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당신, 어디서 회계사로 일을 한 적이 있는 거야? 이런 건 또 어디서 배웠어?”
“응? 배…… 운 적은 없어. 난 뭐든지 빨리 배우는 편이니까…….”
레베카는 조금 찔린 얼굴로 대충 웃고 얼버무렸다.
사실은 이전 생에서 라본느 살롱에서 일할 때 잠깐 동안이지만 경리 일을 본 적이 있었다.
깔끔한 걸 선호하는 마가렛의 입맛에 맞추려고 전전긍긍하다 얻어낸 게 지금의 능력이었다.
그래도 살롱의 장부를 쓰는 것과 집안 가계부를 작성하는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별다를 바가 없었다.
덕분에 레베카는 수월하게 공작 부인의 일에 적응할 수 있었다.
“사과가 참 맛있네. 귀엽기도 하고. 당신이 직접 깎았어?”
“뭐…… 그렇지. 지금 이 시간에 주방장을 깨우긴 미안해서 야참 정도는 내가 만들어 먹어.”
“의외의 재능이네. 사람을 굴리기만 할 줄 알았더니 주방장을 배려할 줄도 알고.”
“아. 그렇지. 조만간 당신 가족들을 초대하자.”
“우리 가족을?”
“응. 저번에 어머니가 오셨을 때 좋아하셨던 것 같아서. 처제들도 보고 싶고.”
공작 성에 온 이후로 레베카는 쉴 틈 없이 일에만 매달렸다.
결국 코피까지 쏟자 보다 못한 율리안이 그녀에게 말했다.
‘대체 왜 그렇게 일에 매달리는 거야. 당신이 굳이 나서서 일할 필요 없다니까. 사람을 더 구해줄 테니 그만 좀 쉬어.’
율리안의 호소에도 레베카는 요지부동이었다.
‘난 바쁘게 일하고 싶어. 계약 결혼이지만 그래도 공작 부인이 된 이상 이곳에 필요한 사람이고 싶다고.’
‘레베카, 당신은 존재만으로도…….’
‘그만. 그 말 앞으로 금지야. 아주 지긋지긋해.’
레베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제플린은 입버릇처럼 그녀에게 ‘존재만으로도 그 가치를 다 한 사람’이라고 속삭이고는 했다.
그리고 그 말은 레베카를 새장 속에 가두었다.
‘잘 들어. 세상에 존재만으로 가치 있는 사람은 없어. 설사 남들이 날 그렇게 여긴다 하더라도 내가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이상 내 가치는 만들어지지 않아.’
감정이 격해졌는지 레베카는 잠시 숨을 몰아쉬고 말을 이어갔다.
‘남이 인정해주는 가치 따위는 필요 없어. 난 스스로에게 내 존재를 증명할 거야. 그러니 뭐든 해야겠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거야. 내가 살아 있다고 느낄 수 있게끔.’
그동안의 설움을 풀어내듯 토로하는 레베카의 말투에 율리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도무지 레베카를 설득할 방도가 없어 그는 계책을 짜내어 그녀의 가족을 초대하기로 했다.
가족이 온다면 레베카도 손에 쥔 일감을 잠시 내려놓고 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레베카의 눈이 반짝이는 걸 보니 자신의 계략이 먹힌 모양이었다.
율리안은 쾌재를 부르며 이제 하나 남은 사과를 레베카에게 주려는 순간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가족이라니까 생각난 건데, 나한텐 언제 소개해 줄 참이야?”
“누굴……?”
“당신 가족 말이야. 한 명 더 있잖아. 릴리아나 말이야.”
레베카가 한층 기대에 찬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돌았던 광채는 가족을 만나리라는 기대감 때문이 아니었다.
‘릴리아나라니. 대체 그녀가 릴리의 본명을 어떻게 안 거지?’
율리안이 당황함을 숨기려 마른세수를 했다.
* * *
제플린은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서 거울을 바라보았다.
