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얼굴이 귀여워서 그런지 이런 머리도 잘 어울리는구나.”
레베카의 입 안에는 사탕이라도 들어 있는 걸까. 자신을 향한 한마디 한마디에서 단내가 폴폴 나는 것만 같았다.
희미한 달빛 아래로 보이는 레베카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릴리가 대뜸 말했다.
“예뻐요.”
“응?”
“눈이 밤하늘의 별처럼 막 반짝반짝 빛나. 오빠가 왜 베키랑 결혼하려는지 알 것 같아요. 너무 예쁘잖아.”
“어……. 고마워.”
느닷없는 칭찬에 레베카는 목덜미를 문질렀다. 얼굴에 수포가 올라온 이후로 거의 들어보지 못했던 말이었다.
“오늘 베키가 했던 말, 거짓말 아니죠? 오빠에게 내 얘길 해주겠다는 거 약속하는 거예요?”
“그래. 약속할게.”
레베카는 새끼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네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게.”
“그러면 전 베키에게 뭘 해주면 돼요?”
“응?”
“모든 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배웠어요. 의미 없는 친절은 없다는 것도요. 베키가 제게 원하는 건 뭐죠?”
‘원하는 건 그게 단가?’
릴리의 차가운 어투에서 문득 승전연회에서의 율리안이 떠올랐다.
비슷한 점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핏줄은 속이지 못했다.
둘은 사람을 쉬이 믿어 본 적이 없는 듯한 뾰족한 경계심이 똑 닮아 있었다.
“율리안을 너무 미워하진 말아줘. 그뿐이야.”
“그게 베키가 원하는 거라고요?”
릴리는 납득이 잘 가지 않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맞아. 사실 그것도 꼭 하지 않아도 돼. 그냥 네가 원하는 대로 살렴.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
자신을 투영해서일까.
레베카는 진심으로 릴리가 행복한 사람으로 자랐으면 했다.
저 작은 가슴에 커다랗게 난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주고 싶었다.
이미 마음에 난 상처는 사라지지 않을 테지만, 적어도 그 상처가 가끔 들여다보는 흉터 정도로 남길 원했다.
지금은 커다란 상처일지라도 릴리가 자신만큼이나 자랐을 때는 분명 자그마한 흉터가 되어 있을 터였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정말 그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지금까지 하지 말아야 할 것투성인 세상에서 자라온 릴리는 레베카의 제안이 먼 나라의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만약에, 만약에 그럴 수만 있다면 .
릴리는 레베카가 내민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단지 손가락이 맞닿았을 뿐인데도 미묘한 연대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릴리는 11년 인생 처음으로 희망을 보았다.
시답지 않은 의식이었지만 엄숙한 맹세의 서약을 한 것마냥 심장이 콩콩 뛰었다.
들뜬 얼굴로 릴리가 입술을 달싹였다.
“베키가 비밀을 하나 더 알려줬으니, 나도 비밀을 하나 더 알려줄게요.”
“또 무슨 비밀이 더 있니?”
릴리는 사방을 둘러보더니 이내 레베카에게 손짓했다.
새삼 조심스럽게 구는 그녀의 태도에 레베카는 웃음을 참으며 그녀에게 귀를 내밀었다.
“제 진짜 이름을 알려드릴게요. 제 진짜 이름은 릴리아나 바니니예요.”
“……!”
레베카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 * *
릴리아나 바니니.
이전 생에서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제국 최초의 여기사였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도 건장한 사내들 사이에서 기죽지 않고 연승을 거두었다.
결국엔 최연소 지휘관이라는 명예까지 거머쥐었지.
같은 대대의 기사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고 했었나.
당당하게 말을 타고 행진하던 그녀의 모습을 동경하던 자신이 떠올랐다.
다시 태어난다면 릴리아나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 릴리아나가 그 릴리라니.’
그러고 보니 꽃잎처럼 휘날리던 분홍색 머리와 붉은 핏빛 눈동자가 릴리와 똑같았다.
