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마지막으로 드레스를 점검한 산드라가 감격스럽다는 얼굴로 레베카를 바라봤다.
“너무 완벽해서 할 말을 잃었습니다. 어쩜 제가 생각한 그대로이실까요…….”
산드라가 두 손을 입에 가져다 댄 채 눈물을 글썽였다.
제가 만든 웨딩드레스를 입은 레베카는 한 폭의 그림 그 자체였다.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평범한 장사치가 아니라 예술가처럼 느껴졌다.
“아닙니다. 다 산드라의 능력이 뛰어난 덕분이에요.”
짐짓 겸손하게 레베카는 자신을 향한 치하를 거절했다.
하지만 빈말은 아니었다. 산드라의 웨딩드레스는 그 어떤 사람이 입더라도 여신처럼 보일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그럼 이제 이 어미가 네 머리에 티아라를 올려줄 차례로구나.”
레베카는 다나에의 손에 들린, 가보로 내려온 티아라를 가만히 바라봤다.
결혼식 날 가문의 역사가 깃든 티아라를 딸의 머리에 씌워 주는 건 제국의 오랜 전통이었다.
어머니의 축복과 행운을 딸에게 넘겨준다는 뜻깊은 행위였다. 다나에는 친정에서 빌려온 티아라를 만지작거렸다.
다나에의 친정인 에실 자작가의 티아라에는 쌀알만 한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티아라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기품이 흘러넘쳐 마치 다나에를 보는 듯했다.
“이걸 또다시 네 머리에 얹어주는 날이 오다니…….”
다나에의 낯빛이 검게 흐려졌다.
그녀는 제플린과 레베카의 결혼식 날에도 똑같이 이 티아라를 레베카의 머리에 올려줬었다.
그때는 덕담 대신 우려 섞인 말을 건넸었지만 이제는 달랐다.
레베카가 살짝 다리를 접자 다나에가 잔잔히 미소를 지으며 레베카의 머리에 티아라를 얹었다.
산드라가 얼른 달려와 핀으로 티아라를 고정했다.
그녀가 레베카의 머리를 마지막으로 만지는 동안 다나에는 레베카의 양 어깨를 부드럽게 잡았다.
“지난 일은 다 잊고, 이제 네가 행복해지는 일만 생각하거라.”
다나에는 잠시 머뭇거리며 다음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아내의 의무, 어머니의 의무, 공작 부인의 의무 그런 것 따위 생각하지 말고 네 행복을 최우선 순위에 둬. 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아이야. 내 평생의 소원은 그것뿐이란다.”
이런 말을 해줬어야 했다.
지난 결혼식에서도 아무리 제플린이 돼먹지 못한 작자라 하더라도 새 출발을 앞둔 딸에게 다정한 말을 건넸어야 했다.
그 짙은 후회가 여태껏 남아 잊을 만하면 다나에를 아프게 찌르곤 했다.
레베카는 멍하니 다나에의 빨개진 코끝을 바라봤다.
다나에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이를 가지지 말라고 악담처럼 퍼붓던 그날의 일을 후회하는 거겠지.
하지만 후회 섞인 덕담이라도 레베카는 마냥 좋았다.
결혼 준비를 하는 내내 제플린과 했던 결혼식이 떠올랐다.
데본셔 백작 부인이 되는 걸 모두 앞에서 공표하던 그날이 집요하게 발목을 잡아끌었다.
그때의 자신은 행복하리라 의심조차 하지 않은 채 기쁨에 젖어 있었다.
지금은 전혀 다른 상황이었는데도 이 결혼의 끝도 그와 같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레베카를 덮쳤다.
하지만 다나에의 따스한 덕담은 그 모든 두려움을 쫓아낼 정도로 다정한 것이었다.
비록 계약 결혼이었지만 진심이 가득 담긴 어머니의 축복은 레베카에게 희망이 되었다.
추악한 과거를 아름다운 추억 속에 묻게 했다.
레베카는 조용히 다나에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먹먹해진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띄엄띄엄 읊조렸다.
“그럴…… 게요. 행복하도록 노력해 볼게요.”
새벽부터 공들인 레베카의 화장이 지워질세라 다나에는 그녀를 힘껏 끌어안지는 못했다.
대신 조심스럽게 레베카의 등을 토닥거렸다.
벅찬 가슴을 누르고 있는 다나에의 눈에 산드라가 들어왔다.
산드라는 주먹을 입에 넣을 기세로 간신히 눈물을 참고 있었다.
여기서 제가 울어버리면 레베카도 울고 다나에도 울고 드레스나 화장까지 망가져 아주 난장판이 될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래서 그녀는 신부를 단장할 때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려고 노력했다.
대부분 성공적이었으나 오늘은 유난히 참기가 힘들었다.
산드라는 레베카의 기구한 삶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다나에의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했기에 힘들었던 딸의 앞날을 축복하는 어머니의 말에 눈물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는 산드라의 얼굴이 우스꽝스러웠다. 그 모습에 다나에가 웃음을 터뜨렸다.
“푸흡! 아…… 죄송해요. 일부러 웃은 건 아닌데…….”
다나에는 입술을 앙다물며 산드라와 반대로 웃음을 참았다. 덕분에 산드라의 눈물도 쏙 들어가버렸다.
“아, 아닙니다. 그럼 이제 나갈 채비를 해볼까요. 곧 입장하셔야 할 거예요.”
산드라는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쳐들었다. 억지로 붙들고 있던 눈물이 주르륵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런 산드라의 모습에 레베카의 입매가 나지막한 호선을 그렸다.
“베키, 이만 나올 차례야. 준비 다 됐니?”
간결한 노크 소리와 함께 테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다나에의 허락에 칸나가 문을 활짝 열었다.
