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율리안은 조금 화가 난 얼굴로 성큼성큼 소파에 다가갔다.
그리고 소파에 널브러진 이불을 주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레베카가 안고 있는 베개를 뺏어다가 침대 위로 내던졌다.
“레베카! 난 짐승이 아니야. 이성이란 게 있는 사람이라고. 어떻게 그런 취급을 할 수가 있어?”
“그래? 지금까지 내가 알기론, 사내들은 오래 참으면 아래가 견딜 수 없이 아프다고 했어. 그래서 아내가 아무리 힘들더라도 이해해 줘야 한다고…….”
“그런 개소리는 대체 누가 지껄이는 거야.”
“우리 엄마가. 그리고 던컨 부인을 비롯한 많은 귀부인들이.”
엄마라는 말에 율리안은 이어서 나오려던 험한 말을 집어삼켰다. 그는 허리에 손을 얹곤 길게 한숨을 내뺐다.
“후우…… 잘 들어, 레베카. 그걸 못 참겠다고 지껄이는 인간은 아랫도리에 이상이 있거나 음흉한 속내를 엄살로 가장하려는 머저리거나 둘 중 하나야. 그 논리대로라면 수도승들은 다 뒤졌어야겠네? 당신은 날 그런 놈들이랑 똑같이 보는 거야?”
“지금 당신이 다른 남자랑 다르다고 하는 거야?”
“아니, 내가 다른 게 아니고 원래 그게 정상이라는 거야. 물론 당신 같은 사람과 한 침대에 있으면 아주아주 힘들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이성을 잃을 정도는 아니거든?”
흥미로운 견해였다.
제플린과는 이런 내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기에 레베카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기분이 들었다.
“그럼 아이가 안 생기는 데에 전적으로 부인의 책임이 있다는 건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냐니……. 만든 건 같이 만들어 놓고 왜 부인에게 책임이 있다는 거야. 게다가 그딴 소릴 지껄이는 놈들은 보통 씨 없는 수박일 경우가 많았어.”
“흐음. 그렇단 말이지? 그러면 말이야…….”
이후로 레베카는 그동안 사내에 대해 궁금했던 점을 율리안에게 물어봤다.
그녀는 부끄러움이라고 없는 사람처럼 눈을 반짝이며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오히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사람은 율리안이었다. 그는 다소 수위가 강한 질문에 홧홧해진 얼굴을 싸맸다.
그래도 그는 레베카의 질문에 꼬박꼬박 답은 잘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질문이 얼추 끝난 것 같았다.
율리안은 진이 빠진 상태로 침대에 털썩 누우며 말했다.
“대체 당신은 어떤 남자들만 만난 거지? 내 주위엔 그 정도로 이상한 놈은 없는데.”
레베카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옆에 조심스럽게 누워 율리안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게 말이야. 내 인생에는 이상한 사람들밖에 없었나 봐. 당신 덕분에 많은 의문이 풀렸어. 아까는 오해해서 미안해.”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야.”
잠시간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공작 내외의 로맨틱한 첫날밤을 위한 고용인들의 노력이 지금 이 순간 가치를 드러내고 있었다.
남녀 관계를 돕는다는 향기가 율리안의 코를 간질였다.
꼴깍-
율리안의 목울대가 넘어가는 소리가 레베카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녀는 잠시간 갈등하다가 이내 결심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잘 자.”
레베카는 서둘러 촛불과 축음기를 껐다.
침실에 어둠이 내리자 그녀는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침대는 다섯 명 정도는 거뜬히 누울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율리안은 제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레베카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를 만지고 싶고 안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레베카가 영영 도망가 버릴지도 몰랐다.
퍽 가까워졌다고 생각해 다가설 때마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곤 했다.
율리안은 등을 향해 뻗은 손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고단한 하루였는지 레베카는 금방 잠에 들었다.
낮게 들리는 그녀의 숨소리가 달콤한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뒤척이던 레베카가 율리안을 향해 돌아누워 있었다.
