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피크닉에 쓸 소지품을 분주하게 모으던 릴리의 눈이 토끼 모양을 한 앙증맞은 탁상시계에 맞닿았다.
시계는 어느덧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조세핀!”
시간을 확인한 릴리가 조세핀을 부르며 쪼르르 창가로 다가갔다.
조세핀이 얼른 의자를 가져오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가을바람이 릴리의 작은 콧잔등을 간지럽혔다.
릴리는 익숙하게 창가에 두 팔을 괴고는 정원을 내려다봤다.
앞으로 몇십 분 동안 그녀는 똑같은 자세로 있을 터였다.
조세핀은 정신없이 밖을 구경하는 릴리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조용히 제 할 일을 하러 밖으로 나갔다.
방해하지 않는 게 오히려 릴리를 도와주는 일이었다.
새로운 공작 부인이 온 후로 릴리는 오후 3시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3시가 되면 레베카가 어김없이 정원으로 산책을 하러 나왔다.
율리안은 눈에 불을 켜고 레베카가 산책의 여부를 검사했다.
그는 다른 건 몰라도 레베카의 건강에는 엄격했다.
레베카는 하는 수 없이 아무리 급박한 일이 있더라도 정해진 시간마다 피곤에 찌든 몸을 일으켜야만 했다.
“오늘은 하늘색 벨벳 드레스를 입었네. 머리에 꽂은 나비 장식이랑 너무 잘 어울린다!”
릴리는 바닥에 닿지 않는 발을 굴리며 망원경을 들어 레베카를 요리조리 관찰했다.
사실 그녀가 공작 부인으로 이곳에 오기 전 릴리는 그녀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날은 레베카가 공작 성을 처음 방문한 날이기도 했다.
그 당시 릴리는 몰래 방을 빠져나오는 탈출 게임에 한창 빠져 있었다.
공작 성에는 놀 거리가 별로 없었다.
율리안이 매달 진귀한 장난감을 사주기는 했지만, 정작 그것을 가지고 같이 놀 만한 또래가 없기 때문이었다.
유모나 하녀들과 노는 것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어른의 시선으로는 아이의 무한한 상상력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서 릴리는 스스로 게임을 고안해내고는 했다.
밧줄을 만들어 창문으로 탈출하기도 하고, 이불 빨래 사이에 숨어 별채를 빠져나가기도 했다.
그리고 조세핀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찾으러 올 때면 꼭 숨바꼭질을 하는 것 같아 즐거웠다.
보통 늦은 밤이 되었을 때 탈출을 감행하곤 했다.
하지만 그날은 유독 공작 성이 소란스러웠다.
조세핀이 수수께끼의 손님에 대해 일러주자 오랜만에 찾아온 호기심에 릴리는 가슴이 설렜다.
그녀는 결국 저녁 식사 시간이 조금 지나간 즈음에 별채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고아원에 기부할 장난감 박스 속에 숨어 별채를 빠져나온 릴리는 그대로 정원으로 향했다.
미스터리한 손님이 공작 성에서 저녁 식사까지 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지금까지 손님이 방문할 때를 분석해 보면 오빠와 손님은 식사 후 산책을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때 손님의 얼굴을 확인하자고 생각하며 릴리는 덤불 속에 몸을 숨겼다.
문제는 어느 정원으로 산책을 하느냐였는데, 이것도 릴리에겐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릴리는 세 개의 정원에 있는 입구마다 각기 다른 색의 실을 연결해 두었다.
그리고 모든 실은 지금 릴리가 있는 첫 번째 정원인 장미 정원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율리안이 그 실을 발견하긴 했지만 그저 릴리의 장난이겠거니 하고 자르지 않고 그대로 두게 했다.
어린애라는 점이 이럴 때는 편리했다.
갇혀 있기는 해도 릴리는 또래 아이들보다 고등교육을 받았다.
고작 열한 살이었지만 그녀의 지식 수준은 두어 살 많은 아이들보다 뛰어났다.
릴리는 학자가 꿈이었다던 어머니의 머리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숨 막히는 기다림이 이어졌다.
