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이윽고 율리안이 항상 몰고 다니는 세 마리의 검은 고양이가 등장했다.
검은 고양이의 뒤를 따라 율리안이 당당하게 걸어왔다.
앞만 보고 걷던 그는 잠시 멈춰서더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씨익 웃었다.
그의 시선은 라본느 살롱의 최고층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잠시 웃기만 해도 마치 신께 감사인사를 올리는 듯한 신성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 덕에 곳곳에서 감탄과 탄식이 섞인 소리가 들려왔다.
보통 신부가 등장한 뒤로 눈물을 적시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요하네스 공작의 결혼식에는 신랑이 입장하자마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남몰래 그를 가슴에 품던 영애들과 부인들의 곡소리였다.
“요하네스 공작.”
율리안이 주례석 가까이 가자 데스라치노가 딱딱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무슨 생각으로 황제를 부친의 자리에 앉혔냐고 질책하는 표정이었다.
본디 그 자리는 신전의 추기경이나 교황이 차지해야 마땅했다.
율리안의 아버지도 그랬다. 지금껏 역대 공작의 결혼식에 부친의 자리는 언제나 신전의 사람들로 채워졌다.
어쩐지 연락이 늦게 온다 했더니 황제를 저 자리에 앉힐지는 몰랐다.
하지만 데스라치노는 이내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레오가 황제의 발밑에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허튼 수작을 부리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경고와 같은 매서운 눈초리였다.
“결혼을…… 축하하네.”
그가 조금은 볼멘소리를 할 거라 예상했던 율리안은 의외의 축하 인사를 떨떠름하게 받았다.
율리안은 짧게 목례를 한 뒤 곧바로 등을 돌렸다.
데스라치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든지 알 바 아니었다.
조금 있으면 레베카가 그를 향해 걸어올 것이었다. 잠시 상상만 했는데도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갔다.
곧이어 은은한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로탄더스 왕국에서 신부가 입장할 때 쓰는 전형적인 입장곡이었다.
“신부 입장!”
모든 사람의 시선이 신부가 등장할 입구로 향했다.
금목걸이를 찬 흰 고양이 세 마리가 꽃바구니를 든 두 명의 들러리와 함께 등장했다.
소녀들은 바닥에 꽃을 뿌리며 살짝 긴장한 채 천천히 걸어갔다.
화관을 쓰고 솜사탕처럼 치맛단을 켜켜이 쌓아 만든 드레스를 입은 두 소녀는 마치 숲속의 요정 같았다.
“가만…… 저 소녀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아직 사교계에 발을 들이지 않은데다 가세가 기운 탓에 리비아와 헤레나를 아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하지만 좁은 귀족 사회에서 완전히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리비아와 헤레나를 알아본 사람들이 입을 틀어막았다.
“오, 오벨리아……!”
하얀 고양이 세 마리가 유유히 신부 측 좌석 앞에 자리를 잡았다. 헤레나와 리비아도 그 옆에 섰다.
이윽고 신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호기심에 가득 찼던 눈이 곧이어 경악에 찼다.
하지만 신부의 우아한 걸음걸이에 그들의 입은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비밀을 알고 있던 몽블랑 클럽 회원들은 뿌듯함에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비밀이 폭로되었을 때 비밀을 간직하고 있던 사람들은 특별한 유대감을 가지기 마련이다.
클럽 회원들은 대외적으로 서로 친한 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신학교에서 재직 중인 교수 삼인방은 달랐다.
직장 동료끼리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어도 딱히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거, 참. 입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왜 그런지 알 것 같아요. 저기 놀라는 사람들의 표정 좀 보세요. 이렇게 즐거운 결혼식은 처음이에요!”
살바도르와 헬렌이 호들갑을 떨며 수다를 떨었다.
요하네스 공작의 결혼식답게 각계 권위자들이 하객을 참석했다.
도도하게 고개를 숙일 줄 모르던 그들이 채신없게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을 구경하는 건 퍽 재밌는 일이었다.
테레사 또한 흔들리는 눈으로 레베카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결혼에 로망 따위 없던 그녀였지만, 이런 결혼식이라면 평생 한 번쯤은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신부 입장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테오와 다나에가 양쪽에서 레베카를 에스코트했다.
버진로드 앞까지 다다르자 테오와 다나에는 서로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더 이상 레베카를 에스코트하지 않고 신부 부모의 자리로 향했다.
혼자서 버진로드를 걷고 싶다는 레베카의 의견을 반영한 독특한 입장이었다.
‘전 건네지고 싶지 않아요. 아버지. 그건 한 번으로 족해요.’
다나에와 테오가 자리에 착석하자 레베카가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지금이야!”
레베카가 푸른 잔디밭에 발을 디딘 걸 확인한 유스타프가 직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자그마한 스프링클러가 잔디에 물을 뿜기 시작했다.
잔디 속에 숨겨져 있던 작은 꽃봉오리들이 물을 만나자 입을 열었다.
레베카의 걸음 속도에 맞춰 그녀의 발밑에서 꽃이 피어났다가 그녀가 발을 떼자 금방 져버렸다.
동시에 벚나무 기둥을 감싸고 있던 마석들이 한꺼번에 빛을 발했다.
그 덕분에 드레스의 자수 끝마다 아롱아롱 매달려 있던 다이아몬드가 쉴 틈 없이 반짝였다.
뒤로 이어진 트레인의 엄청난 길이를 레베카는 큰 키로 가뿐하게 소화해냈다.
머메이드 드레스가 레베카가 가진 몸의 모든 장점을 여실히 보여줬다.
