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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08화 (108/232)

108.

그래도 그는 금방 수긍하고는 얌전히 제 방으로 돌아갔다.

사실 키스만 해도 그는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다음 단계를 생각한 적은 있었으나 그건 귀동냥으로 들은 그저 막연한 상상의 산물일 뿐이었다.

그걸 했을 때 얼마나 황홀한지 그는 겪어본 적이 없었다.

천하 진미의 맛도 먹어본 놈이 아는 법이다.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준다 하더라도 그는 익숙한 음식만 먹고 처음 보는 음식에 섣불리 포크를 가져다 대지 않는 타입이었다.

지금껏 율리안의 인생에 있어 가장 자극적인 경험은 레베카와의 키스였다.

그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넋이 나가 하루에 수십 번씩 그 생각만 했다.

다음 단계까지 생각했다면 그의 머리는 이미 터져서 발라리아 해변의 모래알처럼 되었을 것이었다.

그와 반대로 레베카는 욕구불만에 매일 밤 베개를 한숨으로 물들였다.

그녀는 관계의 모든 것을 맛봤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억새밭에서 있었던 일을 미뤄보아 율리안과 자신은 합이 잘 맞을 것 같았다.

율리안은 지나치게 유혹적이었고, 이러다간 어느 순간 정신을 잃고 계약을 제 손으로 깨버릴 게 분명했다.

그는 후계를 원하지 않았고, 레베카는 그의 순결을 지켜줄 자신이 없었다.

피임을 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만약이라는 정말 자그마한 확률이 레베카를 멈칫하게 했다.

그리고 떠날 마당에 그의 순결을 가져가는 게 조금 꺼림칙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나름의 합의를 보아 키스만으로 욕구를 달래고 있었다.

완전히 그를 건드리지 않고 욕구를 누르기만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이 일을 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아…….”

“왜, 이대로 떠날 생각을 하니 아쉬워? 나는 솔직히 좀 더 있어도 상관없지만 당신이 일이 바쁘다니 어쩔 수 없군.”

율리안은 마차 안에서 발라리아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를 돌아보며 레베카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말대로 아쉬운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레베카에겐 다른 고민이 있었다.

‘공작 성으로 가게 된다면 꼼짝없이 한방을 써야겠지.’

둘은 법적으로나 사교적으로나 완벽한 부부였다.

이미 절절한 사랑 이야기로 둘의 사연을 꾸며놨는데 각방을 쓰는 것도 이상했다.

그러니까 지금 레베카의 최대 고민은 자신이 율리안을 지켜줄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타들어 가는 레베카의 속도 모르고 율리안은 싸들고 온 간식 이것저것을 그녀에게 권하느라 바빴다.

“레베카, 이거 먹어봐. 동쪽 나라에서 온 만두라는 건데, 안에 질 좋은 고기가 듬뿍 들어 있어서 맛있을 거야. 여기 소스에 찍어서…….”

레베카는 율리안이 능숙한 젓가락질로 내민 만두를 입에 욱여넣었다.

육즙이 팡 터지며 조화롭게 버무려진 재료들의 향연이 입 안에서 펼쳐졌다.

조금 뜨거운 탓에 하얀 입김이 쉴 새 없이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것도 나름대로 즐거웠다.

레베카는 최근 들어 맛의 즐거움을 조금씩 깨달아 가는 중이었다.

데본셔 백작가에 있을 때는 항상 적게 먹어야 하는 탓에 음식을 즐긴 기억이 거의 없었다.

그저 매일이 배고픔의 연속이었다.

백작가에서 도망쳤을 때는 먹고사는 게 급급해 음식은 그저 허기를 채우는 용도로만 여겼다.

하지만 율리안이 가르쳐준 방식대로 조금씩 음미하며 먹다 보니 어느새 음식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먹고 싶은 음식이 밤에 자다가 떠오를 때도 있었다.

율리안은 미식가였다.

그는 공작 성으로 가면 세상 모든 진미를 먹여 주겠노라 호언장담했다.

식사 시간이 기대가 됐다.

밥을 먹는 걸 기대하다니 레베카는 자신의 변화가 어색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레베카의 걱정은 어느새 만두의 뜨거운 김과 함께 증발해버렸다.

율리안은 열정적으로 오물거리는 레베카의 입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는 레베카의 입이 그칠 때를 기다리며 젓가락으로 새로운 만두를 집어 들었다.

* * *

오는 길에 공작령을 좀 더 구경하느라 레베카와 율리안이 공작 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 무르익고 있었다.

늦은 밤이었지만 모든 고용인이 빠짐없이 앞으로 나와 새로운 공작 부인을 맞았다.

평소라면 하루 일과를 다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어야 할 시각이었다.

레베카는 미안한 마음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불퉁한 얼굴을 맞이할 거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환히 웃고 있었다.

공작 성은 오래전부터 안주인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율리안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몇십 년이나 안주인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게다가 율리안을 휘어잡은 여자라니, 그 정체가 몹시 궁금하기도 했다.

레베카가 삭막한 공작 성에 온기를 불어넣길 바라며 모두가 기대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반갑습니다. 레베카 오벨리아예요.”

레베카는 모여든 고용인들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치며 성의 있게 인사를 건넸다.

인사가 끝나자 미리 공작 성에 도착해 있던 칸나가 자연스레 레베카의 짐을 받아들었다.

“이건 칸나 양의 일이 아닙니다.”

하인 한 명이 냉큼 다가와 칸나의 손에서 짐을 빼앗아 갔다.

칸나는 순식간에 제 손에서 사라진 짐가방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율리안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칸나는 이제부터 레베카의 비서야. 하녀가 아니라. 모두에게 일러뒀으니 누가 자네를 하대하거든 내게 바로 일러.”

