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억새밭에서 레베카와 그 일이 있은 뒤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지난번 첫 키스 때처럼 일부러 피한 건 아니었다. 결혼식 준비로 각자의 할 일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늘만을 기다리며 율리안은 설렌 가슴을 진정시켰다.
한데 막상 결혼식 날이 되니 레베카의 얼굴은커녕 그 고운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잔뜩 미련이 남아 발을 질질 끌고 있는 율리안에게 크로아가 달려왔다.
“아니, 공작님! 여기서 뭘 하십니까? 맙소사. 아직 넥타이도 매지 않으셨잖아요! 곧 손님들이 들이닥칠 텐데요?”
크로아의 호통에 율리안은 불쾌한 듯 얼굴을 구겼다.
그러나 어차피 레베카를 볼 수 없다면 딱히 할 일도 없었으므로 그는 순순히 크로아를 따르는 걸 택했다.
황급히 사라지는 크로아와 율리안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칸나는 혀를 끌끌 찼다.
제국의 공작이라는 자가 저렇게 채신머리가 없다는 게 아직까지도 믿기지 않았다.
‘뭐, 레베카 님을 보고 싶어 하는 건 이해가 가지만…….’
칸나는 슬쩍 문을 열어 이제 막 베일을 쓰기 시작한 레베카의 뒤태를 바라봤다.
환한 햇빛이 가득한 방 안에 순백의 베일이 은사처럼 휘날렸다.
마치 웨딩드레스와 한 몸인 것처럼 새하얀 피부를 빛내는 레베카가 그 가운데에 고고하게 서 있었다.
전신 거울에 비쳐 보이는 레베카는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거울 속으로 칸나와 눈이 마주치자 레베카가 그녀에게 살짝 웃어 보였다.
당황한 칸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곧바로 문을 닫아버렸다. 심장이 쿵쾅 소리를 내며 제멋대로 뛰었다.
‘거기서 그렇게 예쁘게 웃으시면 저더러 어떡하라는 겁니까. 레베카 님.’
당황한 칸나의 눈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입술 위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슬며시 번졌다.
언뜻 보았지만 레베카는 확실히 행복해 보였다.
* * *
마가렛은 예식장으로 꾸민 살롱의 정원을 샅샅이 훑어보고 있었다.
이건 결혼식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라본느 살롱의 개업식이기도 했다.
자그마한 실수도 용서할 수 없었다.
때문에 마가렛은 평소보다 한층 더 예민해진 상태로 결혼식의 전반적인 상황을 진두지휘했다.
잔뜩 긴장한 마가렛을 본 직원들도 덩달아 긴장했다.
그들은 허리를 바짝 세우곤 까다로운 귀족 손님들의 마음에 들도록 최선을 다했다.
게다가 이건 소중한 레베카의 결혼식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결혼식으로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 라본느의 직원들의 사기를 드높였다.
다행히 그들의 노력이 허사는 아니었는지 지금껏 싫은 소리 한 번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다들 이런 곳은 처음 본다고 감탄하며 살롱을 둘러보기 바빴다.
개중에는 벌써부터 율리안에게 투자를 하고 싶다는 사람이 있었다.
“오늘은 살롱의 개업식이 아니라 제 결혼식입니다. 사업에 관한 일은 다음에 차차 하시도록 하죠.”
율리안은 예의 있게 거절했다.
하지만 그의 거절과는 달리 직원 한 명이 살롱의 팸플릿이 담겨 있는 바구니를 들고서 신사의 뒤를 따랐다.
곧이어 직원은 투자를 제안한 하객에게 친절히 팸플릿을 건네며 살롱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직까진 완벽하군.’
율리안은 제가 고안한 예식장을 바라봤다.
예식장은 자신이 계획한 ‘가을 속의 봄’이라는 결혼식 주제에 딱 알맞은 전경이었다.
빛의 마석을 두른 가을 벚나무가 기둥처럼 버진로드를 따라 심어져 있었다.
