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이상으로 나 율리안 요하네스는 레베카 오벨리아를 아내로 맞아 평생 그녀만을 바라보며 가정의 충실한 아버지가 될 것을 데프리아 여신과 하객 여러분 앞에서 맹세합니다.”
비록 계약 결혼이었으나 율리안은 자신이 입 밖으로 내뱉는 서약에 전율이 일었다.
가슴 가득히 책임감이 밀려들었다.
지금 내 옆에 서 있는 이 아름다운 사람을 반드시 지켜야겠다고, 행복하게 만들어줘야겠다는 의무감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서약을 했음에도 수많은 아내를 두었던 아버지에 대한 혐오감이 들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결혼은 당시 흔했던 정략결혼이 아니었다.
둘은 뜨거운 열애 끝에 낭만적인 결혼을 올렸다.
그러나 결과는 파국이었다.
어떻게 사랑하는 여자에게 엄숙한 맹세를 하고선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는지 율리안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랑에 빠지지 않은 자신도 이렇게 가슴이 무겁게 짓눌리고 있는데.
“레베카 오벨리아. 당신은 앞서 말한 결혼 서약을 모두 지킬 것을 맹세합니까?”
데스라치노의 엄숙한 질문에 레베카가 자그맣게 대답했다.
“네.”
“율리안 요하네스. 당신은 앞서 말한 결혼 서약을 모두 지킬 것을 맹세합니까?”
율리안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는 정원이 흔들릴 정도로 크게 대답했다.
“예!”
좌중에서 간간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윽고 데스라치노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로써 데프리아 여신의 축복 아래 두 사람의 혼인이 성사됐음을 신의 대리자의 자격으로 선언합니다.”
역사에 기록될 만한 세기의 결혼식이었다.
맑게 갠 드높은 가을 하늘이 아름다운 신랑 신부를 잔잔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신랑 신부는 키스하시오.”
주례석을 향해 있던 레베카와 율리안이 서로를 바라봤다.
레베카가 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당신, 지금 엄청 근사해.”
청명한 하늘이 비친 레베카의 푸른 눈동자가 마치 사파이어처럼 밝게 빛났다.
그녀의 애정이 듬뿍 담긴 눈길이 이 수많은 사람 앞에서 오로지 자신만을 향하고 있었다.
율리안의 가슴이 술렁거렸다.
소란스러운 마음이 향하는 곳을 향해 그는 가감 없이 손을 뻗었다.
“당신만 할까.”
혼인 서약에 도장을 찍듯 신랑 신부의 입술이 겹쳐졌다.
다소 황당했던 첫 키스와 눈물 젖은 두 번째 키스. 그리고 지금은 진실의 서약이 담긴 세 번째 키스였다.
율리안은 그 어느 키스보다 무거운 이 순간의 짧은 키스를 영원히 머릿속에 아로새겼다.
“와아!”
사방에서 환호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하객들은 버진로드 위로 축포 꽃을 던지며 신랑 신부의 앞날을 축복했다.
레베카는 버진로드를 다 나서기 전에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제플린을 향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 *
피로연은 라본느 살롱의 메인 홀에서 열렸다.
총 이층으로 구성된 메인 홀은 무도회나 데뷔탕트를 열어도 될 만큼 규모가 어마했다.
일층에는 댄스 플로어와 다과를 즐길 공간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층에는 파트너나 친구들과 은밀한 이야기를 즐길 수 있는 개인 공간 여럿이 마련되어 있었다.
홀의 높은 천장은 단열유리로 만들어졌다.
유리천장으로 가을의 드높은 밤하늘에 수놓아진 별이 보였다.
라본느 살롱은 상권이 형성되지 않은 한적한 곳에 자리 잡았기에 은하수를 온전히 감상할 수 있었다.
오로지 달빛만을 조명 삼아 낭만적인 테마의 무도회를 열 수도 있었다.
레베카는 자신의 결혼식을 라본느 살롱의 홍보로 아주 잘 이용하고 있었다.
휘황찬란했던 결혼식과는 달리 피로연장에는 촛불이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자칫하면 피로연 치고는 칙칙하다고 느낄 수 있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고개를 잠시만 들면 쏟아질 듯한 별무리가 압도적으로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하객들은 피로연마저 완벽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레베카 양은 이게 두 번째 결혼식이었지요?”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레베카 데본셔 백작 부인이었잖아요! 세상에나,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재혼을 이렇게 화려하게 치르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사람들은 어느새 레베카 데본셔를 잊어버리곤 요하네스 공작 옆에 있는 레베카를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요하네스가의 전통성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고, 오벨리아가도 한미하기는 했지만 역사적으로는 유서 깊은 가문에 속했다.
어차피 요하네스 공작가에 걸맞은 가문은 제국에 거의 없다시피 했다.
어떤 가문을 들이밀어도 사람들은 율리안이 아깝다고 했을 터였다.
그러나 레베카를 본 사람들은 아무도 그런 소리를 하지 못했다.
레베카는 피로연에서 아무런 장식이 없는 순백의 미카도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쇄골과 어깨를 드러내는 드레스는 부드럽게 A자를 그리며 떨어졌다.
다나에가 빌려준 할머니의 진주 귀걸이가 그녀의 귀에서 우아하게 반짝였다.
누가 보아도 레베카는 귀부인의 표상 같았다. 그녀에게 공작 부인이란 말이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게다가 레베카가 율리안을 유혹한 게 틀림없다는 평가와 달리, 그는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레베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히려 선을 지키며 냉담하게 구는 쪽은 레베카였다.
