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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12화 (112/232)

112.

레베카는 서신을 들고 침실로 향했다.

분명 어제 있었던 거사에 대한 일일 것이다.

흥미진진한 회의가 될 것 같아 자신이 참석하고 싶었지만 자격이 없으니 어떨 도리가 없었다.

“율리안. 나 들어갈게.”

노크에도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아직도 잠에 빠져 있나 싶어 레베카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커튼이 쳐진 어두컴컴한 방 안은 레베카가 나왔을 때와 똑같았다.

다만 침대 위가 비어 있었다.

‘화장실이라도 간 건가?’

레베카가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그녀의 허리 위로 단단한 손이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뜨거운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어디 갔었어…….”

아직 잠에서 덜 깬 율리안의 몽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뒤에서 레베카를 끌어안고서 그녀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었다.

“유, 율리안?”

레베카는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맨살이 드러난 율리안의 커다란 흉부가 등 뒤로 느껴졌다.

율리안은 킁킁거리며 레베카의 목덜미 부근의 냄새를 들이마셨다.

“냄새 좋다……. 아침 먹은 거야? 아, 그게 아니라 점심인가. 아쉽네. 당신 입에 음식이 들어가는 걸 구경하고 싶었는데…….”

아직 잠에서 덜 깨서 그런지 그는 평소보다 대담하게 굴었다.

그는 레베카의 허리를 감은 손에 좀 더 힘을 주어 그녀를 바짝 끌어안았다.

미열이 남아 있는 그의 몸이 레베카를 뜨겁게 데웠다.

“잠에서 깼는데 옆에 당신이 없는 거야. 그래서 모든 일이 다 꿈인가 싶어서 덜컥 겁이 나더라고. 하지만 이렇게 안아보니 알겠어. 당신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었어. 다행이다…….”

잔뜩 잠에 취한 율리안의 낮은 목소리가 오감을 자극했다.

율리안은 레베카의 드러난 어깨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그의 남성적인 체취가 물씬 풍겨와 레베카의 아랫배에 열이 확 올랐다.

율리안에겐 그저 가벼운 애정 표현이었겠지만 레베카는 그의 농밀한 유혹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레베카는 얼른 전보를 들어 율리안의 눈앞에 가져다댔다.

“황실에서 연락이 왔어! 오늘 오후에 입궁하래!”

그리고 미꾸라지처럼 그의 팔을 벗어났다.

방이 어두운 탓에 레베카의 얼굴이 불타듯이 달아오른 건 들키지 않았다.

율리안은 전보를 받아들고는 멋쩍게 목을 긁적이고 있는 레베카를 뚱하게 바라보았다.

‘이 정도로는 안 통한다는 건가…….’

그는 신음 같은 한숨을 내쉬더니 서신을 찬찬히 읽었다.

하여간 자히드라는 매사에 도움이 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젯밤에는 어딜 간 거야? 새벽바람을 묻히고 살며시 들어오던데. 나 첫날밤부터 소박맞은 거야?”

“소박맞은 건 나지. 침대에 눕자마자 잠든 주제에.”

“참, 그랬었지. 그래서 서운했어?”

“서운했다고 하면 뭐가 달라지나? 그저 밤늦게 커피를 마셔서 잠이 안 왔을 뿐이야. 그래서 연금술탑에 갔다 왔어.”

“연금술탑?”

“응. 거기선 여러 명과 동시에 통신석으로 대화를 할 수 있거든.”

“그런 신기한 걸 당신 혼자만 알고 있었던 거야? 다음엔 나도 같이 갈래.”

레베카의 눈이 또 아이처럼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꼭 데려가 줄게. 연금술사들도 좋아할 거야.”

“그럼 어젠 누구랑 연락한 거야?”

“타니샤, 로버트, 콜린. 그리고 버틀리.”

“버틀리?”

“응. 그림자 기사단의 단장이야.”

“아, 내가 작명 센스가 구리다고 했던 그…….”

“어, 어릴 때 지은 이름이라 그래.”

“아니야. 꽤 멋있어.”

