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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07화 (107/232)

107.

이건 조금 지나친 농이었는지 율리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익은 고구마처럼 달아올랐다.

한껏 진지한 얼굴로 율리안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레베카. 정말 당신이 그걸 원한다면 나는…….”

“미안해. 장난이었어.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짓지 마. 당신이 후계를 원하지 않는 건 잘 알아. 싫은 걸 강요할 생각 추호도 없어.”

“당신이 정말 최악의 농담꾼인 걸 스스로 아는지 모르겠군.”

율리안이 레베카를 흘겨봤다. 산만한 덩치의 사내가 자신을 새초롬한 눈으로 노려보니 저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레베카는 그런 그가 아주 귀여웠다.

“도착했습니다!”

마부의 말에 레베카는 창문의 커튼을 젖히고 밖을 쳐다봤다.

기대에 찾던 그녀의 눈이 곧 실망에 젖어 들었다.

“율리안, 여기는…….”

“발라리아 해안. 당신의 첫 번째 신혼여행지이자 마지막 신혼여행지가 될 곳이지.”

율리안은 빙그레 웃었다.

제플린과의 신혼여행지라니. 아무리 그의 영지 내라고 해도 굳이 이곳을 찾을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좋지 않은 기억만 떠오를 뿐이었다.

레베카는 도통 율리안의 속내를 알 수 없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 * *

율리안과 레베카는 적막한 해안가를 거닐었다.

잔잔한 파도 소리가 듣기 좋았지만 이곳에 얽힌 추잡한 기억들이 떠올라 썩 유쾌하진 않았다.

말없이 걸음을 재촉하던 율리안이 갑자기 레베카의 앞을 막아섰다.

“잠시만. 여기서부터는 눈을 감도록 해.”

“눈을 감으라고?”

“아니다. 당신이 도중에 눈을 뜰 것 같아. 내가 손수 가려주지.”

율리안은 레베카의 뒤로 가서 레베카의 눈에 손을 올렸다.

조금 긴장한 그의 손이 레베카의 눈가를 뜨겁게 했다.

유치한 짓이라 생각했지만 눈을 가린 채로 걷는 게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장소에 대한 불쾌감은 여전했지만 그가 준비한 걸 상상하자 가슴이 설레어왔다.

게다가 밀착한 채로 귓가에 닿는 그의 숨결에 기분이 좋았다.

“이제 눈 떠도 돼.”

가을밤의 바닷바람은 찼다.

율리안은 레베카의 눈에서 손을 떼고는 제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그녀의 어깨 위에 둘러주었다.

레베카는 자신의 어깨에 재킷이 걸쳐지는 것도 모른 채 두 손으로 입을 막고선 눈을 반짝였다.

“세상에…….”

야자수가 해안을 따라 길게 심겨 있었다.

야자수에는 빛의 마석이 주렁주렁 달려 있어 마치 나무에 매달린 반딧불이를 연상하게 했다.

그리고 줄지은 나무 뒤로 벽에 흰색 도료를 칠하고 푸른색 지붕을 얹은 낮은 저택이 늘어서 있었다.

원래 발리리아 해안은 귀족들의 휴양지라 각기 다른 가문의 별장들이 전경을 차지했다.

개성이 다양하다는 점은 좋았으나 다소 중구난방처럼 보인다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발라리아 해안은 엇비슷한 집들이 늘어서 있는 데다 해외에서나 볼 수 있는 식물들이 가득해 이국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야자수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 기후가 맞지 않을 텐데.”

“당신이 내게 준 선물이 있잖아.”

“설마, 유스타프……? 진짜 대단하네.”

“아니, 대단한 건 그의 재능을 알아본 당신이지.”

해안가를 찬찬히 살펴보던 레베카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설마 다 새로 지은 거야……? 원래 있던 별장은?”

“다 사들이고 밀어버렸어.”

율리안은 해안의 시작점에서부터 끝 지점까지 손가락으로 이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싹 다.”

