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에구머니나. 새벽까지 그랬다고? 맨날 후계자는 싫다고 노래를 부르시더니, 공작님도 영락없는 사내구나. 그나저나 귀여운 어린아이였던 분이 어느새 이렇게 커서는…….’
벨마는 새근새근 잠든 율리안을 보며 그의 어릴 적 모습을 떠올렸다.
간단한 세수를 마친 레베카가 얼굴을 닦으며 물었다.
“세숫물의 향이 좋네요. 뭘 탄 건가요?”
“아. 녹차입니다. 피부 진정에 효과가 좋다고 해서요.”
“세심하시네요. 마음에 들어요. 벨마 도슨 하녀장님 맞으시죠?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레베카가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살짝 걷힌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미약한 햇빛에도 레베카의 얼굴은 태양처럼 빛났다.
벨마는 잠시 멍하니 레베카의 뽀얀 얼굴을 바라봤다.
‘그래. 새벽까지 달린 이유가 있었구먼.’
팔불출 같겠지만 벨마는 여태껏 율리안보다 예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베카에 비하면 율리안은 그저 잘생긴 검은 고양이 수준이었다.
“옷은 어디서 갈아입으면 될까요? 모르는 것투성이니 잘 가르쳐주세요. 하녀장님.”
“편하게 벨마라고 불러주세요. 드레스 룸은 침실과 이어져 있습니다. 공작님께서 레베카 님과 어울릴 만한 옷을 옷장 가득 채워두셨어요.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요하네스 공작 성에는 작은 게 없는 것 같았다.
드레스 룸은 산드라의 의상실 크기만큼 컸다.
레베카는 질릴 만큼 옷장에 걸려 있는 옷 무더기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적 감각이 별로 없는 그녀가 보아도 예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드레스가 줄을 이었다.
이 많은 드레스 가운데 어떤 옷을 골라야 할지 몰랐다.
가볍게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재미라고 모르는 진지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레베카는 심사숙고하다가 어깨가 살짝 드러나는 갈색 드레스를 골랐다.
채도가 낮은 갈색의 벨벳 원단이 차분한 느낌을 자아냈다.
동시에 우아하게 드러나는 둥근 어깨가 원단이 주는 답답한 분위기를 가시게 했다.
“이걸로 하겠어요.”
드레스를 갈아입은 레베카는 벨마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고용인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성의 아침을 열고 있었다.
열심히 제 할 일을 하다가 레베카를 마주친 하녀 한 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녀는 잠시간 레베카의 미모에 감탄하다 벨마의 헛기침에 얼른 정중하게 다리를 굽혔다.
“안녕하세요. 공작 부인.”
하녀는 아무래도 입에 부인이란 말이 잘 안 붙는지 조금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레베카 오벨리아라고 해요.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그녀의 상냥한 화답에 하녀의 얼굴이 밝게 펴졌다.
둘의 인사를 슬그머니 보고 있던 고용인들 몇몇이 레베카에게 인사를 건넸다.
삽시간에 고용인들에게 둘러싸인 레베카는 인사를 받느라 바빴다.
벨마가 구원자처럼 나타나 고용인들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부드럽게 레베카를 식당 쪽으로 이끌었다.
“시장하실 테니 아침 식사부터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공작님께서 마님의 식사를 잘 챙기라고 신신당부하셨거든요.”
“알겠어요.”
보통 한 가문에서 오래 일한 고용인들은 새로 온 식구에게 경계의 눈총을 보내기 마련이었다.
일종의 길들이기 차원으로, 일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거나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하녀장과 새신부의 신경전은 사교계에서 심심찮게 주제로 떠오르는 이야기였다.
레베카도 처음 백작 부인이 되었을 때 그레이스가 꽤나 못살게 굴었다.
하지만 파비올라가 그보다 배는 더 괴롭히는 바람에 나중에는 그레이스가 레베카의 편을 들었다.
공작 성에는 대대로 요하네스 공작가를 섬기는 고용인들이 많다고 들었다.
주방장과 크로아가 그러했다.
그리고 벨마는 전대 공작 부인의 친우이자 율리안의 유모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레베카는 텃세가 있을 거라 단단히 각오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단단한 각오가 무색하게도, 고용인들은 하나같이 레베카를 기쁜 마음으로 반겼다.
“챔프에게 마님의 식성에 대한 소식은 전달 받았습니다. 제가 보기 좋게 살찌워 드릴 테니 마님께서는 먹고 즐길 생각만 하십시오!”
주방장이 주먹으로 제 가슴을 퉁퉁 치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율리안이 오벨리아 저택으로 보낸 요리사 챔프가 제대로 인수인계를 한 모양이었다.
곱게 갈아서 만든 사과잼이 아니라 아삭아삭 식감이 살아 있는 사과잼이 식탁에 올라왔다.
딱 레베카의 취향 그대로였다.
레베카는 사과잼에서 나는 계피향을 기분 좋게 음미하며 갓 구운 바삭한 흰 빵을 베어 물었다.
따뜻한 우유와 수제 햄까지 곁들이니 금상첨화였다.
열심히 식사를 하던 레베카는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식당 문을 빼꼼히 열고 하녀와 하인 몇몇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레베카가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자 벨마가 도끼눈을 치켜들고 소리쳤다.
“다들 한가하신가 보죠? 부인의 식사를 방해하지 말고 얼른 제 할 일들을 하러 가세요!”
벨마의 호통에도 다들 뭐가 신나는 건지 꺄르르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다들 사이가 좋아 보였다.
벨마가 머쓱한 얼굴로 레베카를 돌아봤다.
“죄송합니다. 공작 성에는 안주인의 자리가 아주 오래 비워져 있었거든요. 다들 새로 오신 공작 부인을 궁금해하는 눈치라…….”