꾸벅꾸벅 감기는 눈을 억지로 붙잡고 있던 순간 초록색 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푸른색 실도 같이 움직였다.
하나는 연무장과 연결되어 있는 미로 정원이었고, 하나는 영원한 빛의 정원이었다.
릴리는 두 가지의 선택지를 앞에 두고 분홍색 솜사탕 같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손님들이 오면 영원한 빛의 정원에 자주 가기는 했는데…….’
영원한 빛의 정원은 연금술로 만들어낸 사시사철 피는 럭스꽃이 있었다.
꽃이라기엔 마석을 조각한 것에 가까운 럭스꽃은 밤이 되면 환한 빛을 뿜어내서 손님들의 눈요깃거리로 아주 적당했다.
하지만 오늘은 미로 정원이 끌렸다. 어쩐지 그곳으로 가야만 할 것 같았다.
조금 더 고민하던 릴리는 결국 미로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체 여기가 어딘지…….”
그리고 그녀의 판단은 아주 잘 맞아떨어졌다.
길을 잃은 손님이 미로 정원을 헤매고 있었다.
“여기예요! 여기! 제가 길을 잘 알아요!”
근처에 율리안이나 다른 고용인들이 없는 걸 확인한 릴리는 얼른 덤불 속에서 튀어나왔다.
검은 베일을 쓴 여자가 멈칫하며 갑자기 등장한 소녀를 바라봤다.
소녀의 몽실한 분홍색 머리칼은 나뭇잎과 뒤엉켜 엉망이었다. 콧잔등에는 흙까지 묻어 있었다.
얌전함과는 거리가 먼 소녀의 모습에 레베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용인의 딸인가?’
하지만 소녀가 입고 있는 옷은 평민이 입기엔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급진 옷이었다.
레베카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윤기가 흐르는 드레스의 원단을 훑어봤다.
릴리는 흙이 묻은 제 손을 옷자락에 벅벅 문질러 닦고는 레베카에게 자그마한 손을 내밀었다.
“제 이름은 릴리예요!”
그 말에 레베카는 멈칫했다.
‘불쌍한 우리 릴리 아가씨, 어쩌다 사내아이를 낳으셔서…….’
이전 생에서 들었던 크로아의 중얼거림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래도 지금 눈앞의 깜찍한 소녀는 율리안의 여동생인 모양이다.
레베카는 릴리를 세심하게 관찰했다.
릴리는 놀랍도록 율리안과 닮은 구석이 전혀 없었다.
날카로운 율리안의 눈매와 달리, 릴리는 토끼처럼 크고 둥그런 눈망울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녀의 오빠는 이목구비가 큼직하고 뚜렷한 데 반해, 릴리의 얼굴은 조약돌처럼 오밀조밀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그녀가 가진 어떤 특징에서도 율리안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총기가 들어찬 눈빛만은 그와 꼭 닮아 레베카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내 이름은 레베카란다.”
“레베카……. 그럼 베키라고 불러도 돼요?”
아이는 단번에 레베카의 애칭을 불렀다.
자신의 얼굴도 모르면서 허물없이 대하는 릴리의 모습에 레베카는 적잖이 놀랐다.
‘오랫동안 갇혀 살았다기에 경계심이 많을 줄 알았더니…….’
그녀는 오히려 또래의 여자애들보다 더 수줍음이 없었다.
릴리는 조금 의기소침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저, 저도 진짜 이름을 말해줄 수 없어서 그런 거였어요. 모두들 절 애칭으로만 불러요. 그러니 저도 베키를 애칭으로 불러야 공평하잖아요.”
진짜 이름? 릴리가 애칭이었어?
많은 의문이 떠올랐지만 레베카는 제 눈치를 보는 아이에게 진실을 캐물어 볼 수 없었다.
“그래. 편하게 부르렴.”
“좋아요! 그럼 베키! 여길 빠져나갈 수 있게 제가 도와드릴게요.”