레베카를 발견한 테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세상에! 내 딸이지만 정말 아름답구나. 베키 네가 언제 이렇게 커서는…….”
“사담은 그만하고 얼른 당신 딸을 에스코트하세요.”
지난번 결혼식에서도 울음을 그치지 않아 추태를 보였던 테오였다.
다나에는 서둘러 울먹이는 테오의 얼굴에 손수건을 집어던졌다.
그리고 험악한 얼굴로 그에게 당부했다.
“울 것 같거든 차라리 그 손수건으로 눈을 가리는 게 낫겠어요. 당신, 또 저번처럼 꼴사나운 짓을 했다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레베카의 날을 부모라는 사람이 망쳐야 되겠어요?”
“그, 그렇지. 레베카, 되도록 나를 쳐다보지 말거라. 네 눈망울을 보면 눈물이 터질 것 같으니.”
자신에게서 고개를 애써 돌리는 테오를 보고 레베카는 웃음을 머금었다.
“알겠어요. 아버지.”
“아, 아버지라고? 파파라고 부르던 게 엊그제 같은데…….”
“테오 오벨리아!”
다시 눈시울이 시큰해지고 있는 테오에게 다나에가 호통을 쳤다.
그리고 그의 등을 떠밀며 레베카에게 얼른 오라며 손짓했다.
레베카는 한 손에는 무거운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쥐고, 한 손으론 테오의 팔을 감싸 안고 걸음을 내디뎠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앞으로 벌어질 일에 비하면 그건 서막에 불과했다.
레베카의 복수극은 이제 시작이었다.
자신이 몰고 올 폭풍을 예고하듯, 레베카의 구둣발 소리가 라본느 살롱의 복도에 스산하게 울려 퍼졌다.
* * *
“청첩장이 구겨졌네요…….”
“아. 우리 집 고용인이 실수해서 말이네. 미안하게 됐어.”
제플린은 넝마처럼 너덜너덜해진 청첩장을 어이없이 쳐다보는 직원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리고 예식이 있는 정원으로 곧장 가지 않고 살롱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살롱을 돌아보던 그의 눈이 점차 커졌다.
‘생각보다 근사하잖아? 대체 디자이너가 누구지?’
인정하긴 싫었지만 라본느 살롱은 훌륭한 곳이었다. 제플린의 미적 욕망이 여기저기서 꿈틀거렸다.
‘저건…… 카리누의 조각상 아닌가. 내가 사겠다고 했을 때 부득불 싫다고 우기더니, 요하네스 공작에게 팔았던 거야?’
앳된 소년이 용맹한 표정으로 화살을 겨누고 있는 대리석 조각상을 발견한 제플린이 이를 갈았다.
그러나 곧 제플린은 조각상에서 눈길을 거두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어서 빨리 레베카를 찾아내어 이 지옥 같은 곳에서 그녀를 구출해야 했다.
일단 레베카를 백작저로 데리고 가기만 한다면 율리안과 옥타비오에게 더럽혀진 그녀의 머릿속을 다시 원래대로 깨끗하게 돌려놓을 수 있었다.
자신 있었다.
제플린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피로연장으로 꽃병을 나르고 있던 직원 하나를 불러 세웠다.
“여기, 신부 대기실이 어디인가?”
“예? 그건 왜 물으십니까?”
제플린은 슬그머니 금화 한 닢을 꺼내 직원의 주머니에 넣었다.
커다란 꽃병에 두 손이 묶인 직원은 반항도 못하고 제플린의 뇌물을 받은 꼴이 되었다.
단박에 직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제플린은 직원의 불만이 액수에 대한 것이라 받아들이고선 품에서 돈 꾸러미를 보여줬다.
“제대로 목적지까지 데려다 준다면 이걸 자네에게 다 주겠네.”
평범한 살롱 직원이었다면 제플린의 방법은 아마 성공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리베르타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라본느 살롱이었다.
제가 후원하는 구휼원에 발걸음한 적이 없던 제플린이 그들을 알아볼 리가 없었다.
다만 직원들은 제플린을 똑똑히 알아봤다.
오랜 세월 레베카를 괴롭히던 그 작자의 얼굴을 다들 뇌리 속에 단단히 새겨 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직원은 코웃음을 치며 꽃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고풍스런 꽃병 안에 담겨 있던 화려한 장미가 흔들렸다.
그는 지나가던 다른 직원을 불러 말했다.
“로이. 여기 길을 잃은 백작님이 계시다고 그분께 일러주게.”
제플린을 아래위로 훑어보던 로이가 알 만하다는 듯 비장한 얼굴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내가…… 신분을 말한 적이 있던가?’
제플린은 턱수염이 수북하게 난 나이가 지긋한 직원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얇은 팔로 팔짱을 끼고 그의 앞에 섰다.
“백작님께선 여기 잠시 계십시오. 곧 백작님을 안내해주실 분이 오실 테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말한 안내자가 도착했다.
“데본셔 백작님. 자리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거 오랜만일세. 제플린 데본셔.”
낯익은 두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그를 잔뜩 노려보고 있는 마가렛과 흥미로운 사냥감을 발견한 듯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카림이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뭔가 일이 잘못된 것 같다.
* * *
“곧 결혼식이 시작되오니 자리에 착석해주시길 바랍니다.”
하객들이 기다림에 조금 지쳐갈 무렵에 직원들이 일어서 있는 하객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말했다.
“드디어 시작되나 보군. 대체 그 신부가 누구일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어.”
“틀림없이 카나리아 왕국의 공주님이라니까요.”
“그럼 비밀로 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어쨌거나 우린 앉아서 구경만 하면 되니 무척이나 즐겁군.”
저마다 기대감으로 부푼 얼굴로 버진로드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