“괜찮아요. 환영해주니 저는 고맙지요.”
처음에 자신을 지켜보는 이들을 보았을 때 혹시 저를 감시하려고 하나 싶었지만 전혀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러기엔 레베카를 향한 눈빛들이 지나치게 따뜻했다.
‘데본셔 백작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녀가 기억하는 고용인들은 무척이나 사무적이고 냉철한 사람들뿐이었다.
고용인들 대부분은 차가운 얼굴로 레베카를 감시하곤 했다.
율리안은 공작 성을 황무지 같은 곳이라 표현하곤 했지만, 레베카가 보기엔 전혀 아니었다.
데본셔 백작가에 비하면 이곳은 마치 봄날의 꽃밭 같았다.
레베카는 주방장과 벨마의 수다를 훔쳐 들으며 공작 부인으로서 첫 날을 시작했다.
* * *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벨마는 본격적으로 레베카에게 공작 성의 구석구석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당분간 자신이 관리해야 할 곳이었다. 갈 때 가더라도 일을 제대로 해두고 싶었다.
레베카는 바짝 정신을 차리고 벨마의 설명을 주의 깊게 들었다.
“마지막으로, 이곳이 부인께서 머물 집무실입니다.”
“제 집무실이요? 율리안의 집무실이 아니라?”
“그럼요. 공작님의 집무실은 따로 있습니다. 아까 보신 넓은 서재가 집무실이라 말씀드렸습니다만?”
“이곳도 두 번째 집무실인 줄 알았어요.”
“아닙니다. 공작 부인께서도 일을 하실 장소가 필요한 게 당연하죠. 화장대에서 서류를 작성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아, 말이 나온 김에 이번 달 장부를 한번 보시겠어요?”
벨마는 집무실을 제 집마냥 익숙하게 뒤지더니 두툼한 서류철을 가져왔다.
레베카는 떨떠름하게 장부를 받아들었다.
“제가 계산에는 그리 밝지 않아서 미흡한 부분이 많을 겁니다.”
“아니에요. 대충 훑어봐도 굉장히 깔끔한 걸요.”
“그래도 부족할 겁니다. 경험이 많은 분이시니까요.”
레베카는 멈칫하고 벨마를 바라봤다. 딱히 자신의 이혼 경력을 비꼬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능력에 대해 잔뜩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이런…….’
하지만 벨마의 기대와 달리 레베카는 안주인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이곳에 오기 전 다나에가 간단히 교육을 해주긴 했지만 이론과 실전은 전혀 달랐다.
영지마다 사정도 다르고, 그에 맞게 실정을 펼쳐야 했다.
레베카는 순간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었다.
한 번 결혼 생활을 해봤던 터라 자신에게 잔뜩 기대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레베카는 이런 일에 익숙한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주먹구구식으로 해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이번에는 정말 잘해보고 싶었다. 이름뿐인 공작 부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모르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부끄러운 일이었다.
레베카는 조금 멋쩍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예?”
“이전에 데본셔 백작 부인이었을 때…… 전남편이 어떤 일도 하지 못하게 했거든요. 그래서 새신부보다 모르는 게 더 많습니다.”
벨마의 얼굴 위로 살짝 실망한 기색이 스쳤다.
레베카의 예상대로 벨마는 원숙한 부인이 안주인으로 온다기에 잔뜩 기대하고 있던 찰나였다.
그녀는 비어 있는 안주인의 자리를 메꾸느라 그동안 자신의 가정을 돌보지 못할 정도로 바삐 살아야 했다.
이제야 조금 숨을 돌리는가 싶었는데 처음부터 하나하나 가르쳐야 한다니.
하지만 벨마는 레베카의 사정을 율리안에게 미리 전해 들은 참이었다.
‘거참, 이런 것도 이야기해주셨어야지! 그럼 매뉴얼이라도 미리 만들었을 것 아니야.’
레베카가 아무것도 모르는 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안주인이 생긴 게 어딘가!
벨마는 조금만 더 고생하면 된다고 생각하고는, 씁쓸하게 웃는 레베카의 손을 잡았다.
“괜찮습니다. 모르면 배우면 되지요. 언제든지 물어봐 주세요. 제가 힘이 닿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레베카의 표정이 흐렸다가 점차 밝아졌다.
이윽고 그녀는 환히 웃었다.
“그래요. 배우면 되죠. 배우면 되는 거였어요! 그럼 지금부터 당장 시작할까요?”
“지, 지금 바로요? 넓은 성을 아침부터 돌아다니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조금 쉬었다가 하심이…….”
“아니요. 하나도 피곤하지 않아요. 가르쳐 주세요. 전부!”
사실 자신이 쉬고 싶어서 한 소리였지만 벨마는 차마 레베카를 말릴 수 없었다.
이대로 휴식을 취하기엔 생기 가득한 그녀의 눈빛이 너무나 찬란했기 때문이었다.
* * *
“마님. 황궁에서 급한 연락이 왔는데 어찌할까요?”
막 점심 식사를 마치고 홍차를 마시던 레베카에게 하인이 다가왔다.
레베카는 서신을 읽었다.
오늘 오후에 긴급 국무회의가 열릴 예정이니 빠짐없이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서신을 가져온 시종에게 요하네스 공작이 참석한다 했다고 전해주게. 공작님께는 내가 직접 전하겠네.”
“예. 알겠습니다.”
하인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식당을 나섰다.
급한 서신을 율리안에게 전할 때마다 곤란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는 방금까지 방에 있었는데 감쪽같이 사라진다거나 귀찮다며 서신을 돌려보낸 일이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다니.
하인은 속으로 레베카를 찬양하는 말을 쏟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