릴리는 휼륭한 안내자였다. 그녀는 미로 정원이 손바닥 위에 있는 듯 훤히 길을 꿰뚫고 있었다.
“이쪽이에요! 이쪽으로 나가면 연무장이 나와요. 연무장만 찾으면 성으로 돌아가긴 쉬울 거예요.”
가정교사를 제외한 외지인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릴리는 생기 넘치는 눈을 반짝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릴리는 저 검은 베일 안에는 어떤 얼굴이 숨어 있을까 상상하면서 수수께끼의 손님을 안전하게 미로 정원 밖으로 안내했다.
레베카는 신나게 폴짝거리는 소녀가 꼭 다람쥐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 말 맞죠?”
어느새 탁 트인 연무장의 흙바닥이 보였다.
릴리는 의기양양하게 손을 허리춤에 올리고선 레베카를 바라봤다.
“저 길을 따라서 가면 금방 성으로 갈 수 있어요.”
릴리가 가리킨 연무장으로 난 샛길은 그녀의 말대로 곧바로 본성으로 이어져 있었다.
멀리서 율리안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릴리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가야 하는 거죠? 괜찮아요. 짧지만 덕분에 즐거웠어요!”
레베카는 율리안의 외침이 들리는 곳과 릴리를 번갈아 쳐다봤다.
릴리는 웃고 있었지만 자신의 눈을 피하며 괜히 발부리로 흙을 파고 있었다.
아이가 저렇게 씁쓸하게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을 레베카는 그날 처음 알았다.
“잠시라면 조금 더 있어도 될 것 같은데.”
“네?”
“여길 소개해 주겠어? 내가 여태껏 봤던 연무장 중에 가장 근사한 곳이구나.”
사실 연무장이란 게 거기서 거기였지만 릴리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지는 걸 보고 레베카는 자신이 좋은 선택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레베카는 릴리의 열성적인 설명을 들으며 느릿하게 넓은 연무장을 거닐었다.
“여기선 검술을 연습해요. 이 지푸라기 인형을 내리칠 때 얼마나 재밌는지 몰라요.”
“어머, 릴리는 검술도 할 줄 아니?”
“우리 오빠가 자기 한 몸쯤은 지킬 줄 알아야 한다고 했거든요. 오빠가 직접 가르쳐주면 좋을 텐데…….”
“오빠? 릴리한테 오빠가 있니?”
레베카는 릴리의 정체를 짐짓 모른다는 투로 되물었다.
릴리가 아차, 하고 제 입을 막더니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그, 그게…….”
하지만 이내 오빠는 여느 평범한 아이들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레베카는 문득 오빠 노릇을 하는 율리안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네 오빠는 어떤 사람이니? 난 항상 오빠가 있었으면 해서 오빠를 가진 사람을 보면 항상 부럽고 궁금했거든.”
“우리 오빠요? 오빠는 세상에서 제일 멋진 사람이에요! 잘생겼고 키도 크고요. 엄청엄청 강해요! 저번에 기사들하고 겨루는 걸 몰래 봤는데 정말 대단했어요! 그리고 맛있는 것도 많이 가져다줘요! 물론 음식을 함께 먹은 적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그게 오빠가 주는 거라는 건 알아요. 또 오빠는…….”
릴리는 율리안의 칭찬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레베카는 당근을 오물거리는 토끼처럼 쉴 틈 없이 입을 움직이는 릴리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릴리는 레베카가 성심성의껏 제 말을 들어주자 볼이 상기되었다.
율리안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올리면 조세핀이나 하녀들은 ‘또 시작이네.’라는 표정을 지으며 억지로 제 말을 듣고 있단 걸 그녀는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사랑이 부족한 어린이는 쓸데없이 눈치가 빠른 법이다.
릴리는 그들이 제 이야기를 지루해하는 걸 알면서도 오빠의 이야기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대화가 고팠다.
하지만 가정교사나 외지인에게 자신에 대한 정보를 흘리는 건 금지되어 있었다.
그 탓에 그녀의 말을 들어줄 사람은 조세핀과 몇 명의 하녀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