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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10화 (110/232)

110.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구멍에 통신석을 넣기만 하시면 됩니다.”

율리안은 커다란 돌판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뚫려 있는 구멍 속에 가져온 네 개의 통신석을 하나하나 넣었다.

“다 됐네.”

“그럼 연결합니다!”

나딘이 커다란 막대기를 밑으로 내리자 돌판 위에 둥둥 떠 있던 커다란 통신석이 빛을 내며 빙그르르 돌아가기 시작했다.

곧이어 돌에 넣어두었던 통신석 두 개가 동시에 떠오르면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아. 여보세요? 공작님?”

“이 시간엔 어쩐 일이십니까.”

타니샤와 로버트의 목소리가 들리자, 율리안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두 군데는 아직 연락이 안 되네요. 조금 기다려보겠습니다. 아! 연결됐습니다!”

나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통신석 하나가 떠올랐다.

“몰래 빠져나오느라 늦었어요. 요새 옥타비오가 사냥개들을 특별 관리하고 있거든요.”

콜린이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율리안은 나머지 통신석에서 연락이 오길 조금 더 기다렸지만 연락은 끝끝내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버틀리는 작업 중이라 연락이 안 되는 것 같네. 우리끼리 먼저 회의를 시작하지. 자. 다들 가지고 온 걸 다 내놔 봐.”

율리안은 비뚜름하게 웃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나딘.”

나딘은 나가면서 다리를 꼬고 손깍지를 끼고 있는 율리안의 모습을 흘깃 쳐다봤다.

그는 율리안이 마치 악당 두목 같다고 생각했다.

“우선 저부터 말할게요! 일단, 타니샤 상회에서는 순조롭게 돈이 굴러 들어오고 있어요. 레베카 님께서 이제 본인의 몫은 필요 없다고 하셔서 그 돈으로 공작님께서 명하신 일들을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네가 중간에 꿀꺽한 건 없고?”

“솔직히 말하면 그 정도는 수고비로 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말이 샜네요, 어쨌든 제플린 데본셔의 사업을 살펴봤어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레베카 님께서 장부에 이상이 있다고 하신 말이 맞았습니다. 데본셔 백작의 수입에 비해 지나치게 지출이 많아요. 최근에는 섬 하나를 통째로 사들여서 리조트 사업을 또 확장했다니까요? 가을 무도회 이후로 적자가 났다고 들었는데 그 돈이 대체 어디서 난 걸까요?”

“그걸 알아보는 게 네 역할이야.”

“백작의 씀씀이에 대한 의문은 저도 있어요! 그리고 이건 아마도 신전하고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콜린의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전?”

“네! 백작의 뒤를 밟다가 알게 된 건데요. 백작이 요즘 카지노에 자주 들르걸랑요? 그때마다 교황이 카지노를 찾아왔어요. 우연치고는 너무 이상해요. 그리고 백작은 카지노에서 항상 거액의 돈을 잃고 돌아와요. 그 탓에 옥타비오가 요새 신경이 좀 날카로워서 조심해야 해요.”

율리안은 콜린의 말에 깊게 생각에 빠졌다.

“카지노라……. 제플린이 도박에 빠질 인물은 아냐. 그건 그냥 눈속임이고 진짜 목적은 교황과의 만남이었겠지. 그런데 교황이 데본셔 백작과 거래할 만한 게 뭐가 있지? 헌금을 약속한 건가? 그러기엔 잦은 만남이 설명이 안 돼. 흠……. 아직 협상 단계인 건가.”

타니샤가 끼어들었다.

“제플린이 교황을 설득하는 중일 수도 있겠네요. 제가 한번 파볼까요?”

“나야 고맙긴 한데. 상대는 신전이야. 괜찮겠어?”

“뭐, 그 정도는 괜찮죠. 그것보다 파블로 자작이라고 아세요?”

“아니. 처음 듣는 이름이야. 왜? 문제 있어?”

“큰 문제는 아닌데, 요새 그 자작이 사사건건 방해하는 바람에 조금 성가셔서요. 데본셔 백작가의 가신인데 와인 사업을 맡고 있어요.”

“아. 그러니까 큰 건을 해결해 줄 테니 나더러 조무래기 좀 처리해 달라 그거지?”

“예. 역시 이런 쪽으로는 말이 잘 통하시네요. 그럼 처리 좀 해주세요.”

“이제 제가 말씀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로버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는 통신석 사용이 아직도 어색한지, 통신석을 떨어트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편히 말씀하세요. 로버트.”

“와! 공작님! 저한테도 그렇게 깎듯이 대해주시면 안 돼요?”

타니샤의 볼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러. 내 말투에 불만이 있으면 네가 유능한 연장자가 되든지. 타니샤는 신경 쓰지 말고 말씀하세요. 로버트 씨.”

“예……. 크흠흠. 저번에 보고드렸던 낭인을 드디어 만났습니다.”

“그래요? 뭐라던가요?”

“그의 말에 따르면, 일하러 간 섬에서 하루는 술에 취해 산을 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작은 굴 속에서 잠이나 잘까 들어갔답니다. 굴 안으로 들어가다 보니 커다란 동굴 속에 마을이 하나 있었다고 하더군요. 입구마다 병사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고 자신이 들어 왔던 굴은 산사태가 나서 입구가 막혔다고 합니다.

“잠시만요. 그자는 데본셔 백작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인물입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국적조차 알 수 없는 외국인이라 우리말이 서툴러서 영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굴은 한창 개발 중인 섬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무인도가 아니란 말이네요. 그럼 그자는 대체 어떻게 거기서 탈출했답니까?”

“그게…… 조금 허무맹랑한 이야기인데.”