율리안은 귀중한 장난감을 자랑하듯 천진하게 웃고 있었다.

레베카는 그런 그를 조금 걱정스레 바라봤다.

그의 재정을 걱정하는 게 쓸모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일단 확인은 하고 싶었다.

계약일 뿐이지만 이제 자신은 엄연히 요하네스가의 안주인이 되었다.

데본셔 백작 부인이었을 때처럼 안살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껍데기 부인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옆에서 지켜본 율리안은 조금 사치가 심한 편이었다.

그 비싼 마석을 턱턱 내주는 것도 그렇고, 이번 결혼식도 예상 밖의 엄청난 지출을 했기에 레베카는 식은땀을 흘려야만 했다.

레베카는 율리안이 기분 나빠하지 않을 말을 고르고 고르다가 겨우 말을 내뱉었다.

“저렇게 꾸민 이유가 있어?”

그냥이라거나 신혼여행을 위해서라는 허망한 이유를 댄다면 그에게 경제 관념에 대해 교육할 의향도 있었다.

하지만 율리안의 대답은 의외로 건실했다.

“귀족들 주머니를 좀 털어보려고 했지.”

“응?”

“여기로 놀러 오는 귀족들은 제 별장에서 자기들이 바리바리 싸 가지고 온 음식과 물건만 사용해. 뭐, 여기는 외진 곳이라 바다 말고는 볼 게 없으니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계속 그랬다간 이 동네 경제에 도통 도움이 안 된단 말이야. 시끄럽기만 하고.”

“그래서?”

“차라리 여기 일대를 싹 새로 개발해서 놀러 오지 않고는 못 견딜 만큼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려고 했어. 임대료도 받고, 근처에 괜찮은 상권이랑 레스토랑도 몇 개 만들어 두면 귀족들이 신나서 너도나도 돈을 내겠지.”

의외였다. 언제나 세상일에 별 관심 없는 태도로 있기에 이런 사업적인 수완이 있을지는 꿈에도 몰랐다.

레베카가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율리안이 그녀의 손을 대뜸 잡았다.

그의 손에서 온기가 전해져 오자 레베카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이것만 있는 게 아니야. 가자. 보여줄 게 있어.”

또 보여줄 게 있다는 말에 레베카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꼭 여러가지 생일 선물을 뜯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여기가 어딘지 기억하겠어?”

율리안이 레베카를 데려간 곳은 근방에서 지대가 가장 높은 곳이었다.

그곳에 세워진 별장은 별장이라기보다는 저택에 가까웠다.

아치형의 지붕이 매력적인 별장의 전체적인 느낌은 주변 건물과 비슷했다.

하지만 다른 곳에 없는 커다란 정원에 전용 수영장까지 딸려 있다는 것에 큰 차이가 있었다.

덩굴장미로 멋들어지게 장식한 대문 앞에는 고용인들 몇 명이 공작 부부를 맞으러 나와 있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율리안이 자랑스럽게 대문을 열었다.

“이곳이 우리가 묵을 곳이야.”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레베카를 보고 율리안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여기 별장의 이름이 뭔지 알아?”

“뭔데?”

“베키.”

“뭐?”

“당신에게 주는 내 결혼 선물이야. 내 허락 없이 언제든지 이곳에 와서 쉬어도 돼. 당신 말처럼 우리가 언젠가 헤어지게 되더라도 이곳은 당신 거야. 당신만의 안식처랄까. 이미 법적인 절차도 다 처리해뒀어.”

레베카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휘황찬란한 별장과 율리안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니까 이 값비싼 별장이 다 제 것이란 소리였다.

이전 생에서 그토록 고생해서 얻었던 내 집 마련의 꿈이 한순간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난 당신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 없는데…….”

과분한 선물에 레베카가 멋쩍게 웃었다.

율리안은 레베카의 말에 대답 없이 웃기만 하며 그녀를 이끌고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짐을 고용인에게 넘기고 곧바로 레베카를 정원으로 안내했다.

