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율리안! 이까짓 서신 한 통으로 모든 사태를 설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하객들을 맞느라 정신없는 율리안에게 라트라니스 공작이 다가왔다.
그는 율리안이 보냈던 서신을 흔들며 짜증을 표출했다.
원래도 험악했던 그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지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영문 모를 공포에 어깨를 떨어야 했다.
“카림!”
그의 분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율리안은 두 팔 벌려 카림을 맞았다.
율리안이 자신의 등을 쳐대며 다정하게 포옹해 오자 카림이 기겁을 하며 그를 밀쳤다.
“더럽게 왜 이래. 너 미쳤어? 결혼한다더니 아주 정줄을 놓았군 그래.”
둘의 우애가 조금 깊다고는 하나 이런 식의 우정 표현은 있었던 적이 없었다.
카림의 불쾌한 기색을 깔끔하게 무시한 율리안은 그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좋은 날에 그렇게 열 낼 것 없지 않나. 카림, 네가 오늘 해줘야 할 일이 있어.”
“날 그딴 식으로 취급하고선 부탁까지 한다고? 뻔뻔하기 그지없군.”
“언제는 뻔뻔한 내 태도가 재밌다며. 그러지 말고, 보수는 넉넉히 챙겨줄 테니 부탁 좀 들어줘.”
“됐어. 우리 영지가 아무리 궁해도 고귀하신 요하네스 공작의 돈은 안 받아.”
카림은 볼멘 얼굴로 율리안의 팔을 쳐냈다. 그리고 예식장을 둘러보며 비아냥거렸다.
“화려하긴 더럽게 화려하군. 꽃향기에 속이 울렁거려. 율리안 너도 역겨운 수도 사람이 다 됐군 그래.”
“연금술사를 줄게.”
“뭐?”
율리안의 제안에 그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던 카림이 뒤를 돌아다봤다.
연금술사는 귀한 재원이었다.
연금술 연구에는 많은 재물이 필요했기에 연금술사를 후원할 수 있는 건 손에 꼽힐 정도로 부유한 귀족들뿐이었다.
연금술사를 후원하는 귀족들은 연금술사가 만든 물건이나 기술을 되팔아 커다란 이익을 챙겼다.
연금술사 한 명만 있어도 삽시간에 재산을 불릴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귀족들은 연금술사를 부리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라트라니스 공작 또한 연금술사를 탐냈으나, 그의 가문은 하릴없이 놀기만 하는 수많은 병사를 먹여 살리느라 궁핍했다.
게다가 그가 있는 북부는 춥고 거친 산지가 많아 농사를 짓기에도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다.
자히드라는 그에게 제국 최대의 군사권을 주었지만 재산은 주지 않았다.
황제는 병사들이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의 식량만을 지원하며 그를 견제했다.
그러니 연금술사를 주겠다는 율리안의 제안은 카림을 혹하게 할 만했다.
지금이야 부르는 게 값인 귀한 몸이 되었지만, 자연의 법칙을 거스른다고 하여 연금술사가 이단으로 박해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일찌감치 연금술사의 가치를 알아챈 선대 요하네스 공작이 그들을 신전으로부터 보호했다.
덕분에 요하네스 공작가에 충성을 맹세한 연금술사의 계보가 지금껏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황실에 소속된 연금술사보다 요하네스 공작가에 소속한 연금술사가 배는 더 많았다.
율리안은 공작가 소유의 연금술사들을 빼내어 가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신전으로부터 들어오는 약간의 수입을 제외하면 연금술사들이 벌어들이는 돈이 공작가 재산의 전부였다.
요하네스가의 엄청난 부가 연금술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전에게서 독립된 유일한 자금이었기에 율리안은 연금술사들에게 심혈을 기울였다.
연금술사들 또한 요하네스 공작가를 떠날 이유가 없었다.
전대미문의 거대한 연금술탑을 지어주며 자신들의 연구를 아낌없이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렇게 달라고 할 땐 코웃음 치더니, 아쉬운 게 생기니 연금술사를 주겠다고? 하. 난 우리가 친우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렇게 생각한 건 나뿐이었군. 자네는 나를 장터에서 흥정할 수 있는 상인처럼 생각했나?”
“인생은 원래 흥정이야. 카림. 그게 친우 사이여도 말이야.”
“날 친우로 여긴 적이 있기는 한 건가?”
연금술사를 주겠다는 말이 오히려 카림의 화를 더 돋운 모양이었다.
율리안은 카림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그를 몰아 인적이 드문 곳으로 데려갔다.
“내가 그따위로밖에 말을 못한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상황이 급박했어. 한 번만 날 도와줘. 자네 말곤 내가 믿고 맡길 만한 적임자가 없어.”
율리안이 자신을 믿는다는 소리에 무슨 감언이설로 꾀어도 화를 풀지 않겠다고 생각한 카림의 눈이 조금씩 쳐지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카림의 조금 호의적인 눈빛에 율리안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더욱더 자그마한 목소리로 카림에게 속삭였다.
“한 가지 비밀을 알려주지. 내 신부는…… 레베카 오벨리아야. 한때 레베카 데본셔였던.”
“레베카 데본셔라고? 그 마네킹 같은 여자? 얼마 전에 이혼했다고 들었네. 자네 취향이 아름다운 이혼녀, 뭐 그런 쪽이었나?”
카림이 레베카를 마네킹이라고 지칭하자 율리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도 얼마 전까지 레베카를 그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를 살아 있는 시체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사람 아니야. 레베카는 그 누구보다 생기가 넘치고 지혜롭고 또…….”