만개한 벚꽃을 자랑하는 벚나무의 가지가 양쪽에서 맞닿아 마치 거대한 아치처럼 보였다.
하객들은 웅장한 정원 크기에 놀라고, 제국에서 나지 않은 가을 벚꽃이 저렇게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랐다.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흘러나오자 가을 벚나무를 활짝 피게 만든 일등 공신 유스타프가 뿌듯한 얼굴로 벚나무의 거친 나무줄기를 쓸었다.
사랑스럽게 벚나무를 바라보던 그의 눈길이 어느 여인의 뒤를 좇았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직원들에게 일을 지시하는 동시에 하객들을 인도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마가렛이었다.
잠시 짬이 났는지 마가렛은 구석을 찾아갔다.
유스타프는 저도 모르게 나무 뒤로 숨어서 마가렛을 바라봤다.
마가렛은 자신을 주목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묶기 위해 잠시 머리를 풀었다.
그녀의 고동색 머리칼이 출렁이며 허리까지 내려왔다.
올림머리를 오래 한 탓에 그녀의 풍성한 머리칼에는 유려한 곡선이 생겨 있었다.
그 광경에 유스타프는 저도 모르게 코를 움칫거렸다.
봄날의 나뭇잎 같은 연두색 눈동자를 가진 그녀에게서 청량한 물푸레나무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어딘가에서 날아 들어오는 시선을 감지한 마가렛이 잔뜩 경계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봤다.
‘이크.’
유스타프는 화들짝 놀라며 나무 뒤로 완전히 몸을 숨겼다.
마가렛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잠시 사위를 살피다가 이내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감히 뒤돌아볼 생각조차 못했다.
유스타프는 방금 자신이 느낀 감정이 낯설어 안경 속에 담긴 은회색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한편, 유스타프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마가렛은 예식장으로 입장한 하객들을 각자의 좌석으로 바삐 안내했다.
어느 각도에서나 버진로드를 바라볼 수 있도록 의자를 세심하게 배치한 덕분에 거대한 벚나무가 하객들의 시야를 가리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자신의 자리를 찾은 하객들은 의자를 장식하고 있는 각양각색의 가을꽃을 보며 즐거워했다.
다만 버진로드에 그 흔한 흰색 광목천조차 깔려 있지 않았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잔디가 무성한 버진로드가 조금 휑하게 보였다.
하지만 곧 그들의 의문점은 그윽하게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묻혔다.
제국 최고의 악단이라 불리는 소일베네트 악단이었다.
감미로운 음악 소리에 기쁨을 감추지 못한 하객들이 수군거렸다.
“웃돈을 주고서도 소일베네트의 공연을 보지 못하는데, 대체 어떻게 섭외한 걸까요?”
“그 요하네스 공작이지 않나. 요하네스 공작의 결혼식에 연주를 맡는다는 건 소일베네트 악단 입장에서도 영광스런 일이었겠지.”
“어쩜……. 이런 예식장은 태어나서 처음 봐요. 라본느 살롱이라고 했나요? 내후년에 제 딸도 결혼식을 하는데 이런 곳에서 하면 좋겠군요.”
“부인, 이것 좀 보세요. 여기 직원이 건네준 팸플릿인데, 대관도 한다네요. 비용만 지급한다면 원하는 주제에 맞게 꾸며준다는데요? 우리가 하나하나 신경 쓸 일이 없다니 꽤 편하겠어요.”
곧 혼사를 치를 부모와 커플들의 관심이 라본느 살롱을 향했다.
보통 결혼식 시작을 기다리는 시간이 가장 지루한 법이었지만, 율리안의 하객들은 간단한 다과를 즐기며 팸플릿을 보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그 와중에 우렁찬 트럼펫 소리가 예식장에 울려 퍼졌다. 하객의 입장을 알리는 직원이 크게 소리쳤다.