“괜찮습니다. 지금은 손톱만 한 단서도 절실할 때입니다.”

“무슨 원주민들 틈에 섞여서 겨우 밖으로 나왔답니다. 이 부분은 너무 장황하게 설명해서 저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여튼 확실한 건 그때 부엉이 눈을 이마에 새긴 사람들이 도와줬다고 하더군요.

“부엉이 눈이라면 카디르 교인들이군요……. 몇 명이나 있다고 합니까?”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지만 무척 많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찾는 섬이 아니라 숨어 사는 카디르 교인의 마을일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병사가 지키고 있다고 했으니 제플린이 사람들을 가둬둔 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계속 말씀해 주세요.”

“하여튼 그자가 여차저차 밖을 나와 보니까 비바람이 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둠 속에서 항구를 찾던 그는 결국 파도에 휩쓸렸습니다.”

“설마 폭풍우에 휩쓸려서 살아남은 겁니까? 명줄 한번 길군요.”

“그, 그게 아니고……. 고래에게 잡아 먹혀서 고래 배 속에 며칠간 있다가 고래의 숨구멍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나가던 유람선에 구출되었고요.”

“고래요? 그게 말이 돼요? 그냥 미친 사람이 마음대로 지껄이는 이야기 아니에요?”

“우와. 완전 엄청난 모험담이네요. 근데 완전 뻥 같은데.”

타니샤와 콜린의 지적에 로버트가 조금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라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도 처음엔 그자의 말을 모두 신뢰하진 않았습니다.”

“뭐, 이 넓은 세상에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조금 꺼림칙하긴 하지만 그자를 믿어보는 수밖에요. 그래서, 그자가 섬의 위치는 안다고 합니까?”

“모른답니다. 자신은 어느 무역선의 용병일 뿐이었고, 제국 언어에 무지해서 그 섬에 대해선 아는 게 없답니다. 야자수가 무척 많았다고는 하는데 웬만한 섬에는 야자수가 다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어느 정도 수확이 있었네요. 외국인이라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을 텐데 수고하셨습니다. 최대한 그자의 편의를 돌봐주시고, 다른 정보가 나온다면 알려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거 어떻게 끕니까?”

“통신석에 대고 ‘시마이라’라고 외치면 됩니다.”

“아. 그렇습니까? 시마이라라고 외치면…….”

“끊겼군…….”

통신석 켜는 법을 잊기라도 한 듯 로버트에게선 다시 연락이 오지 않았다.

오늘은 이만하면 된 것 같았다.

“으악! 공작님 누가 오는 것 같아요.저 이제 끊어야겠어요. 시마이라!”

“뭐야. 나 빼고 다 간 거예요? 정보가 조금 더 있긴 하지만 공작님이랑 단둘이 이야기는 건 죽어도 싫으니 저도 끊겠어요. 시마이라!”

이윽고 고요한 평화가 찾아왔다.

율리안은 눈두덩이를 짚었다.

생각보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파블로 자작이라는 자도 잡아서 족쳐야 하고, 제플린과 교황의 뒤도 캐봐야 했다.

타니샤가 힘을 쓰겠다고 했지만 교황의 뒷조사라면 율리안이 더 유능했다.

게다가 로버트가 언급한 미치광이의 단서를 조합해서 섬을 찾고…….

그때 통신석 하나가 하늘 위로 떠올랐다.

“아. 아. 공작님, 아직 거기 계십니까?”

“그래. 여기 있어. 버틀리. 일은 어찌 되었나.”

“성공리에 마쳤습니다. 몽블랑 클럽에서 보내준 사람들이 꽤 유능하던데요? 한 사람도 발각되지 않고 일을 마무리했습니다.”

“내일 제국이 아주 발칵 뒤집히겠군.”

“그래서 내일 긴급 국무회의가 있을 예정이랍니다. 황제께서 신전파 귀족들을 상대해야 하니 만반의 준비를 해서 오라고 하셨습니다.”

“빌어먹을…….”

“예?”

“아니다. 밤늦게까지 수고했어. 오늘은 푹 쉬도록.”

“알겠습니다. 공작님도 신혼이신데 너무 무리해서 일하시지 마시고요. 그럼 이만. 시마이라.”

“신혼은 얼어죽을…….”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조금 있으면 동이 틀 시간이었다.

“내일 하루만은 레베카와 느긋하게 쉬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달콤한 신혼 생활은 물 건너간 것 같았다.

* * *

날이 밝았다.

하녀장 벨마 도슨이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들어와요.”

레베카의 낭랑한 소리가 문 뒤에서 들려오자 벨마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세숫물과 수건이 올려져 있는 트레이를 손에 꽉 쥐었다.

원래는 자신이 할 일은 아니었지만 어서 빨리 레베카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에 담당 하녀에게서 트레이를 빼앗아 들고 왔다.

드디어 이 황량한 공작 성에 안주인이 생겼다.

“공작님, 세숫물을 가지고…….”

“쉬잇!”

벨마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 위에 앉아 있던 레베카가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댔다.

그녀는 가운을 여미고는 벨마에게서 트레이를 받아들었다.

“어제 새벽까지 무리를 한 것 같아요. 다른 고용인들에게도 율리안을 깨우지 말라고 전해주시겠어요? 급한 안건이 있다면 제게 주시고요.”

“아, 알겠습니다.”

벨마는 웃통을 깐 채로 침대에 엎드려 자고 있는 율리안을 슬쩍 봤다.

전대 공작 부인 이벨리나의 친정 하녀로 따라온 벨마는 율리안의 탯줄을 자른 사람이었다.

때문에 그가 아무리 장성한 어른이라 하더라도 벨마의 눈에 율리안은 여전히 아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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