마치 변명하는 것처럼 율리안이 레베카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런 그를 찬찬히 살피던 카림은 세상에서 가장 기이한 것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한참 율리안의 레베카 찬가를 듣던 카림이 입을 벌렸다.
“그녀를 사랑하나?”
“뭐?”
“아니, 무슨 머저리 같은 얼굴을 하고 있기에.”
“자네도 날 잘 알잖아. 내가 사랑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분명 그럴 리가 없었는데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자마자 레베카가 눈앞에 떠올랐다.
하지만 곧 그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율리안. 너는 사랑에 빠지지 마라.’
그런 말을 듣고 자란 자신이 사랑 따위를 할 리가 없었다.
지금 레베카에게 느끼는 감정은…… 그래, 소유욕이었다.
너무나도 소중하고 진귀한 것을 가지고 싶어 안달이 난 그런 상태일 뿐이었다.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고 싶을 만큼 레베카가 탐이 났기에 머리가 잠시 굳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레베카 앞에만 서면 아기가 된 듯 멍청하게 행동하고 그녀에게 온갖 것들을 안겨주고 싶은 것이었다.
그녀를 소유하고 싶다는 욕구에 그만 미쳐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게 설명이 된다.
어떤 물건에 푹 빠졌을 때의 자신은 끼니를 거를 만큼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유한다는 게 대체 뭐지?’
보통 결혼한 부부가 서로를 소유했다고 표현하기는 했다.
하지만 자신도 이제 레베카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자신도 이제 그녀를 소유하게 되는 건가?
아니, 애초에…….
‘사람을 소유할 수가 있나?’
조각처럼 잘 다듬어진 율리안의 얼굴이 혼란에 빠졌다.
그 때문에 그는 반푼이처럼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율리안!”
카림이 그를 세차게 흔들어댔다. 혼돈이 가득한 율리안의 흐리멍덩한 눈이 차차 이채를 되찾기 시작했다.
“아. 미안하네. 잠시 딴생각을 했어.”
“요새 너 진짜 이상하다는 건 알아?”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것 같긴 하군……. 어쨌든 요점은 말이야. 데본셔 백작을 자네가 막아주었으면 해.”
“내가 왜.”
율리안은 고집스럽게 다물고 있는 카림의 굳은 입매를 바라보았다.
카림 라트라니스가 처음 자신에게 다가왔을 때 율리안은 그저 귀찮기만 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고 율리안은 @다른 이들과 달리 가식 없이 자신을 대하는 카림이 점차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요하네스 공작이 아니라 율리안 그 자체로 바라봤다.
만약 그에게 요하네스 공작가의 저주가 없었더라면 둘도 없는 친구로 지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주는 존재했고, 율리안의 세상에서 친밀한 관계는 사치였다.
그와 절친한 사이가 된다면 자신이 죽고 난 후에 카림은 분명히 괴로워 할@괴로워할 게 분명했다.
율리안은 죽고 난 뒤 누군가가 자신을 그리워할 거라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었다.
때문에 그는 카림과 적당한 선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변했다.
그에겐 레베카가 있었다. 자신의 저주를 풀어 줄 구원자가 희망을 가져왔다.
율리안은 카림을 향해 웃어 보였다.
제게 언제나 즐거운 일을 가져다주던 카림에게 한 번쯤 지어보고 싶던 표정이었다.
“사냥을 가자.”
“사냥……?”
“그래. 항상 나와 가고 싶어 했잖아. 어디가 좋을까. 그래, 내 영지에 있는 하르츠 숲이 좋겠어. 가을마다 사나운 곰들이 민가를 습격하거든. 우리라면 그 정도는 쉽게 잡을 수 있지.”
‘우리라고?’
카림의 붉은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가 제게 미소를 보인 것도 놀라웠는데 우리라고 지칭하기까지 했다.
카림은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애써 내렸다.
“거기에 연금술사까지 주는 거 잊지 마.”
“약조하지.”
“좋아. 그럼 데본셔 백작은 어디 있지?”
“아직 오지 않았어.”
“그렇게 싫다면서 왜 초대한 거야.”
“보게 해야지.”
호의적으로 웃고 있던 율리안의 얼굴이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북부의 겨울보다 더 서늘한 기운이 율리안의 눈 위에 떠올랐다.
“제가 잃어버린 게 뭔지 정확히 알게 해줘야지. 그래서 후회하고 또 후회하게 만들어야지. 그리고 그걸 되찾으려 할 때…….”
율리안은 제 구두 속을 한참 전부터 탐하고 있던 벌레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발을 털었다.
그리고 풀 사이에 떨어진 벌레를 조용히 하지만 정확하게 짓이겼다.
“짓밟아 줘야지. 다시는 그 누구도 가둬둘 수 없도록.”
카림은 제 손등에 돋은 소름을 만졌다. 번뜩이는 율리안의 황금빛 눈동자는 실로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예전보다 한층 더 짐승의 것이 된 그의 눈을 마주하자 전율이 일었다.
카림이 비뚜름하게 웃었다.
“그렇게 재밌는 거라면 진작에 말하지. 지금 사냥을 하자는 거잖아?”
“같이 할 텐가?”
“친구의 부탁이라면.”
카림이 손을 내밀었다.
율리안은 잠시 그의 손을 바라보다가 이내 낚아채듯 그와 악수했다.
“그래. 친구에게 부탁 하나 할게.”
친구.
율리안이 한 번 더 다시 자신을 그렇게 불렀다.
카림의 얼굴 위로 숨길 수 없는 미소가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