여태껏 본적도 없는 연출 규모와 그에 못지않게 화려한 드레스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법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쓰고 있는 다소 검소하기 했으나 기품이 흐르는 티아라가 중심에 서서 과한 분위기를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그래서 레베카는 화려한 신부가 아니라 품격 있는 신부처럼 보였다.
* * *
“예전에도 예쁘다는 생각을 했지만, 오늘 보니 엄청난데? 마치 봄의 여신 같군.”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살롱의 최상층에 있는 방에서 카림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는 눈에서 오페라글라스를 떼고는 제 옆에서 부들거리는 제플린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어떠신가? 저런 완벽한 신부를 빼앗긴 소감이?”
“닥쳐.”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치를 떨면서도 제플린은 레베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더욱 완벽해졌다.
자신과의 결혼식 때보다 더 아름다운 레베카의 모습이 존재할 리가 없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제 착각이었다.
오늘의 레베카가, 제가 아닌 율리안 요하네스 공작과 결혼하는 레베카의 모습이 가장 완벽했다.
묘한 패배감이 밀려들어 오자 제플린은 그만 죽고 싶다는 심정이 들었다.
어느새 버진로드를 다 걸은 레베카가 율리안의 손을 잡았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제플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카림이 그의 어깨를 잡고 꾹 누르는 바람에 그는 다시 의자에 주저앉아야만 했다.
“어딜 가시나. 요하네스 공작께서 특별히 특등석을 마련해 주셨는데 제대로 관람하셔야지요. 백작님.”
“무슨 짓이야! 카림 라트라니스! 당장 이 손 치워!”
“거, 호칭은 어디다가 팔아먹으시고 이렇게 말이 짧으실까? 역시 당신, 기억이 돌아왔구나? 상냥한 데본셔 백작은 다 연기였어. 흥미롭군. 아주 재밌어!”
제플린의 눈에 핏줄이 바짝 섰다. 그는 잔뜩 충혈된 눈으로 제 어깨를 누르고 있는 카림의 멱살을 잡았다.
“내 레베카를 찾아야 해. 당장 이곳에서 나를 내보내줘!”
카림은 제 셔츠 깃을 잡고 있는 허약하기 짝이 없는 제플린의 팔목을 내려다보았다.
제플린은 평균 남성보다는 체격이 있는 편이었지만 카림이나 율리안에 비하면 나뭇가지에 불과했다.
“이봐. 착각하고 있나 본데…….”
연신 웃고 있던 카림의 눈이 일순 가늘어졌다. 그는 제플린의 팔목을 휘어잡고는 제 셔츠에서 손을 떼게 했다.
“어, 어억…….”
카림의 힘은 가히 엄청났다. 고통이 지나치면 비명조차 나지 않는 법이었다.
제플린은 숨을 헐떡이며 기이하게 비틀리고 있는 자신의 손목을 바라봤다.
“여기서 약자는 당신이야. 평생을 높은 곳에서 자라 와서 현재 상황을 잘 모르는 것 같아 내가 조언 하나 하지. 누구든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어. 그게 데본셔 백작이라도 말일세.”
“다…… 닥쳐……. 나, 나를 여기서 내, 내보내……. 이 시골뜨기 비렁뱅이가…….”
카림의 미간에 깊게 주름이 파였다.
아무래도 지금의 제플린은 이성적인 판단이란 게 서지 않는 상태인 것 같았다.
카림은 혼인 서약을 읊고 있는 율리안을 흘깃 내려다봤다.
그리고 그의 옆에 다소곳하게 서 있는 눈부신 레베카를 바라봤다.
‘대체 저 여자가 뭐길래…….’
사나운 짐승 같던 율리안이 수줍은 소년이 되고, 제국의 조각상이라 칭송받던 제플린이 광기에 휘말린 미치광이처럼 된단 말인가.
‘마녀인가? 아니, 그러기엔 기백이 마치 장군 같았어…….’
미신을 믿지 않는 그가 주술을 의심할 정도는 레베카의 기운은 특이했다.
그는 호기심이 동한 상태로 생각에 잠겼다.
“아악!”
그리고 제플린의 외마디 비명에 그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 미안하군. 잠시 딴생각을 했어. 뼈는 부러뜨리지 않았으니 약을 몇 번만 뿌리면 손목은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이 개자식아…….”
카림이 제플린의 손을 놓아주었다.
제플린은 너덜너덜해진 손목을 부여잡고 카림을 흘겨봤다.
곧이어 그는 카림이 잠시 숨을 돌리는 틈을 타 문을 향해 내달렸다.
포기할 수 없었다.
아름다운 레베카의 모습이, 발밑에서 꽃을 피우던 레베카의 그림 같은 모습이 제플린을 자꾸만 유혹했다.
“레베카……. 레베카에게 가야 해. 내 걸 되찾아야 해.”
“와. 이거 진짜 미친놈이네. 레베카 그 여자가 도망간 이유를 이제야 알겠어. 어이, 데본셔 백작! 당신은 여기 앉아서 그냥 관람만 하라니까.”
카림은 문을 향해 돌진하는 제플린을 끌어다 의자에 앉혔다. 제플린은 의자에서 내려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당신이 원하는 걸 다 줄게. 그러니 제발 레베카를 되찾게 해줘! 뭘 원해? 황금? 당신, 가난한 공작이잖아. 내가 다줄게. 황제보다 더한 걸 줄게. 그러니 내 레베카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놔!”
“허…….”
제플린의 악에 받친 외침에 카림은 할 말을 잃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악! 레베카!”
그의 단호한 거절에 제플린은 땅을 치며 절규했다.
카림은 지금 제 앞의 제플린의 꼴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 계속해서 마른세수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