그는 흘러내린 이불을 다시 제대로 덮어주고는 그녀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는 부모와도 한 침대를 나눠 쓴 적이 없었다.
제 곁에 누군가의 온기가 있다는 게 이토록 가슴이 벅찬 일인지 처음 깨달았다.
율리안은 잠든 레베카의 얼굴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으음…….”
돌아누운 레베카가 그에게 바짝 붙어오더니, 다리 하나를 그의 허벅지 위에 걸쳤다.
“커흡…….”
율리안은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레베카는 보기보다 잠버릇이 험한 편이었다.
그런 모습마저 귀여웠지만 계속해서 몸이 밀착되자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다.
그는 필사적으로 레베카를 피해 달아났지만 레베카는 그를 비웃는 듯 맹렬히 그의 뒤를 추격했다.
‘잠든 척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아무리 봐도 레베카는 깊게 잠이 든 게 맞았다.
“하아…….”
결국 율리안은 항복한 채로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오늘은 편히 자기는 그른 것 같다.
어차피 밤새야 할 거 일이나 하자 하며 율리안은 소리 없이 침실을 나섰다.
* * *
주방에서 간단한 요리를 끝낸 율리안은 음식이 든 봉투를 들고서 마구간으로 향했다.
그가 최대한 조용히 움직였기에 다행히 고용인 그 누구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히이잉-
율리안의 발소리를 알아챈 검은 말이 반갑게 울었다.
“군터. 잘 있었어?”
율리안은 윤기가 도는 군터의 몸통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군터가 푸르르거리며 율리안에게 얼굴을 비벼왔다.
그는 귀리 한 줌을 군터에게 먹이고는 안장 주머니에 음식봉투를 넣었다. 그리고 능숙하게 군터 위에 올라탔다.
곧이어 율리안은 연금술탑이 있는 곳으로 말을 몰았다.
군터는 율리안이 원하는 알맞은 속도로 달렸다.
그에 마음을 안 것처럼 뛰어야 할 때는 뛰고 속도를 줄여야 할 때는 느리게 달렸다.
오랜만에 군터와 맞추는 합에 율리안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군터는 그가 본 말 중에 가장 빠른 말이었다.
경마장에서도 꽤 인기 있는 말이었지만 부상 후 정육점에 팔려 갈 뻔했다.
평소 그를 눈여겨본 율리안이 군터를 거둬서 치료했고, 그에 화답하듯 군터는 빠르게 회복했다.
그 뒤로 둘은 한 몸처럼 전국을 누비곤 했다.
히이잉!
앞에 나무가 쓰러진 게 보였다. 군터는 여유롭게 나무를 뛰어넘었다.
율리안도 단단한 허벅지로 날뛰는 군터 위에서 버텼다.
요란스럽게 착지하자 그의 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통신석이 달그락거렸다.
혹시나 빠트린 게 있을까 싶어 율리안은 주머니를 끌러 안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네 개의 통신석 모두가 얌전히 주머니 안에 들어 있었다.
안심한 율리안은 더욱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이윽고 등대처럼 밤하늘을 환히 밝히고 있는 연금술탑이 보였다.
* * *
회색 벽돌로 쌓아 올린 연금술탑은 깊은 숲속에 있었으나 요하네스 영지 어디에서든 보일 정도로 크기가 컸다.
우아한 외관과는 달리 연금술탑의 내부는 좋게 말하면 혼잡했고 나쁘게 말하면 더러웠다.
방마다 연금술 재료와 책들이 너저분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그래도 저마다 일정한 규칙이 있어 누가 청소라도 하려고 들었다가는 분노한 연금술사 무리를 맞딱뜨려야 했다.
율리안은 바닥에 흩어진 종이를 밟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야간 작업조가 모여 있는 삼층으로 향했다.
“밤늦게까지 고생이 많아.”
“공작님!”
