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05화 (105/232)

105.

“하아…….”

레베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번째 결혼식이라 처음보다 조금은 수월할 줄 알았다.

하지만 결혼식은 결혼식이었다.

드레스의 무게에 어깨가 무너져 내릴 듯이 아팠고, 높은 굽의 구두에 발이 퉁퉁 부었다.

화장품을 정리하던 칸나가 레베카의 한숨에 그녀를 돌아봤다.

“많이 고단하시죠.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지금만 견디시면 레베카 님은 공작 부인이 되시는 겁니다.”

“하지만 내 성씨를 그대로 쓴다는 게 조금 어색하기는 해. 꼭 우리 가문이 공작가가 되는 것 같잖니.”

요하네스가는 후계자를 제외하고는 요하네스의 성을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공작 부인도 처녀 적 성을 그대로 쓰는 게 전통이었다.

그런 이유로 레베카는 오늘부터 레베카 오벨리아 공작 부인이 되었다.

“하지만 저는 그래서 더 좋습니다. 레베카 님 그 자체로 고귀해진 것 같잖아요. 물론 원래도 고귀하신 분이셨지만요.”

“날 고귀하다고 해주는 건 너밖에 없어 칸나. 그럼 이제 돌아가 볼……, 아!”

화장대에서 일어나려던 레베카가 신음소리를 내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살갗이 까졌네요…….”

피로연 때 신은 구두가 조금 작다 싶더니 발이 붓자 뒤꿈치의 살갗이 벗겨져 버렸다.

드러난 살갗에 피가 맺혀 있었다.

마치 자신이 상처 입은 듯 칸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치료해야겠습니다.”

“그래. 드레스에 피가 묻으면 곤란하지.”

“혹시 모르니 문은 꼭 잠그고 계십시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세 번이나 문단속을 한 칸나가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레베카는 구두를 벗어버리고 맨발로 절뚝이며 소파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기다란 소파 위에 털썩 누웠다.

발끝까지 피로가 찌르르 몰려들었다. 나른한 기운이 몰려왔다.

이대로 아침까지 잘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칸나를 기다리며 깜빡 잠이 들었던 레베카는 날카로운 소리에 눈을 떴다.

섬뜩한 예감에 레베카는 몸을 일으켰다.

“레오?”

* * *

레베카가 나가는 것을 확인한 제플린은 곧바로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서진 않았다.

영지에 큰일이 생겨 카림은 피로연의 마지막까지 함께 하지 못했다.

그 덕에 제플린은 숨통이 조금 트였으나 다른 복병이 있었다.

율리안이 그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하객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간간이 자신을 향해 경고어린 눈빛을 보내곤 했다.

그 짐승 같은 샛노란 눈동자를 번뜩이며.

제플린은 기회를 노렸다.

결혼식에서 신랑은 바빴다. 끊임없이 손님들을 맞아야 하고, 돌발 상황에도 알맞게 대처해야 했다.

‘그래. 돌발 상황 말이지.’

제플린의 아까부터 와인을 궤짝째 입에 부어 넣는 자코니 남작을 바라보았다.

“으하하. 역시 요하네스 공작가라 그런지 와인도 최고급이군요!”

품위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언행에 제플린은 이맛살을 잠시 구겼다.

그는 무역선으로 한몫을 단단히 잡고는 최근에 작위를 사들인 졸부였다.

대체 저런 인간이 어떻게 공작의 결혼식에 초대받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제플린은 능숙하게 속마음을 숨기고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와인이 입에 맞으시니 다행인 일입니다. 그런데 아까부터 계속해서 자리만 지키고 계시군요. 이런 좋은 와인을 제공해주신 공작님께 인사라도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예? 저 같은 걸 공작님이 상대해 주실까요? 솔직히 저희 집에 초대장이 온 것부터 실수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자기 객관화는 잘 된 사람이었다.

제플린은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요. 요하네스 공작님처럼 아량이 넓으신 분은 드물죠. 전남편인 저도 이렇게 초대해 주셨는 걸요.”

“그,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어서 와인을 가져가서 건배라도 하자고 제안해 보세요. 혹시 압니까. 요하네스 공작님께서 오늘 일을 인연으로 남작님의 미래에 탄탄대로를 깔아 주실 수도 있지요.”

자코니 남작은 겁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술이 그의 보잘것없는 용기를 북돋웠다.

게다가 데본셔 백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제 등을 떠미니 그는 금방 자신감이 넘쳤다.

자코니 남작은 와인잔 한가득 술을 채웠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쏟을 듯이 위태롭게 출렁이는 잔을 한 손에 들고, 저도 그 못지않게 비틀거리며 율리안을 향했다.

“율리안 요하네스 공작님, 이렇게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제플린의 계획대로 충실히 움직여 주고 있었다.

때마침 율리안은 귀가하려 인사를 건네는 바그너 백작 부부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곧 은퇴할 때가 되어 아들에게 작위를 넘겨줄 계획인 바그너 백작 부부는 하객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잔병이 많은 그들이 저녁 시간이 훨씬 넘은 시각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건 율리안의 결혼식이 얼마나 즐거웠는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불행히도 자코니 남작은 열정에 앞서 바그너 백작 부부를 발견하지 못했고, 때마침 제플린이 굴린 와인 병에 발을 디뎠다.

그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곧 자코니 남작과 그의 손에 든 와인이 바그너 백작을 덮쳤다.

“아이고!”

