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추기경의 말씀이 영 틀린 것 같지는 않소만. 신전의 자치권은 로탄더스의 초대 황제 때부터 인정해 온 것이오. 그런데 모욕한 자도 마음대로 잡지 못해서야 어디 자치권이 있다 할 수 있겠느냐 이 말이오. 이건 제국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오.”
“언제부터 제국의 근간이 신전이었습니까? 제국의 근본은 로티카나 황실입니다!”
“첼스턴 서몬드 백작! 당신도 종교 재판에 회부되고 싶지 않으면 말을 삼가야 할 것이오!”
“그렇다고 지금 마녀사냥을 하자는 게요? 지난 역사가 부끄럽지도 않소?”
곧이어 구귀족과 신흥귀족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급기야 험한 말까지 오가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완전 난장판이 따로 없군.’
율리안은 혀를 끌끌 차며 제플린의 빈자리를 흘깃 쳐다봤다.
그는 아프다는 핑계로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제플린이 참석하지 않은 진짜 이유가 따로 있다는 걸 율리안은 알고 있었다.
‘제 집에서 벌어졌던 일이 이렇게까지 커졌으니 혐의를 감당할 수 없는 거겠지.’
어떻게 보면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었다.
율리안은 애써 준비한, 제플린의 얼굴을 일그러뜨릴 발언을 쓸 수 없다는 게 못내 아쉬워 입맛을 다셨다.
“그래서 요하네스 공작의 생각은 어떻소?”
회의가 파국으로 치닫자 자히드라가 율리안에게 넌지시 물었다.
일순 소란이 잠재워지고 모두의 시선이 율리안을 향했다.
하지만 다들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율리안은 언제나 그랬듯이,
‘다른 생각을 하느라 못 들었습니다만, 다른 분의 의견을 들어보시지요. 저보다 할 말이 많으신 것 같은데.’
……라며 심드렁하게 대답할 게 뻔했다.
율리안은 자히드라의 매서운 눈초리를 흘깃 쳐다봤다.
네가 일의 주동자이니 알아서 해결하라는 의미였다.
‘결국 내가 나서야겠군.’
율리안은 헛기침을 하며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아 잠긴 목을 풀었다.
“저는 이 일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추기경의 생각에 깊게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 말에 신흥귀족 사이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볼리바르 추기경이 네가 웬일이냐는 얼굴로 율리안을 바라봤다.
“하지만 무분별한 희생 또한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세기에 일어난 마녀사냥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는 여기 모이신 분들은 다들 아실 겁니다.”
“그건 그 당시의 교황의 독단적인 행동입니다. 후에 그 교황은 이단으로 처형되고 신전에서 사과와 충분한 배상을 했습니다. 아주 오래된 일이니 더 이상 들추지 마십시오.”
볼리바르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율리안에게 말했다.
율리안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지난 일을 들추자는 게 아닙니다. 전례가 있으니 조심하자는 겁니다. 그리고 애초에 논쟁의 주제 자체가 틀려먹었습니다.”
“그게 무슨……?”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부터 따져봐야죠.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벽에 나붙은 그림들이 과장하는 면은 있으나 현 세태를 정확히 지적하고 있지 않습니까?”
랭스터 후작이 의자의 팔걸이를 부술 듯이 잡아 쥐고서 율리안을 노려봤다.
“율리안 요하네스 공작! 그게 신을 섬기는 가문의 수장으로서 할 이야기인가!”
선대와 다르게 중립을 지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기어이 그는 황제의 편으로 넘어간 모양이었다.
역시 결혼식장에서 황제가 그의 아버지 노릇을 자처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랭스터는 심기 불편한 기색을 역력하게 드러냈다.
율리안은 이제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그는 서늘한 얼굴로 테이블 위에 손깍지를 낀 손을 올려두었다.
“랭스터 후작님, 제가 언제 데프리아 여신을 모욕했습니까? 지나친 비약은 하지 마십시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일부’ 신관과 사제들이 신전의 명성을 더럽히고 있다는 말입니다.”
방금까지도 율리안의 계획에 일조한 걸 조금 후회하고 있던 자히드라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율리안은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회의실을 찬찬히 둘러봤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좌중을 압박했다.
“이제 신전은 인정해야만 합니다. 고귀한 데프리아교를 좀먹는 쥐새끼들이 곳곳에 있다는 것을요. 아, 물론 우리 깨끗하신 교황님과 여기 계신 추기경 전하와는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상관없다는 말에 볼리바르는 더는 반박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반박했다가는 자신도 율리안이 말한 그 ‘쥐새끼’ 취급을 받을 수 있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황궁까지 신의 기사단을 몰고 오려던 그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율리안은 치켜뜬 눈을 내리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몽블랑 클럽을 설득했던 신성한 미소였다.
그는 겸손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데프리아 여신님의 가호를 받는 저로서는 ‘일부’ 신관과 사제들의 행태를 더 이상 지켜보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차라리 잘된 일이 아닙니까? 이번 일을 계기로 부패한 이들을 몰아냅시다. 데프리아 여신의 더럽혀진 이름을 깨끗이 씻어내고 신전의 명예를 되찾읍시다. 제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볼리바르 추기경 전하?”
볼리바르는 경악한 채 율리안을 쳐다봤다.
여유롭게 웃는 그가 여태껏 제가 아는 그가 맞나 싶었다.
