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16화 (116/232)

116.

쳇바퀴에 갇힌 릴리의 삶 속에서 새로운 일은 없었다.

자연스레 대화거리도 점점 줄어들었다.

릴리는 허무맹랑한 모험 이야기를 꾸며서 그들에게 종종 들려주곤 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녀는 상상 속이 아니라 현실에서 살고 싶었다.

그녀의 좁은 세상에 존재하는 현실의 이야기라곤 율리안에 관한 일화뿐이었다.

그것조차 오래된 일화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릴리는 필사적으로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때론 오빠의 일과를 훔쳐보며 이야깃거리를 얻기도 했다.

자신의 말에 상대방이 웃으면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아직은 자신이 평범한 사람들과 같은 세상에 속하는구나 싶어 입술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그래서 릴리는 검은 베일 속에서 레베카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올 때면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 그렇지! 오늘 오빠가 사격을 했는데 한 발도 못 맞췄지 뭐예요. 고양이들이 맞을 뻔했대요.”

“그래? 율리안이 사격을 못하는 편이야?”

“그럴 리가요. 우리 오빠만큼 사격을 잘하는…….”

릴리의 눈이 왕방울처럼 커졌다.

레베카는 순간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우리 오빠 이름이 율리안인 거 어떻게 알았어요……?”

베일을 벗고 있었다면 제 이마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레베카는 볼의 안쪽 살을 잘근거리며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릴리가 겁먹은 얼굴로 레베카를 올려다봤다.

공작 성 주위에는 요하네스가의 비밀을 캐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항상 어슬렁거렸다.

신성한 가문이라는 건 사람들의 존경을 사기 쉬웠지만 그만큼 추문에 휩싸이기도 쉬웠다.

요하네스가의 어린이답게 릴리도 어릴 때부터 그런 사람을 주의하라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하지만 자신은 멍청하게 낯선 사람에게 모든 걸 불어버렸다.

심지어 그녀가 정말 율리안의 손님인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였다.

그저 누군가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정신이 팔려 이런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다니!

<요하네스 율리안 공작의 숨겨진 여동생, 그녀는 누구인가!>

자극적인 기사 제목이 저절로 떠올라 릴리는 손을 떨었다.

릴리는 레베카의 팔에 매달렸다.

그녀의 자홍색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어떡…… 어떡해! 혹시 기자는 아니죠? 제 이야기를 세상에 밝힐 건가요? 그러지 말아주세요. 그러면 오빠가 저를 정말 미워할 거예요.”

레베카는 금방이라도 후두둑 떨어질 것 같은 눈물 젖은 릴리를 보고 한껏 당황했다.

하지만 이윽고 릴리의 반응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비밀을 들킨 걸 우려하는 것을 넘어 릴리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율리안이 자신을 미워할지도 모른다는 말.

그 말이 레베카를 아프게 찔렀다.

‘정해진 음식 외의 것을 먹으시다니요!’

‘알리시아! 이건 어머니께서 주신 거야. 단순한 간식이 아니라고. 그러니 제발 이르지 말아줘.’

‘어머나, 게다가 외부 음식이었어요? 과연 백작님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궁금하네요.’

‘알리시아, 제발……. 요새 남편이 날 잘 찾지 않는 걸 잘 알잖아. 이걸 들키면 그는 이젠 날 미워할지도 몰라. 그러니 비밀 지켜줘. 부탁이야.’

‘우습네요. 어디 한번 더 빌어보세요. 혹시 아나요? 제가 당신을 불쌍히 여겨서 모른 척해줄지?’

레베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알리시아의 코웃음 치는 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닮았다. 자신에게 비밀을 지켜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릴리의 표정이 그때의 자신과 닮아 있었다.

어째서 이 아이에게서 자신이 모습이 보이는 걸까.

선득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레베카는 기분 탓이라 여기며 자신의 직감을 애써 무시했다.

“릴리. 난 기자가 아니야. 그리고 네 비밀을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심지어 네 오빠한테도.”

“정말이에요?”

릴리는 레베카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그리고 여전히 불신 가득한 눈으로 레베카를 쏘아봤다.

릴리를 안심시키려는 방법이 어떤 것이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레베카는 천천히 베일을 벗었다.

“그러면 내 비밀도 알려줄게. 서로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면 안심이 되겠지?”

“비밀……?”

“그래. 나는 저주받은 사람이란다. 여기 붉은 반점들이 보이니? 이게 바로 그 증거야.”

릴리는 주춤거리며 얼굴을 들어낸 레베카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뻗어 레베카가 말한 붉은 반점을 손으로 조심스레 문질렀다. 진짜인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아야야…….”

릴리의 손이 닿은 환부가 조금 쓰라린 탓에 레베카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앓는 소리에 릴리는 화들짝 놀라 손을 떼었다.

“미안해요……. 많이 아파요?”

“아팠었는데 이젠 괜찮아. 실은 네 오빠가 나를 치료해줬어. 오빠가 받은 축복을 나에게 나눠줬거든.”

“우리 오빠가요?”

의외라는 듯 릴리의 입이 자그맣게 벌어졌다.

그녀가 아는 율리안은 능력은 좋았지만 쌀쌀맞고 정이라곤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오빠가 누군가를 도와줬다니 릴리는 멍하니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레베카의 입매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명백히 자신을 향한 다정함이 느껴졌다.

그건 보통 사람들이 자신에게 보내고는 하던 연민의 시선이 아니었다.

품에 안겨들고 싶은 온전한 이해의 시선이었다.

레베카는 손을 뻗어 릴리의 머리에 붙은 나뭇잎을 하나씩 떼어주었다.

