이스 하녀장이었다.
그레이스는 레베카와 이혼한다고 했을 때 거의 졸도하듯 했다.
그때의 그레이스의 모습에선 어떤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용의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의연한 태도로 있던 옥타비오만이 남았다.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가는군.”
아무래도 이상하다 생각했다.
레베카가 아무리 영민하다고 한들 자신을 속일 만큼은 못 되었다.
애초에 그녀는 아름다움으로 존재의 몫을 다한 여인이었다.
똑똑할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제플린은 레베카가 백작 부인으로 있는 동안 책을 멀리하도록 했다.
그런 레베카의 머리에서 주도면밀한 계획이 나올 리가 없었다.
아무리 율리안이 개입했다 하더라도 그 또한 애송이일 뿐이었다.
제플린은 자신에게 닥친 비극의 원인이 옥타비오라고 결론을 내렸다.
옥타비오가 율리안과 손을 잡고, 자신이 레베카를 버리도록 유도한 것이 분명했다.
일전의 가을 무도회에서 레베카가 손쉽게 서재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도왔기 때문이었지 않을까.
서재의 침입자를 찾는 데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던 옥타비오가 떠올라 제플린은 혀를 찼다.
“하!”
옥타비오는 이따금 자신이 레베카를 언급할 때마다 미간을 찌푸리곤 했다.
그리고 레베카와 이혼을 고민하던 자신에게 옥타비오는 끊임없이 레베카를 버리라고 속삭였다.
그게 신호였음을 왜 이제야 알아차렸을까.
아마 그에게 레베카는 방해물이었겠지.
이 제플린 데본셔 백작을 한 번에 집어삼키려는 그의 음흉한 계획을 방해하는 성가신 가시 같은…….
“옥타비오, 네가 감히!”
분노에 찬 제플린이 마차의 벽을 세게 내리쳤다.
마차가 부서지는 듯한 둔탁한 굉음이 들려오자 마부가 뒤를 돌아봤다.
“백작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아닐세. 이쪽은 신경 쓰지 말고 자네 일이나 똑바로 하게.”
두세 번 양보해서 옥타비오가 데본셔를 장악하려고 했다는 건 그래도 용서할 수 있었다.
애초에 옥타비오에게 그 정도의 권한을 쥐어준 건 자신이었다.
그러니 자신의 과오라 생각하고 다시 바로잡으면 그만인 일이었다.
하지만 옥타비오는 레베카를 건드렸다.
자신의 아름다운 레베카를 다른 사내의 품에 안겨줬다.
그리고 다른 사내에게 안긴 레베카는 제 뺨을 내리칠 정도로 변해버렸다.
아직도 그녀가 손찌검했던 곳에 통증이 남아 있는 듯했다.
옥타비오는 레베카에게 흠집을 냈다. 그 아름다운 얼굴에 자신을 향한 분노를 심었다.
그러니 옥타비오도 이제 단죄의 대상이었다.
제 것을 탐하는, 없애야만 하는 존재.
“믿고 따랐던 게 독이 되어버렸군.”
충혈된 제플린의 눈동자가 시큰하게 젖어들었다.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묘한 액체가 부릅뜬 그의 눈에 고였다.
‘제플린. 너 자신 말고는 아무도 믿지 말거라. 심지어 이 아비도 믿지 마라.’
문득 자킴 데본셔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빌어먹을 아버지의 말이 맞을 때도 있군.”
인간은 제 탐욕만을 소중히 여기는 존재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멍청하게 그동안 옥타비오를 신뢰했다.
한때는 그가 아버지 같다는 생각도 한 적이 있었다.
제플린은 밀려드는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젠장!”
제플린은 옆에 얌전히 놓여 있던 쿠션을 앞으로 집어 던졌다. 그 탓에 쿠션 위에 놓여 있던 청첩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율리안 요하네스 공작의 결혼식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신부의 이름이 없는 기묘한 청첩장이었다.
그동안 제플린은 율리안의 약혼녀에 대해 대대적으로 조사했으나 끝내 정체를 알아내지 못하였다.
율리안의 약혼녀가 레베카일 거라는 그의 심증만이 유일한 단서였다.
아마 자신이 레베카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한 것도 옥타비오가 방해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제플린은 부들거리며 주먹을 쥐었다. 그의 손아귀 안에서 빳빳한 청첩장이 속절없이 구겨졌다.
청첩장은 신분 확인용으로, 예식장에 들어갈 때 제출해야 했다.
그런 청첩장을 훼손하는 건 친히 자신을 초대한 신랑과 신부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하지만 제플린에게 그런 것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레베카를 되찾아야겠다는 다짐과 옥타비오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 차서 다른 생각이 끼어들 겨를이 없었다.
그가 식장에서 레베카의 손목을 잡고 뛰쳐나와야 하나 고민하려던 찰나에 마차가 멈춰 섰다.
마부가 크게 소리쳤다.
“도착했습니다! 라본느 살롱입니다!”
* * *
“안 됩니다. 결혼식 전에 신부의 모습을 보면 재수가 없는 법입니다.”
레베카가 단장하고 있는 방으로 들어서려는 율리안을 칸나가 단호하게 막아섰다.
“괜찮아. 나는 행운이 넘치는 요하네스 공작이야. 그깟 불운쯤 내 바다와 같은 행운에 파묻혀…….”
“안 됩니다.”
단호하게 그의 말을 일축한 칸나는 아예 팔짱까지 끼고서 문고리 앞에 섰다.
태산처럼 우뚝 선 그녀의 단단한 몸짓에 율리안은 아쉬운 소리를 하며 뒤돌아서야 했다.
“거 되게 빡빡하게 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