가끔 그녀가 던지는 말에 율리안이 쩔쩔 매기도 했다.
여자에게 당하는 요하네스 공작이라니.
하객들은 신기한 것을 구경하듯 만찬을 즐기면서도 신랑 신부를 연신 흘깃거렸다.
원체 사교계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던 둘이기에 관심이 더더욱 모아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한 결혼을 축복하는 가운데 심기가 불편한 사람이 딱 두 명이 있었다.
바로 페튜니아 후작 부인과 제플린 데본셔 백작이었다.
카림이 사사건건 그의 신경을 긁는데도 불구하고 제플린은 꾸역꾸역 피로연까지 남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레베카에게 말을 걸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레베카는 화장실조차 가지 않고 율리안과 딱 붙어서 그와의 대화를 원천봉쇄하고 있었다.
그가 레베카에게 다가갈 성싶으면 어디선가 카림이 튀어나와 그의 앞길을 막았다.
제플린은 테이블 제일 끝에 앉아 별 볼 일 없는 귀족들의 질문 공세를 받고 있었다.
어느 파티에 가든지 제플린은 항상 주인과 가까운 가운데 자리나 상석에 앉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애초에 신부의 전남편인 그가 참석한 것 자체가 예의가 아니었기에 그는 자신의 자리가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덕분에 율리안의 넓은 아량이 칭송받고 있는 중이었다.
제플린 같은 거물이 자신과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하급 귀족들이 그의 귀에 대고 마구 떠들어댔다.
제플린은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와인을 들이켰다.
그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레베카를 향하고 있을 무렵, 페튜니아 후작 부인은 불안한 눈으로 레베카를 주시하고 있었다.
페튜니아는 레베카와 데뷔탕트를 같이 치렀었다.
그 해의 데뷔탕트는 레베카를 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교양이며 화술이며 어떤 면에서도 자신이 레베카보다 우월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노력도 레베카보다는 배로 했다고 여겼다.
재력은 오벨리아가가 좀 더 좋았으나 레베카와 제 가문의 급은 비슷했다.
능력은 더할 나위 없이 자신이 더 좋았다.
하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레베카는 당시 최고의 신랑감인 제플린 데본셔 백작과 결혼했다.
레베카에게 거절당한 구혼자들이 자신에게 왔다.
자존심이 상한 페튜니아는 레베카를 한 번 거쳤던 혼사를 모두 거절했다.
결국 혼기를 놓친 그녀는 늙은 후작의 정부로 전락했다.
레베카의 터무니없이 잘난 외모 하나 때문에 바뀐 결과였다.
치사한 일이었다. 억울하고 신이 원망스러웠다.
때문에 그녀는 레베카가 이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내심 고소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신이 나서 사교계에서 입방아를 찍어 내렸다.
신병까지 얻은 레베카를 마음껏 애도했다.
그러나 웬걸. 흉측하다고 들었던 레베카의 얼굴은 말끔하다 못해 빛이 날 정도였다.
요하네스 공작의 신성력으로 병을 고쳤다고 하더니 이번엔 그 요하네스 공작과 결혼을 한다니.
재혼인데도 불구하고 율리안은 간과 쓸개를 다 그녀에게 내줄 것처럼 레베카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졸지에 레베카는 공작 부인이 되어 자신보다 급이 더 높아졌다.
‘운도 좋지.’
모두가 레베카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레베카가 무슨 말을 하든지 사람들은 귀를 기울였다.
별 시답지도 않은 농담에 배를 잡고 웃기까지 했다.
그녀가 신부이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신부는 결혼식의 주인공이니까.
하지만 페튜니아는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결혼식이 끝나고 나서도 레베카의 주인공 노릇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페튜니아는 초조함에 제 결혼반지를 연신 매만졌다.
오늘 하루 종일 레베카를 지켜본 결과, 그녀는 확실히 예전과 달라졌다. 파티마다 과묵함을 지키고 있었던 예전의 모습과 달랐다.
오늘의 레베카는 적극적으로 대화를 주도하는 데다가 사교계의 소식을 꿰뚫고 있었다.
그동안 페튜니아를 대적할 만한 알맞은 적수가 없어 그녀는 마음껏 여왕 노릇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레베카가 사교계에 등장한다면? 그것도 요하네스 공작을 등에 업고서?
치열한 다툼이 될 것이었다.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데뷔탕트 때처럼, 결혼 시장에서처럼 비참하게 참패를 당할 수도 있었다.
‘대책이 필요하겠어…….’
페튜니아는 후식으로 나온 웨딩 케이크를 거칠게 조각내며 갖가지 계책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 * *
“잠시 파우더 룸에 좀…….”
레베카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피로연이 무르익어 갈수록 취기가 오른 하객들의 고성이 커졌다.
몇 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서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있노라면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숨 막히는 웨딩드레스 때문에 하루 종일 화장실조차 갈 수 없었다.
피로연 드레스는 그나마 편한 옷으로 골랐으니 화장실 정도는 혼자 갈 수 있었다.
게다가 화장을 고쳐야 할 시간이기도 했다.
“내가 같이 가줄까?”
율리안은 아직까지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제플린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아무래도 그가 레베카에게 해코지라도 할까 싶어 불안한 모양이었다.
“괜찮아.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별일이 있으려고. 그리고 신랑 신부가 함께 자리를 비우면 무슨 소리가 오갈지 몰라.”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칸나가 듬직한 목소리로 레베카의 팔을 부축했다. 칸나와 눈이 마주친 율리안은 그제야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