“믿기지 않니?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네 오빠는 감정을 드러내는 데 서툰 사람이니까. 하지만 널 많이 생각하고 있다는 건 알겠어.”

“베키는 대체 누구예요? 누군데 오빠 마음을 안다는 거예요?”

그녀를 향한 호감과 동시에 조금 반발심이 생겼다.

생전 처음 보는 여자가 오빠가 자신을 아낀다고 속삭이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소리는 크로아나 조세핀에게서 지겹도록 들어왔다.

하지만 한 번도 확인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율리안이 자신을 사랑한다니, 아낀다니.

그건 동화 속 이야기보다 더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잠시 이리 올래? 머리가 엉망이야. 내가 예쁘게 만들어줄게.”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지.’

릴리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유혹을 못 이기고 레베카의 무릎 위에 앉았다.

레베카는 품에서 작은 빗을 꺼내 릴리의 엉킨 머리를 빗어 내리기 시작했다.

낯선 사람의 손길이 어색하기만 했다.

하지만 섬세한 그녀의 빗질에 어쩐지 가슴이 울렁거렸다.

레베카가 속삭이듯 말했다.

“비밀 하나 더 알려줄까?”

“뭔데요?”

“나는 네 가족이 될 거란다.”

“네?”

“뒤를 돌아보지 말아. 아직 덜 빗었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언니가 제 가족이 된다니.”

“율리안이 내게 축복을 나눠주었다고 했잖니. 그래서 나도 율리안을 돕기로 했어. 그래서 그와 결혼하기로 했단다. 그렇게 되면 네 가족이 되지 않겠니?”

난생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 냉철한 오빠가 결혼이라니!

조세핀이 가진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사랑을 한다고?

그러나 결혼을 앞둔 신부치고는 레베카의 어조는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율리안을 사랑한다는 게 아니라 돕는다고 했다.

조금 석연찮은 점이 있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새로운 가족이 생긴다.

새로운 일이 생긴다.

하지만 곧 현실적인 걱정이 릴리를 덮쳤다.

‘오빠가 날 보여주지 않으려 하면 어떡하지.’

릴리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녀가 율리안의 여동생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조세핀과 크로아 정도였다.

릴리는 머나먼 친척의 버려진 고아이고, 율리안이 자비를 베풀어 잠시 기르고 있다는 소문이 고용인들 사이에 알음알음 퍼져 있을 뿐이었다.

율리안은 릴리의 존재가 드러나는 걸 극도로 꺼려했다.

조세핀은 율리안이 자신을 지키려 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해가 지날수록 릴리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율리안이 자신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생각이 하루가 멀다 하고 자라났다.

릴리는 다정한 레베카가 자신의 가족이 되는 걸 잠시 상상했다.

꿈같은 하루가 매일 펼쳐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릴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오빠는……. 율리안 오빠가 나를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을 리가 없어요.”

“뭐라고? 대체 왜 그런 생각을…….”

고개를 돌린 릴리와 눈이 마주친 레베카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릴리는 웃고 있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얼굴로 습관처럼 웃고 있었다.

릴리의 얼굴에서 자신의 과거를 엿본 레베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눈시울이 붉어져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야 했다.

열한 살. 고작 열한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지을 만한 표정이 아니었다.

이맘때쯤의 자신은 열심히 산과 들을 쏘다녔다. 마음가는 대로 지껄이고 친구들과 어울렸다.

오후에 먹을 케이크를 고르는 게 일생일대의 고민이어야만 하는 나이었다.

이런 건 옳지 않았다. 정말이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율리안!’

그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이렇게밖에 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걷잡을 수 없이 괴로워졌다.

사랑받은 적 없는 이가 온전한 사랑을 아이에게 주기 힘든 걸 레베카는 잘 알고 있었다.

레베카는 가까스로 울음을 삼켰다. 그리고 온화한 손길로 릴리의 머리를 땋아 내렸다.

“그…… 렇지 않아. 율리안이 네게 잘못한 일이 많은 것 같구나.”

“아니에요! 오빠는 제게 잘못한 게 없어요. 그냥 다 제가 능력이 없어서……. 오빠만큼 잘하는 게 없어서 그래요.”

“아니야. 릴리. 오빠가 네게 진실을 알려주지 않았잖니. 그건 명백히 오빠의 잘못이야. 릴리 너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 내가 율리안에게 잘 말해 볼게.”

“뭐를요?”

“네게 진심을 말하도록. 사실은 널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라고 설득해 볼게. 부끄러움이 많은 네 오빠가 잘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노력해볼게. 릴리.”

등 뒤에서 들려오는 믿기 힘든 소리에 릴리는 눈을 껌뻑였다.

이게 지금 꿈이 아닌가 싶어 몰래 허벅지를 꼬집기도 했다.

아팠다. 확실히 꿈이 아니었다.

여태껏 율리안을 이해하라는 사람은 많았지만, 그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율리안의 연인이라는 사람이, 그와 결혼을 약속했다는 사람이 율리안을 비난하고 있었다.

“자, 다 됐다. 손재주가 그리 좋지 않아서 생각보다 예쁘게 되지는 않았어.”

레베카는 자유분방하게 휘어진 릴리의 땋은 머리를 조금 멋쩍게 바라보았다.

릴리는 제 머리를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레베카의 무릎에서 폴짝 내려왔다.

그러자 자그마한 통나무에 앉은 레베카와 눈높이가 얼추 맞아떨어졌다.

자신을 탐색하는 릴리에게 레베카는 아낌없는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녀의 가지런한 치열이 하얗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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