정원에 도착하자마자 전망대처럼 높게 만든 원형 파고라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파고라 안에는 따뜻한 우유와 간단한 다과가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여기에 섰을 때 경치가 가장 아름다워.”

율리안이 따뜻한 우유에 코코아 가루를 타서 레베카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머그잔을 손에 쥐자 얼어붙었던 손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레베카는 코코아를 홀짝이며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를 들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말대로 경치가 무척 좋았다.

하지만 이곳은 낯이 익은 곳이었다. 나쁜 기억이 그녀를 조금 우울하게 만들었다.

레베카는 푸른 눈을 들어 약간 질책하듯이 그에게 물었다.

“여기, 데본셔의 별장이 있던 자리 맞지? 끔찍한 내 신혼여행 장소이기도 하고 알리시아가 결혼식을 올린 자리이기도 해. 이런 불쾌한 곳에 날 데리고 온 연유가 뭐야?”

‘흠집이 난 신부를 율리안 그 꼬맹이가 너그러이 받아줄까?’

제플린의 말이 헛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말은 이곳에 오는 내내 레베카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사실 율리안도 속으로는 자신을 제플린에게 더럽혀졌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래서 이런 기분 나쁜 곳으로 데려와 그 사실을 알려주려고 하는 걸까.

쓸데없는 걱정이 점점 불어났다.

레베카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자 율리안이 뒤에서 그녀를 가볍게 껴안았다.

그는 레베카의 정수리 위에 자신의 턱을 올려놓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당신이 이곳을 나쁘게 기억하는 게 싫었어.”

그의 말에 초조하게 머그잔을 매만지던 레베카의 손길이 멎었다.

“이곳은 나를 위로해 주던 장소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소에서 당신이 웃었으면 했어.”

율리안은 레베카를 껴안던 팔을 풀고서 그녀의 앞으로도 다가가 눈을 마주쳤다.

오후의 햇살 같은 황금빛 눈이 차가운 밤바다를 담은 푸른 눈을 다정하게 응시했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난 최선을 다해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거야. 그래서 당신이 이곳을 떠올릴 때마다 즐거운 추억을 기억했으면 해. 힘들겠지만 여기에서 일어난 그 끔찍한 과거는 잊어버려. 내가 당신에게 줄 추억으로 덮었으면 좋겠어.”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어느새 코코아는 식어버렸지만 레베카는 춥지 않았다.

그의 말투가, 그의 숨결이, 그의 몸짓 하나하나가 무척이나 따뜻했기 때문이었다.

율리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레베카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레베카는 잔잔한 미소로 그의 키스에 화답을 해주었다.

율리안이 그녀의 미소를 잠시 넋 놓고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내게 줄 선물이 없다고 했지? 이게 바로 내가 원하는 결혼 선물이야. 레베카, 이곳 발라리아를 부디 아름다운 곳으로 기억해 줘.”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

정말이었다. 이곳에 남은 과거의 찌꺼기는 율리안이란 모닥불에 타올라 재가 되었다.

일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레베카는 발라리아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율리안의 온기 가득한 눈동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 * *

꿈결 같은 일주일은 금방 지나가 버렸다.

율리안은 정말 최선을 다해 레베카를 즐겁게 해주었다.

그는 발라리아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전날에 쉴 틈 없이 관광을 했다면 다음 날은 반드시 호화로운 별장에서 온종일 뒹굴었다.

레베카는 어린 시절 테오와 자주 여행하던 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을 만끽했다.

두 사람은 많이 웃었고 많이 먹었고 많은 키스를 나누었다.

“이제 그만 각자의 방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열정적인 키스 뒤에도 레베카는 칼같이 율리안을 방으로 돌려보냈다.

율리안은 그럴 때마다 멍하니 달아오른 레베카의 붉은 입술을 바라보곤 했다.

어떻게 그녀는 여기서 그만둘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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