레베카의 결혼반지 때문에 생긴 상처에 이제야 딱지가 앉았다.
“저를 데려가지 않으니 이런 일이 생긴 거예요. 속상해라.”
알리시아가 흉이 남지 않게 하는 연고를 들고 거울 방으로 거침없이 들어왔다.
제플린은 제 구역이 침범당해 내심 불쾌했으나 입을 꾹 다물었다.
아직까지는 상냥한 제플린의 이미지가 필요했다.
알리시아는 직접 손으로 연고를 발라주려고 했다.
제플린은 그것까진 참지 못하겠는지 은근슬쩍 그녀의 손을 피하며 연고를 받아들었다.
“아니…… 괜찮아. 내가 할게. 당신은 거동도 힘들 텐데 여기까진 웬일이야.”
“요즘은 허리도 그렇게 아프지 않고, 건강 상태도 무척 좋아요. 태동도 예전보다는 견딜 만하고요. 엄마가 힘들다는 걸 우리 애가 아는 게 아닐까요?”
알리시아가 사랑스럽게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제플린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한 귀로 흘려들으며 제 상처만 들여다봤다.
“아, 그렇지. 저, 잠시 외출을 할까 해요.”
“뭐? 어딜?”
외출이라는 말에 제플린은 습관적으로 미간을 접었다.
알리시아는 만삭인데도 불구하고 쇼핑이다 뭐다 하며 밖을 잘도 쏘다녔다.
“페튜니아 후작 부인이 저와 쇼핑을 하고 싶다고 하셔서요. 갔다 와도 되죠?”
들어주지 않으면 저택이 떠나가라 울며 결국 제 마음대로 할 거면서 알리시아는 꼬박꼬박 제플린의 허락을 받았다.
“당신 좋을 대로 해.”
레베카였다면 어림도 없을 일이었지만 제플린은 흔쾌히 그녀의 외출을 허락했다.
저택에 그녀가 없는 편이 제플린에게도 좋았기 때문이었다.
수다스러운 알리시아가 없어지면 저택은 고요함으로 물들었다.
물론 외출을 다녀온 알리시아가 평소보다 몇 배로 시끄럽게 굴겠지만, 그래도 제플린은 그 찰나의 고요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해. 조금이라도 힘들면 당장 집으로 돌아오고. 난 내 아이가 내 집이 아닌 곳에서 태어나는 꼴은 죽어도 못 봐.”
“그럴게요! 고마워요. 당신!”
허물없는 호칭에 제플린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언제나 자신을 백작님이라고 부르던 알리시아는 어느새부터인가 당신, 여보, 심지어 제플린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친절한 데본셔 백작…….’
제플린은 속으로 자신이 연기해야 할 모습을 되뇌며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알리시아는 파르르 떨리는 그의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하고는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제플린의 방을 박차고 나섰다.
그녀는 벌써부터 어떤 것을 사야 할지 머릿속으로 고르고 있었다.
“드디어 갔군.”
제플린은 알리시아의 입술이 맞닿은 곳을 손으로 벅벅 문지르고는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보기 흉하게 찢어진 상처가 그에게 아픈 패배를 일깨워 주었다.
‘여기서 약자는 당신이야.’
카림의 그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약자라는 개념은 제플린에게 생소한 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우위에 서 있었고,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자신에게 굽실거리기 바빴다.
그건 숨 쉬듯이 당연한 일이었고, 그는 자신이 강자라는 점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결혼식 날, 그는 먹이사슬의 최하층이 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카림의 완력을 당해낼 수 없었고, 하찮은 하녀가 자신을 제압했으며 그 레베카조차도 자신을 걷어찼다.
이쯤 되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완패였다.
“이유가 뭘까.”
패배감이라는 생소한 감정이 오히려 제플린의 머리를 이성적으로 바꿔놓았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레베카를 되찾는 데 미쳐 있던 나머지 생각이란 걸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플린은 천천히 거울 방을 나섰다.