뼈가 약한 백작은 자코니 남작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바그너 백작님! 당장 의사를 불러와!”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바그너 백작은 괜찮다고 말을 했으나 그는 부축을 받아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니라…….”

자코니 남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와인을 뒤집어쓴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심약한 그가 저 혼자서 제게 다가올 리 없다는 생각에 미친 율리안은 고개를 퍼뜩 들어 주변을 살폈다.

능글맞게 웃고 있어야 할 제플린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새어 나왔다.

“이 개자식이…….”

혼잣말로 중얼거린 것이었지만 그의 말을 들은 자코니 남작은 이제 울음을 터뜨릴 지경까지 갔다.

율리안은 당장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으나 쓰러진 바그너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그는 최대한 빨리 수습한 뒤 제플린을 뒤따르기로 결정했다.

의사가 도착하고 하인들이 엉망이 된 바닥을 치웠다.

율리안은 바그너를 옮기는 게 좋겠다는 의사의 말에 그의 허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목을 감싼 채 휘청거렸다.

미칠 듯이 숨이 막혀왔다.

“커…… 커헉…….”

정확하게 누군가가 목을 조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 * *

피로연장을 벗어난 제플린은 빠른 걸음으로 레베카가 갔을 만한 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손님이 쓰는 파우더 룸은 보통 일층에 있기 마련이었지만 이곳은 저택이 아니라 듣지도 보지도 못한 형태의 대여 살롱이었다.

좀처럼 파우더 룸의 위치를 찾지 못해 헤매던 제플린은 초조해졌다.

이러다간 레베카가 다시 피로연장으로 돌아가 버려 기회가 영영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감에 의지해 걸음을 재촉하던 제플린은 다른 곳보다 조금 어두운 분위기의 복도에 도착했다.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지.”

약간 스산한 분위기에 제플린이 발을 돌리려는 순간 어둠 속에서 샛노란 눈동자가 빛났다.

언제나 그를 불행하게 만들었던 그 눈동자였다.

“너!”

레오는 제플린을 발견했지만 그냥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도도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인간들은 자신을 즐겁게 하기도 괴롭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모든 게 덧없었다.

몇몇 인간들 말고는 알고 싶은 마음도 없고 잘 지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하루하루가 무기력하게 지나갈 뿐이었다.

레오는 살고 싶지 않았다.

데프리아 여신의 얼굴이 무엇이었는지, 그자가 자신에게 어떤 명령을 내렸었는지조차 이젠 기억나지도 않았다.

고양이로 오래 살아서 그런지 원래 자신이 어떤 모습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고양이었던 것 같았다.

여신이 제게 남긴 신성력의 흔적만이 제가 한때는 하늘에 속한 이였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하늘은 자신을 버린 게 분명했다.

게다가 희미하게나마 자신과 하늘을 이어주던 신성력마저 몇 년 전의 일로 반 토막이 났다.

반 토막 난 신성력은 원래의 제 모습을 되찾으려 게걸스럽게 율리안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레오는 어떻게든 그 속도를 늦추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신성력 소모를 줄이고 있었다.

그의 노력이 효과가 있기는 했지만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율리안은 후계가 없었다. 후계가 없는 공작의 삶은 비참했다.

그는 병상에 누워 하루하루 말라가는 율리안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루빨리 이 끔찍한 삶의 굴레를 끊어버리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기를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을 넘어가다 보니 모든 일에 초연해졌다.

물론 저 제플린이란 인간을 할퀴고 싶었던 적이 몇 번 있기는 했다.

하지만 어딜 가나 고약한 인간은 있었고, 제플린도 그런 무리 중 하나였다.

그저 피하는 게 나았다. 사실은 귀찮음이 더 컸다.

얼른 안락한 자신의 침대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딜 가려고!”

그러나 제플린은 레오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재빨리 레오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레오가 앙칼진 울음을 뽑아냈다.

“너, 율리안 그 애송이가 항상 데리고 다니던 그 고양이 맞지? 감히 레베카를 꼬셨겠다?”

제플린은 레오가 신의 사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신앙심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레오는 그저 기분 나쁜 검은 고양이일 뿐이었다.

레오는 순간 신성력을 써서 한심한 저 인간을 제압할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율리안이 곤란해졌다.

신성력의 발현은 이목을 많이 끌었다.

그 과정에서 제플린이 공작가의 비밀을 알아차릴 수도 있었다.

‘귀찮아 죽겠네…….’

레오는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기로 선택했다.

웬만한 인간들은 제가 그런 얼굴을 할 때마다 기쁨에 겨운 비명을 지르곤 했다.

서로 다투다가도 화를 풀고 자신의 얼굴을 정신없이 쳐다보곤 했으니, 제플린에게 그런 일말의 인간다움이 있을 거라 막연한 추측을 했다.

“그래……. 네가 죽으면 율리안 그 새끼도 슬퍼하겠지? 그러면 틈이 생길 거야.”

하지만 제플린은 레오가 생각한 것보다 더 인간 말종이었다.

제 애교가 통하지 않자 레오는 이를 드러냈다.

제플린이 저를 해친다 해도 자신은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을 테지만, 율리안이 그 고통을 그대로 받을 것이었다.

과거, 어리석은 결정을 내린 이후로 두 번 다시 그렇게 만들지 말자 다짐했었다.

레오의 눈이 토파즈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신성력을 끌어올리는 속도보다 제플린의 손이 더 빨랐다.

제플린은 레오의 목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조르기 시작했다.

아프진 않았지만 그가 율리안이 죽을 만큼 제 목을 조르고 있는 건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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