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이 조악한 인간이…….’
능히 사람 한 명을 죽일 만큼의 살기가 레오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왔다.
신성력은 사람을 살리는 힘이었으나 동시에 목숨을 거둬갈 수 있는 힘이기도 했다.
레오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연기가 제플린이 심장에 닿는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즉사였다.
“제플린 데본셔!”
어디선가 구두 한 짝이 날아와 제플린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뾰족한 구두 굽이 정확히 그의 머리를 강타하자 제플린은 레오를 쥐고 있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레오! 얼른 이리로 와!”
레베카가 소리를 치기도 전에 레오는 이미 그녀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레베카는 얼른 레오를 품에 안아 들고 나머지 한 짝의 구두를 무기처럼 손에 들었다.
레오는 레베카의 맨발을 흘깃 내려다봤다.
뒤꿈치에서 흘러내린 피가 그녀의 발에 묻어 있었다.
그는 찬찬히 고개를 들어 레베카의 단단히 치켜 올라간 눈매를 바라보았다.
떨리는 팔에선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는 공포가 느껴졌다.
하지만 두려워하는 것과 별개로 그녀의 푸른 눈에선 분노의 불꽃이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다.
‘역시 이 아이, 낯설지가 않아.’
레오가 기억을 더듬는 동안 제플린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레베카! 드디어 대화를 할 수 있게 됐군.”
“닥쳐.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마. 이 금수보다 못한 자식.”
레베카의 험한 말투에 제플린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다시 얼굴을 폈다.
저런 말은 지난번 발코니에서 신물이 날 정도로 들었었다.
이제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았다.
율리안과 가까이 지내다 보니 그가 제 말투도 레베카에게 옮긴 모양이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잘못된 건 다시 고치면 그만이다.
분노할 때도 여전히 아름다운 레베카를 보며 제플린은 크게 다짐했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의 잇새 사이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나의 사랑스런 레베카. 그까짓 구두 하나로 뭘 어쩌려고 그래? 당신이 성인 남자의 힘을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굳이 내 손으로 직접 당신을 처리할 필요는 없지. 내가 소리만 질러도 달려올 사람이 여럿 있어. 여긴 내 구역이야. 제플린 데본셔.”
“그래?”
제플린이 성큼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그의 눈에 비열함이 깃들었다.
“그럼 당신이 소리 지르고 사람들이 달려올 시간과 내가 당신을 덮치는 시간 둘 중 뭐가 더 오래 걸릴지 내기할까?”
“뭐…… 뭐?”
“뒤늦게 달려온 그들이 발견할 수 있는 건, 형편없이 흐트러진 당신의 모습일 거야. 나야 전 부인이 그리워 정에 못 이겨 달려든 파렴치한 인간이 되면 끝이겠지. 일주일간 떠돌 만큼의 대단한 가십거리도 아닐 거야,”
제플린이 거리를 점차 좁혀 왔다.
레베카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본능적인 두려움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당신은? 흠집이 난 신부를 율리안 그 꼬맹이가 너그러이 받아줄까? 아, 이미 다른 사내의 품에 안긴 걸 받아들었으니 상관없으려나? 그렇지만 말이야, 레베카. 그 어떤 사내도 제 눈앞에서 더럽혀진 여인을 제 아내로 삼지 않아. 더군다나 그 콧대 높은 꼬마 같은 그 공작은 더욱더.”
제플린은 거의 코가 닿을 만한 거리까지 다가왔다.
그는 끈적한 미소로 레베카의 몸을 훑어보며 그녀의 허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도망쳐야 했다.
그를 밀치고 도망쳐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회귀한 이후로 절대 하지 않았던, 결코 하고 싶지 않았던 생각이 머릿속을 맹렬하게 울렸다.
‘날 구해줘!’
“레베카!”
“레베카 님!”
그리고 그 순간 칸나가 섬광처럼 달려와 제플린의 멱살을 잡더니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칸나가 제플린을 제압하는 동안 레베카의 몸을 누군가가 단단히 감싸 안았다.
익숙한 살냄새가 풍겨왔다. 레베카는 그 안락한 품에 너무나도 마음이 놓여 눈물 한 방울을 흘렀다.
“유, 율리안…….”
“이제 괜찮아. 레베카. 내가 왔어. 미안해. 진작에 저놈을 치워버렸어야 했는데.”
율리안은 가쁜 숨을 내쉬며 레베카를 면밀히 살폈다.
그는 흘러내린 레베카의 머리카락을 귀 뒤에 꽂아두고는 다시금 제 품에 레베카를 껴안았다.
그의 단단한 가슴팍이 볼에 닿자 레베카는 고개를 들어 율리안을 바라봤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제플린을 노려다보는 그의 목에 선명한 손자국이 나 있었다.
자국을 발견한 레베카의 얼굴이 굳었다.
“이 개자식아. 감히 레베카 님께 손을 대?”
“칸나? 이 생쥐 같은 계집이 여기에 숨어 있었어? 으윽…….”
칸나는 이때다 싶었는지 마음껏 제플린을 응징했다.
제플린은 제 팔을 꺾은 채 자신의 등을 누르고 있는 칸나에게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칸나의 화려한 이력은 제플린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무엇이든 하는 칸나’라는 이름으로 뒷골목에서 알아주는 심부름꾼이었다.
그 의뢰 내용에는 암살도 있었다.
여기서 칸나가 마음만 먹으면 제 목 정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부러뜨릴 수 있다는 소리였다.
“제, 젠장…….”
레베카는 그 장면을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저보다 체구가 훨씬 작은 칸나에게 제플린이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율리안도 칸나에게 제압당했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제플린은 기민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분명히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단서가…….