단장이 끝난 그의 얼굴은 상처가 있다 하더라도 완벽하게 빛을 발했다.
“이것도 마음에 안 들어! 저번에 맞춘 드레스는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침실을 나서자마자 들려오는 알리시아의 새된 목소리가 그의 번잡한 속을 더욱 긁어댔다.
그는 알리시아의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를 벗어나고자 정원으로 도망쳤다.
보기 좋게 물든 아름드리 단풍나무 밑에 자리를 잡은 제플린은 사색에 잠겼다.
그런 그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아 종종걸음을 치던 고용인들이 잠시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곤 했다.
‘제국에 단둘밖에 없는 공작이 서로 편을 먹었으니 내가 당해낼 수가 없지.’
카림은 재력은 없었으나 군사력이 있었고, 율리안은 명예와 재력은 있었으나 군사력이 없었다.
둘이 마음만 먹으면 로탄더스 제국 하나쯤은 집어삼킬 수 있었다.
제플린은 둘이 결착했다는 증거를 확보해 황제를 찾아갈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반역은 위험한 패였다. 증거가 완벽하지 않으면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황제가 율리안의 결혼식에 아버지의 자리에 앉았다.
이미 율리안이 황제의 편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황제는 자신을 싫어했다. 가을 무도회의 소동 이후로 그 사실이 명확해졌다.
고민에 휩싸인 제플린은 결혼식 내내 굳어 있던 데스라치노 교황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래, 교황이 있었지…….”
황제와 율리안의 세력이 커지는 걸 가장 두려할 자는 데스라치노였다.
그는 명확히 율리안의 편이 분명했지만, 율리안이 황제와 손을 잡은 이상 교황의 생각은 분명이 변했을 것이다.
제플린은 거기에 한번 걸어보기로 했다.
게다가 확인해야 할 일도 있었다.
“그때 분명 율리안이 괴로워했어.”
자신이 걷어찬 건 그 꺼림칙한 검은 고양이었다.
그런데 고양이는 털끝 하나 괴로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율리안이 허리를 구부렸다.
그가 고양이를 찼던 바로 그 부위였다.
그리고 그의 목에 있던 선명한 손자국.
소문을 들어보니, 피로연장에 있던 율리안이 갑작스럽게 호흡하기 어려워했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자신이 고양이의 목을 조르던 때와 시기가 맞아떨어졌다.
‘뭔가가 있어.’
그러고 보면 석연찮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항상 검은 고양이를 대동해서 다니는 것도 어쩌면 단순한 보여주기 식이 아닐지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요하네스가와 밀접하게 관련된 신전이라면, 그 해답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제플린은 추측했다.
문득 낙엽 하나가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제플린은 제 정수리에 닿기 전에 낙엽을 낚아챘다.
피가 번진 것처럼 붉은 낙엽이었다.
제플린은 짓이기듯이 낙엽을 움켜쥐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저보다 강자라면 약자로 만들면 그만이었다.
그는 옥타비오가 의중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교황과 접선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 * *
“정말이야? 정말 오빠가 피크닉을 같이 가자고 했단 말이야?”
릴리가 유모 조세핀의 전언에 눈을 빛내며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렇게나 좋으실까.
조세핀은 흐뭇하게 웃으며 방방 뛰는 릴리를 바라봤다.
“제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보셨어요? 게다가 이번에 새로 오신 공작 부인께서도 함께하신다 하셨습니다.”
“정말? 레베카 그 언니도 같이 오는 거야?”
“아가씨. 부인이요. 함부로 언니라 부르시면 못 써요.”
“알았어. 하여튼 그 예쁜 언니도 같이 피크닉을 같이 간단 말이지?”
조세핀이 부러 고쳐 줬는 데도 릴리는 그녀의 충고를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신에 언제 어디서 뭘 하느냐는 질문을 속사포처럼 쏟아내며 방 안을 깡충거리며 뛰어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