그림자 기사단은 율리안의 정예 기사단이었다.

그는 영지의 치안을 위한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하곤 법적으로 자신만의 기사단을 가지지 못하는 공작이었다.

자히드라가 황제에 즉위한 뒤로 요하네스 공작가의 힘을 빼앗으려 만든 법령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율리안은 달랐다.

율리안은 신전과 황실의 간섭을 받지 않을 자신만의 기사가 필요했다.

그는 자히드라에게 강력하게 항의한 끝에 호위 명목으로 열다섯 명의 사람만 쓸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그 열다섯 명의 기사들이 바로 그림자 기사단이었다.

열일곱 살에 만든 터라 허세가 잔뜩 들어간 이름이었다.

레베카는 그 이름을 듣자마자 배를 잡고 웃어댔다.

율리안은 지금도 레베카가 애써 웃음을 참고 있는 걸 보고 눈을 살짝 찌푸렸다.

“미안, 미안. 이젠 안 웃을게. 뭐 얻은 게 있어?”

“대충은…….”

율리안은 어제 얻었던 정보를 요약해서 그녀에게 말해줬다.

진지하게 듣던 레베카가 탄식을 내뱉었다.

“하아……. 뭐 하나 쉬운 게 없구나. 할 일이 아주 많겠어.”

“괜찮아. 당신은 여기서 쉬고 있어. 내가 다 할…….”

“그 말 금지야. 제플린이 자주 하던 말이거든.”

레베카가 조금 굳은 얼굴로 말했다. 율리안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제플린 같다니.

그만큼 큰 모욕이 또 있을까.

“알았어. 주의할게.”

“그런데 어차피 당신 말대로 당신 혼자 일해야 할 것 같아. 생각보다 공작가에서 할 일이 많아 보여서 말이지.”

“글쎄. 우리 성에는 신경 써야 할 일이 별로 많지 않은데?”

“그게 전부 고용인들의 피나는 노력 덕분이라는 생각은 안 해? 당신 하나 편하게 해주려고 다들 이 악물고 열심히 살고 있던데?”

“그래……?”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사실이었기에 율리안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손 하나 까닥하지 않아도 언제나 필요한 게 눈앞에 준비되었다.

숨 쉬듯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지, 제 편의가 누군가의 노고일 거라는 사실은 고려한 적이 없었다.

“곱게 자란 당신이 이해 못 하는 것도 당연해. 하지만 이제 알았으니 조금 더 존중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어.”

“그러도록…… 할게.”

율리안은 고분고분 대답했다. 요목조목 따져 봐도 레베카의 말이 다 맞았다.

레베카가 빙그레 웃으며 율리안의 등을 도닥거렸다.

“이제 그만 준비하셔야지요. 공작님? 폐하께서 목이 빠져라 당신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자히드라의 능글능글한 웃음을 볼 생각을 하니 속이 뒤집히는군. 게다가 데본셔 그 새끼도 와 있을 것 아니야.”

율리안은 잔뜩 싫은 소리를 하다가 이내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눈을 반짝였다.

“레베카, 점심을 한 번 더 먹을 생각 없어? 그러면 누구보다 빨리 준비해서 궁으로 갈게.”

“아직도 배가 불러 죽겠는데 또 뭘 먹으라고? 그리고 이건 당신 일이잖아.”

“간단한 간식이라도 좋아. 혼자 먹기 싫어서 그래.”

율리안은 레베카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의 말투에 애교가 조금 묻어났다. 어찌 보면 투정을 부리는 것 같기도 했다.

새삼 그가 이런 성격이었나 싶어 레베카는 웃음을 터뜨렸다.

앙칼진 고양이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는 영락없이 애교가 넘치는 강아지였다.

레베카는 율리안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고 싶은 욕구를 애써 억눌렀다.

그리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대신 간단한 과일 정도만 먹을 거야. 지난번처럼 거하게 차려주면 나 안 먹어.”

“누구 안전이라고 거짓말을 하겠어.”

마침내 원하는 것을 얻어낸 율리안의 입꼬리가 완만한 호선을 그렸다.