냐옹-
그때 옴짝달싹 못한 제플린을 향해 레오가 유유자적하게 걸어왔다.
레오는 제플린의 눈앞에 털썩 주저앉더니 솜방망이 같은 손을 치켜들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날카로운 발톱이 삐져나왔다.
동시에 레오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제플린은 순간 레오가 자신을 향해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오가 손을 치켜드는 동시에 제플린은 자신의 흠 없이 매끄러운 얼굴이 생각났다.
아무리 자그마한 고양이라도 얼굴을 할퀸다면 흉측한 상처가 날 터였다.
레오의 손톱이 마치 큼직한 칼날처럼 느껴졌다.
‘그것만은 안 돼!’
제 얼굴의 안위를 살피는 마음이 칸나에 대한 공포를 이겼다.
제플린은 몸을 비틀어 레오의 일격을 피했다.
그 탓에 칸나가 휘청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칸나!”
레베카가 소리치자 율리안이 득달같이 튀어나갔다.
그가 일어선 제플린에게 주먹을 날리려는 순간 제플린이 레오의 복부를 발로 찼다.
“이 하찮은 짐승이 감히!”
“커헉!”
그와 동시에 율리안이 배를 잡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의 비명에 제플린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왜…… 네가 아파하지?”
자신은 율리안이 달려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손 하나 까닥하지 않았는데 그가 돌연 배를 잡고 나뒹굴고 있다니.
갑자기 배탈이라도 난 건가?
“야!”
멍하니 서 있던 제플린을 부른 건 레베카였다.
레베카는 화가 나서 실핏줄이 터진 눈으로 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지금 나더러 야라고 한 거야?”
“그래, 이 비열한 자식아.”
“하아……. 레베카 데본셔. 당신을 원래대로 돌리려면 꽤 고단하겠어.”
“누구 맘대로 레베카 데본셔야? 이제 난 레베카 오벨리아야. 그만 꿈 깨, 제플린.”
“요하네스 성도 쓰지 못해? 이것 참…….”
“제플린. 난 말이지. 날 건드리는 건 참을 수 있는데…….”
레베카는 왼손을 다부지게 쥐었다. 그녀의 왼쪽 손에서 커다란 결혼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제플린은 당장 그녀가 어떤 일을 할지 예측도 하지 않았다.
그저 레베카가 제게 가까이 오니 마냥 좋아하며 입을 헤벌죽 벌렸다.
“내 사람을 건드리는 건 용납 못해. 이건 레오의 복수다!”
퍽-
둔탁한 소리에 칸나와 율리안이 깜짝 놀라 레베카를 올려다보았다.
레베카가 제플린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완력도 없고 기술도 없는 그녀가 날린 주먹의 위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율리안이 손수 끼워주었던 그 결혼반지가 레베카의 공격력을 높여 주었다.
제플린은 찢어진 뺨을 붙잡고 패닉에 빠졌다.
“피…… 내 얼굴에서 피가…….”
“그리고 이건 율리안과 칸나의 몫이야!”
레베카는 있는 힘껏 제플린의 양쪽 오금 사이에 있는 가장 취약한 부분을 향해 발을 치켜들었다.
제플린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공격당한 곳을 부여잡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게 내가 당신에게 할 수 있는 짓이야. 제플린 데본셔! 그 자그맣고 연약한 것을 감싸고 당장 네 더러운 집으로 꺼져.”
“자…… 자그맣…….”
율리안은 고통에 휩싸여 구르고 있는 제플린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다시 한번 더 레베카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바그너 백작 사건을 겨우 수습하고 사라져 버린 신랑 신부를 찾던 크로아가 질색하며 다가왔다.
레베카가 고통을 호소하는 제플린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 전남편이 저를 희롱하려고 했고, 우린 그에 응수한 것뿐이에요. 나머지는 크로아에게 맡길게요. 소란이 일지 않게 조용히 저자를 데본셔 저택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레베카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크로아는 단박에 전후 사정을 알아들었다.
그의 녹색 눈에 진한 경멸이 떠올랐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이제야 정상적으로 호흡을 할 수 있게 된 제플린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치맛자락으로 냉기를 휘날리며 멀어지는 레베카를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 * *
“어디로 가는지는 끝까지 알려주지 않을 셈이야?”
레베카는 혼신을 다해 제 발을 주무르고 있는 율리안에게 물었다.
“응. 비밀이야.”
“신혼여행은 길게 갈 생각 없어. 가까운 데면 좋겠는데.”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이야기했잖아. 가깝고 아름다운 곳이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이기도 하지.”
마차의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로 레베카는 율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는 전문 마사지사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솜씨로 제 다리의 피로를 풀어주고 있었다.
다리가 퉁퉁 부은 채로 피로연장을 내내 쏘다니게 한 게 미안한 모양이었다.
그게 율리안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그는 꼭 제가 잘못한 것처럼 마차에 오르자마자 레베카의 다리를 제 무릎 위에 올렸다.
그리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종아리며 복사뼈며 발가락까지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 그를 바라보던 레베카의 입가에 장난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스킨십이 아주 자연스럽네? 결혼하더니 아주 대담해지셨어.”
“원래도…… 자연스러웠어.”
“아니야. 당신, 내가 팔짱을 끼기만 해도 움찔거렸잖아.”
레베카는 비딱하게 머리를 괸 채 그를 놀리기 시작했다.
율리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나자 레베카는 예전보다 조금 더 편하게 그를 대할 수 있었다.
율리안은 능글맞게 웃는 레베카를 잠시 쏘아보다가 묵묵히 원래 하던 일을 이어갔다.
“그럼, 첫날밤을 기대해도 되는 걸까?”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