릴리가 요하네스 성을 물려받지 않았기에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릴리와의 추억 회상을 끝낸 레베카는 정원에 앉아 차를 홀짝였다. 그리고 어젯밤 율리안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릴리와 만나게 해달라는 그녀의 말에 율리안은 그답지 않게 머뭇거렸다.
‘꼭 만나야겠어? 어차피 이곳을 떠날 아이야. 굳이 보지 않아도 돼.’
하지만 레베카의 강경한 태도에 율리안은 인사 정도는 나누게 해주겠다고 허락했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레베카는 우기고 또 우겨서 결국 릴리와의 저녁 식사를 얻어냈다.
‘내가 모르는 뭔가 있는 게 틀림없어.’
만약 율리안이, 제플린이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릴리를 가둬두고 있는 거라면.
소중하단 핑계로 세상과 단절시키고 있는 거라면.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군가에게 천사 같은 사람이 누군가에겐 끔찍한 악마가 될 수도 있는 법이었다.
기나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무슨 걱정거리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레베카의 옆자리에 앉아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칸나가 넌지시 물었다.
이곳에선 오벨리아의 저택에서 지냈을 때보다 칸나가 할 일이 더욱 없었다.
자신은 평민인데도 불구하고 모두가 자신을 황후의 시녀인 것처럼 대했다.
아마 율리안의 명이 따로 있었으리라하고 칸나는 어림짐작했다.
이런 극진한 대접은 처음이라 안 맞은 옷을 입은 듯 영 어색하기만 했다.
그래도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칸나는 점차 소일거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일상에 만족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레베카의 비서가 되어 그녀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나야 항상 걱정이 많지. 제플린이 두 발 뻗고 잠에 들지는 않을까 하는 그런 걱정.”
“저번에 레베카 님께서 한 방 날리신 뒤로 백작이 외출을 꺼린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흉이 없어져야지만 공식적인 자리에 나설 것 같습니다.”
“그 끔찍한 자기애는 여전하구나.”
“단순한 게 그자와 딱 어울립니다.”
“그렇지. 언제까지나 단순했으면 좋으련만…….”
“혹시 백작이 반격할까 걱정하시는 겁니까?”
레베카는 성가신 생각인 듯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아마도 그럴 때가 됐지 않았나 싶어서. 몇 번 얻어맞고 나면 천하의 백치도 정신을 차리기 마련이니. 너무 많이 때린 것 같아.”
“그놈은 더 맞아도 쌉니다. 다음에는 제가 때리게 해주세요.”
레베카는 시근거리는 칸나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다부진 그녀의 손을 보니 제플린을 단박에 제압하던 칸나가 떠올랐다.
“칸나. 나도 너처럼 강해질 수 있을까?”
“예? 레베카 님은 지금도 충분히 강하십니다.”
“아니, 육체적으로 말이야. 율리안이 항상 하던 말처럼 내 팔목은 근육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나뭇가지 같잖니.”
“그런 불순한 말은 귀담아 듣지 마세요.”
“네가 날 가르쳐 줄 수 있겠어?”
레베카의 말에 칸나는 숨을 들이켰다. 자신이 레베카를 가르친다니, 생각만 해도 설레고 주제 넘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구사하는 기술은 뒷골목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들이 대부분이었다.
타고난 것도 있었지만 어릴 적부터 도망치면서 키운 체력이 뒷받침 해줬기에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쓰는 건 복잡한 암살 기술이었고, 실전에 실전을 거듭해야지만 터득할 수 있었다.
아쉽지만 기초 체력을 키워주는 것 말고는 자신이 레베카에게 전수할 만한 것은 없었다.
잠시 생각을 거듭하던 칸나가 말했다.
“저는 가르치는 재주가 없어요. 혹시 공작님께 부탁하는 건 어떠십니까?”
“율리안에게?”
“네. 저번에 보니 아주 전형적인 교과서 위주의 무력을 쓰시더군요.”