느닷없는 승진에 칸나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공작 성의 현관으로 들어가기 전 레베카는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샅샅이 둘러보았다.

자신이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실망감이 언뜻 레베카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찾는 거라도 있어?”

율리안이 부드럽게 레베카에게 물어왔다.

싱긋 웃으며 레베카의 숄을 단단히 여며주는 공작의 모습에 모두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한때 제국의 망나니라는 소리를 듣던 그가 며칠 밤 사이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서 돌아왔다.

레베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원래도 호감이었던 레베카의 평판이 하늘 높이 치솟기 시작했다.

저 레베카라는 절세 미인의 공작 부인이 율리안을 신사로 만들었다.

어디에 다 같이 모여 축제라도 벌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중에서도 벨마 하녀장은 눈물까지 흘리며 좋아라 했다.

모두가 기뻐하는 가운데, 크로아만이 조금 탐탁지 않은 얼굴로 레베카를 바라봤다.

어쩐 일인지 레베카는 너무나 손쉽게 사람들의 호감을 얻어내고는 했다.

그게 비단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고대 주술 중에 그런 류의 주술이 있다고 들었던 것 같다. 그게 아니라도 분명 무슨 계략이 있겠지.

이쯤 되면 완전히 레베카를 믿을 법도 한데, 크로아는 계속해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녀가 언젠가 율리안을 크게 아프게 할 것 같았다.

그렇다는 근거도 없었고, 이런 제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율리안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직감이라는 건 조상 때부터 뼛속 깊이 새겨진 정보의 총 집합체라고 들었다.

자그마한 직감이라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크로아는 율리안의 환한 미소를 발견하고 피어오르는 의심을 떨쳐냈다.

지금 현재 율리안은 행복에 젖어 있었다. 중요한 건 그 사실뿐이었다.

크로아는 씁쓸하게 웃으며 율리안과 레베카의 뒤를 따랐다.

* * *

“거창하게도 꾸며놨군.”

율리안은 한때 어머니와 아버지의 침실이었던 신방에 들어와 투덜거렸다.

분명히 간소하게 꾸미라고 했건만 들뜬 고용인들은 도무지 적당한 선을 몰랐다.

덕분에 신방 곳곳에 끈적한 기운이 맴돌았다.

붉은 커튼에 촛불이 일렁거리고 축음기에선 녹진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탓에 저도 모르게 조금 긴장이 됐다.

율리안의 목이 뻣뻣하게 굳었다.

레베카는 후계를 만들 생각이 없다고 신혼여행 내내 당부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그녀가 마음을 바꿔서…….

율리안의 머릿속에서 망측한 상상극이 펼쳐지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네글리제만 입은 레베카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율리안은 저도 모르게 몸을 사리며 소리쳤다.

“나, 난 아무것도 안 했어!”

“뭘 안 했다는 거야?”

레베카는 긴장은커녕 이 상황이 대수롭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화장대 앞에 털썩 주저앉아 아직 덜 말린 머리칼을 수건에 탈탈 털었다.

기다란 머리카락에서 흘러나온 물기에 네글리제가 젖어들었다.

젖은 네글리제가 등에 찰싹 붙어 레베카의 허리라인과 살색이 그대로 드러났다.

조심성이 없는 건지, 아니면 신경도 쓰지 않는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어떤 의도가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율리안은 열이 확 쏠리는 머리를 싸매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

이 상태로 오늘 밤을 보내야 한다니 아주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등 뒤에서 벌어지는 율리안의 고뇌를 모른 채 한참 머리를 정돈하던 레베카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그날이었지? 몽블랑 클럽의 거사 날.”

“기억하고 있었네. 새벽 세 시쯤에 시작한다고 들었어.”

“근데 정말 우리가 가보지 않아도 괜찮은 거야?”

“최소한의 인원만 움직이는 게 효율적이야. 우리가 가봤자 짐만 되겠지.”

“하긴 그렇겠다. 이번에 공작가에선 몇 명을 지원한다고 했지?”

“열다섯 명. 인원이 많지는 않지만 아주 믿을 만한 자들이지.”

“그 정도도 적은 편은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잘 됐으면 좋겠네.”

단장을 끝낸 레베카가 기지개를 길게 폈다.

그리고 화장대에서 일어나 침대를 향해 거침없이 다가갔다.

레베카는 침대 위에 가지런히 펼쳐져 있던 제 몫의 이불을 들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엉덩이.”

“뭐, 뭐……?”

엉덩이라니! 이렇게 갑작스레 들어오는 건가.

역시 경험자는 취향마저 남달랐다.

율리안은 목이 뻣뻣하게 굳은 채로 침을 꿀꺽 삼켰다.

‘오늘 내 엉덩이 상태가…….’

제 엉덩이 상태를 점검해보던 율리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신혼여행에 떠나 있는 동안 운동을 소홀한 탓에 근육이 다 빠져 볼품없어 보였다.

그는 울고 싶은 심정으로 더듬더듬 말했다.

자존심에 큰 상처가 생겼지만 그래도 이 상태로 첫날밤을 보낼 수는 없었다.

“어, 엉덩이는 좀……. 오늘 말고 다른 날에.”

“무슨 소리야. 엉덩이 좀 치우라고.”

레베카는 황당한 얼굴로 두 손에 쥔 이불을 펄럭였다.

“아…….”

율리안은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깔고 앉은 이불을 내어 주었다.

레베카는 이불을 둘둘 말아 소파에 던져놓고 커다란 베개 하나를 품에 안았다.

“당신이 참기 힘들 것 같으니 내가 소파에서 잘게.”

“뭘 참기 힘들다는…… 잠시만, 설마?”

율리안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그는 불쾌감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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