그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황실에 신전의 횡포를 고발하는 상소가 빗발치고, 무시하지 못할 수의 신학자들이 매번 항의문을 신전으로 보내왔다.
민심을 점차 잃어가는 걸 추기경도 잘 알고 있었지만, 돌이키기엔 그동안 너무 많이 해먹었다.
양손에 금화를 쥐고도 눈앞의 동전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의 욕망이었다.
그러니 율리안의 말대로 지금이 민심을 돌이킬 좋은 기회일지도 몰랐다.
대충 몇십 명 정도의 신관과 사제들을 골라내어 본보기로 잘라내 버리면 자신에게 아무런 불이익이 없었다.
오히려 공명정대한 추기경으로 훗날 교황으로 추대받을 좋은 패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황제가…….’
추기경은 어느새 원래의 인자한 얼굴로 돌아온 자히드라를 바라봤다.
이건 황제가 신전에 참견을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추기경이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율리안이 그의 선택을 기꺼이 도왔다.
“설마 추기경께선 데프리아 여신의 오명을 회복하는 일을 망설이시는 건 아니겠지요? 저는 추기경 전하만큼은 여느 쥐새끼들처럼 신과 재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이들과 아주 다를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틀렸습니까?”
‘빌어먹을.’
랭스터 후작은 속이 타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추기경이 도망갈 구석이 없었다.
“다, 당연히 아닙니다. 성하께서도 부패한 신관들을 경계하고 계셨습니다. 요하네스 공작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추기경의 억지 미소가 볼만했다.
자히드라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다급히 참았다.
그는 짐짓 고민하는 척을 하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나도 신전의 성전을 적극 도와주겠네. 우리 로탄더스 제국의 근간을 지켜야지, 암.”
“아닙니다. 폐하께서 부러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희 선에서 해결…….”
“사양하지 말게나. 그렇지. 사치 금지령을 내리는 게 어떤가.”
“예? 사치 금지령이요……?”
“내 금지령이라 말하긴 했으나 무력적인 제재를 하자는 건 아닐세. 다만 권장을 한다는 거지. 국민들이 다 같이 나서서 도박을 줄이고 지나친 투기도 줄인다면 국력 신장에 좋지 않겠나.”
“하지만 그건 평등한 쾌락을 주장하는 국교의 교리와 맞지 않습니다.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니지. 교리가 하나 더 있지 않는가. 다른 사람의 쾌락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쾌락을 누릴 수 있다는 교리가 있잖는가. 부패한 ‘일부’ 신관과 사제의 행위는 사기나 다름없는 일이지. 그것만큼 다른 이의 쾌락을 방해하는 일이 또 있겠는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첼스턴이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그를 필두로 신흥귀족들이 황제의 의견에 적극 찬성하고 나섰다.
이는 자히드라의 편을 확실하게 솎아낼 수 있는 계책이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선언했는 데도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유지한다면 그와 척을 지겠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이제 마음 편히 레베카를 만나러 갈 수 있겠군.’
율리안은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자신의 변화가 신기해서 그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랭스터 후작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승리의 미소를 지어? 율리안 요하네스. 오늘 일이 기필코 후회할 것이다.’
그가 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소란 속에 묻혔다.
* * *
“아직도 일하고 있는 거야? 무리하지 말라니까.”
율리안은 과일 접시를 들고서 아직까지 불이 켜진 집무실을 향했다.
그는 토끼 모양으로 직접 깎은 사과를 들고서 자신이 온지도 모른 채 서류에 코를 박고 있는 레베카에게 내밀었다.
레베카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다가 마지못해 그가 건넨 사과를 받아들었다.
아삭-
적막한 집무실 안에 사과를 베어 무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올해 수확한 사과야? 달콤하네.”
“응. 이번엔 풍년이야. 특히 과일들이 아주 실해.”
율리안은 곱게 눈을 접고는 자신도 사과를 집어 들었다.
그는 놓게 쌓인 서류 더미를 흘깃거리다 말했다.
“좀 쉬어가면서 해. 어느 정도는 벨마에게 넘겨도 괜찮아. 지금껏 그녀가 잘해왔어.”
“율리안. 벨마는 하녀장이야. 이곳의 안주인이 아니라고.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당신은 고용인들의 업무 고충에 대해 알 필요가 있어.”
“일을 많이 시키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만큼 돈을 많이 주잖아.”
“돈이면 다가 아니야. 그 돈을 쓸 시간이 없는데 억만금이 무슨 소용이야.”
율리안은 조금 찔려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제 밑의 사람들이 항상 일이 너무 많다고 비명을 지르던 게 생각났다.
오늘은 유스타프의 울음 섞인 편지를 받기도 했지…….
“그러면 휴가를 주면 되겠군. 당장 내일부터 몇 명을 추려서…….”
“이미 내가 줬어.”
“뭐?”
“미안. 당신이 나가 있는 동안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했어. 당장 과로사할 것 같은 사람이 많아서 말이야. 쓸데없는 곳에는 인력이 너무 많은데, 필요한 곳에는 또 사람이 너무 적어서 인사도 내 마음대로 처리했어.”
레베카는 인사 관련 서류를 찾아내어 율리안에게 내밀었다.
율리안은 떨떠름한 얼굴로 인사 명단을 훑었다.
이 정도로 깔끔한 보고서는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