별안간 등 뒤에서 들리는 율리안의 목소리에 시약을 섞고 있던 아펠리가 깜짝 놀라 뒤를 쳐다봤다.
율리안이 음식 봉투를 내밀며 말했다.
“밤참을 가져왔어. 다들 또 끼니를 거르고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오! 공작님의 요리 솜씨라면 믿을 수 있지요.”
율리안은 이렇게 종종 연금술사들의 간식을 직접 챙겨오곤 했다.
율리안이 연금술탑에 애정을 쏟는 이유는 이곳이 공작가의 최대 수익처이기도 했고, 개인적인 지적 호기심이 동한 것이기도 했다.
아펠리는 음식 봉투를 열어보고는 환호성을 질렀다.
율리안의 특제 소스가 들어간 샌드위치였다.
“이보게들! 공작님이 샌드위치를 가져오셨어! 다들 먹고 합세!”
“샌드위치?”
“헉! 공작님!”
어떤 소음에도 반응하지 않던 연금술사들이 음식이라는 말에 겨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들의 눈 밑에는 시커먼 그늘이 진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이거 원. 시체가 살아난 거나 다름없네. 좀 쉬어가면서 해.”
게걸스럽게 샌드위치를 삼키는 연금술사들을 보며 율리안이 걱정스레 말했다.
유스타프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차별 대우라며 대성통곡을 했을 만큼 다정한 말투였다.
“괜찮습니다. 연구하던 게 완성되기 직전이라서 밤낮을 새도 피곤하지가 않습니다.”
“저번에 말했던 순간이동석 말이지?”
“예, 맞습니다. 그동안 애를 먹이던 공간 흐름의 공식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여기 마나를 불어넣은 마석을 가지고……. 어라?”
“왜 그러는가?”
아펠리가 샌드위치를 먹다 말고 뭔가를 중얼거렸다.
“마석의 종류가 잘못된 것 같아서요. 다시 계산을 해보면…….”
그는 샌드위치를 내팽개치고 책상 앞으로 달려가서 종이에 계산식을 휘갈기기 시작했다.
율리안은 두 입만 먹고 버려진 제 샌드위치를 보며 혀를 찼다.
율리안은 부지런하고 유능한 부하를 선호했다.
하지만 이곳의 연금술사들은 그가 질려 할 정도로 지독한 일벌레들이었다.
아무도 휴가를 쓰지 않아 오죽하면 정기적으로 연금술탑을 닫는 날을 정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한창 신혼을 즐기고 계실 공작님께서 저희 밤참을 챙기러 오신 건 아닐 테고. 뭐 필요한 거 있으십니까?”
나딘이 율리안에게 커피를 가져다주며 말했다.
율리안은 ‘최고의 연금술사’라고 적힌 머그잔을 받아들었다.
향긋한 커피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봉가니산 원두네.”
“역시 바로 알아보실 줄 알았습니다. 요새 봉가니산 원둣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거금을 주고서도 제대로 못 구한답니다. 뭐, 저희야 공작님이 알아서 구해주시니 걱정할 거리는 없지만요.”
“그래.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편히 말하도록. 그나저나 오늘은 이것 때문에 왔어.”
율리안은 통신석이 든 주머니를 탁자 위에 올려뒀다.
주머니 속을 확인한 나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오랜만에 이용하시네요. 알겠습니다. 통신실로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아펠리에겐 꼭 샌드위치를 다 먹으라고 전해주게. 그렇지 않으면 강제로 휴가를 보내버리겠다고 말이야.”
“듣던 중 가장 무서운 소리네요. 어이! 들었지! 아펠리!”
아펠리는 건성으로 손을 흔들며 여전히 종이에 코를 박은 채 빠르게 손을 옮겼다.
“아무래도 아펠리가 쉬고 싶은 모양인데요?”
나딘은 율리안을 향해 어깨를 한 번 으쓱 올리고는 통신실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