“그게 내게 더 효과가 있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아주 허약한 도련님들도 배울 수 있도록 교육과정이 마련되어 있을 테니 유용할 겁니다.”
“알았어. 율리안에게 물어볼게.”
“그나저나 며칠 전부터 우리를 염탐하는 저 깜찍한 스파이는 어찌할까요?”
칸나가 릴리의 별채를 향해 눈짓하며 넌지시 물었다.
그녀의 말에 레베카는 릴리가 있는 창문을 쳐다봤다.
레베카와 눈이 마주치자 릴리가 황급히 창가 밑으로 몸을 숙이는 게 보였다.
하지만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겠는지 눈만 빼꼼히 내밀고는 레베카 쪽을 주시했다.
웃음에 인색한 칸나가 소리 내어 웃을 만큼 귀여운 광경이었다.
레베카는 릴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녀의 인사에 릴리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시 안절부절못하더니 곧이어 크게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밝게 인사하는 그녀를 보니 레베카의 가슴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
저 아이와의 약속은 꼭 지킬 테다.
어느덧 지평선 가까이로 지고 있는 햇살이 따가웠다.
* * *
한껏 땀에 젖은 채로 위층의 침실로 향하려던 율리안은 갑자기 뭐가 떠올랐다는 듯 주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저녁 식사 준비로 분주한 주방은 군침이 도는 냄새로 가득했다.
율리안은 기분 좋게 음식 냄새를 음미하다가 주방장을 따로 불러내었다.
“오늘 저녁 식사엔 1인분을 더 내어오도록 해.”
“예? 손님이 오십니까?”
“아니. 릴리 그 아이도 저녁 식사를 같이 할 거야.”
“릴리라면…….”
기억을 더듬던 주방장이 아! 하고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 별채에 있는 고아 아가씨 말씀이시지요?”
고아라는 말에 율리안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제가 만든 소문인데도 고용인들이 릴리를 고아라고 할 때마다 기분이 영 꺼림칙했다.
“그래. 그 아이가 올 거야.”
그 말만 남기고 자리를 뜨려던 율리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몇 마디를 덧붙였다.
“오늘 저녁은 그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했으면 하는군. 치즈가 들어간 소시지 구이를 가장 좋아한다 했었나.”
“어라? 잘 알고 계시네요? 예, 맞습니다. 치즈 소시지가 메뉴에 오른 날이면 어김없이 한 접시가 추가로 별채에 들어가곤 했습니다.”
“잘 먹는다니 좋은 일이군. 그래도 영양 균형은 맞춰야 하니 샐러드도 듬뿍 만들도록 해. 릴리가 싫어하는 토마토는 빼고, 상큼한 키위 드레싱을 올리면 좋겠군. 디저트는 설탕을 줄인 당근 케이크로 하고. 꼬마인 주제에 단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니까.”
“예에…….”
“뭐야, 그 떨떠름한 표정은? 혹시 제대로 못 알아들었어?”
“아닙니다. 그 아가씨를 이렇게까지 잘 알고 계실 줄 몰라서요. 항상 별채에서만 생활하게 하셔서 관심이 없으실 줄 알았습니다.”
주방장의 말에 율리안이 더듬거렸다.
“무, 무슨 관심이 있다고 그래. 내 성 안의 식구니까 챙기는 게 당연한 일이지.”
‘제 이름을 제대로 외우시는 데만 반년이 넘게 걸리셨지만 말입니다…….’
주방장은 입술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곧이어 어깨를 으쓱 올리고는 전쟁터 같은 주방으로 돌아갔다.
갑작스런 메뉴 변경에 할 일이 많았다. 그래도 율리안이 일찍 말해줘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메인 디시에 치즈 소시지를 곁들이고, 샐러드에선 토마토를 뺀다! 레드벨벳 케이크는 설탕 없는 당근 케이크로 변경!”
“예, 주방장님!”
율리안은 군기가 바짝 들어간 주방을 한 번 슥 훑어보고는 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