* * *

오늘 아침, 바리니카의 그림을 복사한 포스터가 제국 전역에 파다하게 퍼졌다.

빛의 전당에서 발표했던 그림보다 두어 점 더 추가된 그림이 담장과 바닥을 멋들어지게 장식했다.

사람들은 망측하다며 나부끼는 포스터에 신경을 쓰지 않은 척했다.

흥미롭게 그림을 관찰하다가 신의 기사단에게 발각이라도 되면 큰일 날 일이었다.

하지만 이 그림은 누가 보아도 바리니카의 그림이었다.

신전 성화로 유명한 그의 독특한 화풍은 평민들도 신전을 들락날락거릴 때마다 익히 봤기에 잘 아는 사실이었다.

잘 숨겨 두면 훗날 값어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포스터를 슬쩍 품 안에 넣는 사람의 수가 적지 않았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신의 기사단이 나서서 그림을 모조리 회수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조만간 암시장에서 바리니카의 신작이라며 암암리에 나돌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림이 나도는 건 그리 큰일은 아니지만, 문제는 많은 사람이 봤다는 점이었다.

신전의 횡포를 한 번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하루가 다르게 신전에 대한 불만이 자라나는 가운데, 전국에 퍼진 그림이 그 불만의 정체를 명확하게 정의 내렸다.

씨앗은 뿌려졌다. 아무리 솎아내도 한 번 자리 잡은 불신의 씨앗은 쉬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신전이 발칵 뒤집힌 것은 두말할 것 없었다.

신의 기사단이 영지 곳곳을 장악하고 주동자 찾기에 나섰다.

이에 자히드라는 기다렸다는 듯 급하게 국무회의를 열었다.

* * *

황궁의 회의실에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상석에 앉은 자히드라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볼리바르 추기경을 압박하듯 말했다.

“아무리 신의 기사단이 자치권을 지녔다고 하나, 내게 일언반구도 없이 국민들을 위협하는 건 월권일세.”

“폐하께선 자치권의 뜻을 모르십니까? 월권이라니요. 신전을 모독하는 그림이 제국 전체에 퍼졌습니다! 폐하께서는 어버이가 모욕을 당하는 데 가만히 계실 수 있습니까? 저희는 정당한 대응을 한 것뿐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신전은 지금 마구잡이로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있지 않는가! 제 가족을 돌려달라고 하는 곡소리가 여기 황궁까지 들리고 있네!”

“무고한 사람들이라니요? 폐하께선 신의 기사단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신의 이름하에 정당한 절차를 걸쳐 혐의가 있는 자들만을 문초하는 것입니다! 이런 무뢰배 취급이라니, 심히 불쾌합니다. 폐하!”

볼리바르 추기경이 책상을 거세게 내리치며 소리쳤다.

거침없는 그의 태도에 자히드라의 미간에 깊게 주름이 팼다.

고작 추기경 따위가 제 앞에서 이렇게 기고만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 분하고 또 분했다.

자히드라는 국무회의실에 앉아 있는 귀족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과반수가 신전을 지지하는 구귀족이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자금줄을 막아버리고 전통이라는 힘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데도 구귀족들은 버러지처럼 꾸역꾸역 살아남아 있었다.

‘썩은 뿌리라도 뿌리는 뿌리라는 것인가.’

자히드라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목을 쳐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폭정을 일삼는 황제가 되기 십상이었다.

자히드라는 명예를 저버린 권력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자히드라의 굳은 얼굴을 응시하던 첼스턴이 추기경을 향해 말했다.

“이보십시오. 추기경! 폐하의 앞입니다. 언사를 조심하십시오.”

“지금 제가 흥분하지 않게 생겼습니까? 당장 주동자를 잡아내 엄한 벌을 내려야 합니다. 이는 오로지 신전의 일로써, 폐하께서는 간섭하실 권한이 없습니다!”

“간섭할 권한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망발이시오!”

첼스턴이 언성을 높이자 구귀족의 수장인 랭스터 후작이 기다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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