“제국의 태양이신 자히드라 알폰소 로티카나 황제 폐하와 제국의 달이신 벨로나 드네비아 로티카나 황후 폐하이십니다!”
저마다의 유희를 즐기고 있던 하객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와 황후에게 인사를 올렸다.
자히드라는 어진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라는 손짓을 했다.
율리안이 직접 자히드라와 벨로나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황제와 황후의 행보를 좇던 하객들은 곧이어 경악에 찬 얼굴로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이곳이 우리의 자리인가? 흠, 의자가 아주 마음에 드는구만. 그렇지 않소, 황후?”
“예. 화려한 꽃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신경을 많이 쓴 것 같군, 율리안 요하네스 공작. 내 경의 안목을 다시 봤어.”
특별히 황실을 상징하는 붉은 꽃으로 장식된 커다란 의자를 쓸어내리던 벨로나가 칭찬을 쏟아냈다.
율리안은 예를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과찬이십니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의 존엄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새 분위기가 많이 변한 것 같구나. 역시 연인을 만난 사내는 부드러워지는 법이군. 어서 빨리 경의 신부를 만나고 싶은데. 요새 그 이야기로 황궁도 무척 시끄러워.”
벨로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캐러멜처럼 부드러운 갈색 머리에 차분한 청회색 눈동자를 가진 벨로나는 누구나 호감을 품을 만한 다정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날카로운 자히드라의 인상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율리안은 벨로나가 레베카의 정체를 아는지 궁금해 자히드라를 빤히 쳐다봤다.
자히드라의 눈치를 보아 그와 황후는 그런 은밀한 비밀까지 공유하는 사이는 아닌 듯했다.
자히드라가 헛기침을 하고는 화제를 돌렸다.
“그래, 내 오늘 자네의 아버지 역할을 하면 되겠는가?”
자히드라와 벨로나의 좌석은 신랑의 부모가 앉는 곳에 있었다.
양친이 모두 없는 율리안을 위한 자히드라의 특별한 배려였다.
영광도 이런 영광이 없었다.
하객들은 각별한 사이처럼 담소를 주고받는 율리안과 황제를 번갈아 살폈다. 저절로 침이 삼켜졌다.
“황제께서 요하네스 공작에게 공을 들이시더니 결국 자신의 편으로 들이셨나 봅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요하네스 공작이 황제 폐화와 황후 폐하를 저 자리에 모실 이유가 없겠지요. 평소에 황제께 오만불손하던 그가 아닙니까?”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원. 그렇다면 요하네스 공작이 신전을 버리고 황제께 돌아섰다는 뜻이요?”
“쉬잇. 말조심하시오. 저기 교황 성화께서 계시잖소. 이러다간 우리도 데본셔 백작처럼 신의 기사단에 끌려갈지도 모르는 일이오.”
일전 데본셔 백작의 무도회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 하객들이 한꺼번에 입을 닫았다.
그들은 하얀 꽃으로 장식한 연단에서 주례사를 준비하고 있던 데스라치노 교황을 바라봤다.
애써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는 그의 정신이 온통 황제와 율리안에게로 향해 있다는 건 누가 봐도 자명했다.
그는 이 상황이 꽤 혼란스러웠는지 연신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꾹꾹 눌러 닦고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하객들을 맞으러 가보겠습니다.”
황제와 황후에게 인사를 올린 율리안이 입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영애들의 탄복 섞인 외침이 흘러나왔다.
턱시도를 차려입은 율리안의 모습은 여느 때보다 근사했다.
무미건조하던 그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 있었다.
위험한 사내의 호르몬을 풍기던 그가 오늘은 제국에서 제일가는 신사가 되어 있었다.
사랑에 빠진 그는 한층 더 매혹적으로 보였다.
그를 평소에 흠모하던 영애들은 아린 가슴을 붙잡고 앓는 소리를 냈다.
이를 부득 갈며 그 대단한 신부가 누군지 봐야겠다고 분노하는 영애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