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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18화 (118/232)

118.

“안녕하십니까. 공작님.”

지나가던 하인 한 명이 율리안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낯이 익은 하인이었지만 이름이 떠오를 만큼 인상 깊지는 않았다.

‘당신은 고용인들의 업무 고충을 알 필요가 있어.’

문득 레베카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악덕 고용주라도 되는 것마냥 질책하곤 했다.

“거기, 너.”

“예?”

종종걸음 치던 하인이 느닷없는 율리안의 호명에 고개를 돌렸다.

그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나싶어 눈을 굴렸다.

“그…… 일하는 데 불편함은 없고?”

“예……?”

“뭔가 부족함이 없냔 말이야!”

이런 식의 대화가 처음이라 율리안은 그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곧바로 후회했지만 이미 언성을 놓인 뒤였다.

저보다 몇 배는 덩치가 큰 주인이 소리까지 치니 하인은 이대로 졸도할 것만 같았다.

벌벌 떠는 소년을 보니 율리안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니, 죽이겠다는 것도 아닌데, 그저 안부를 묻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벌벌 떨다니.

레베카의 말대로 자신은 형편없는 고용주인 게 분명했다.

“아이고오……. 이보게, 켈빈. 공작님께서 자네를 질책하시려는 게 아니야. 그렇죠, 공작님?”

이 상황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크로아가 이러다가 사람 하나 잡겠다 싶어 냉큼 튀어나왔다.

크로아의 인자한 말투에 켈빈은 조금 안정이 되었는지 얼굴을 빼꼼히 들었다.

크로아가 율리안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렇죠, 공작님? 이 불쌍한 아이에게 상을 내려주시려고 부르신 거죠?”

“어, 어. 그래. 그렇지. 켈빈이라고 했나? 어디서 일하지?”

그의 말에 크로아는 또 이마를 짚었다.

켈빈은 매 끼니마다 율리안의 음식 시중을 드는 소년이었다.

얼마나 관심이 없었으면 매일 얼굴을 맞대는 하인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까.

하지만 그래도 그가 안부 인사를 할 생각을 했다는 자체가 기적적인 일이었다.

크로아는 감격스런 얼굴로 율리안의 귀에 속삭였다.

“공작님! 식사 때마다 물과 음료를 내오는 아이지 않습니까!”

크로아의 말에 율리안의 귀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알면 알수록 자신이 쓰레기가 된 것 같았다.

“아, 내가 잠시 기억이 안 난 모양이야. 켈빈, 자네가 성심성의껏 일해준 덕분에 내가…… 맛있는 물을 먹을 수 있었어. 참 고맙네.”

이상한 칭찬이었지만 그래도 혼이 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 켈빈이 얼굴을 긁적였다.

“아닙니다. 제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 그럼 맛있는 물을 대령한 상으로 그 물병을 주도록 하지!”

율리안은 켈빈이 손에 들고 나르고 있던 도자기 물병을 가리켰다.

크로아는 황당해서 혀를 찼다.

“저 무, 물병을요? 다른 좋은 것도 많지 않을까요? 공작님?”

“저것도 꽤 값이 나가는 거야. 자네가 가지도록.”

“가, 감사합니다…….”

율리안 말대로 켈빈이 소중히 들고 있는 물병은 값비싼 것이었다.

동쪽 나라의 어느 왕족이 썼다는 고풍스런 물건이었다.

켈빈은 정말 이 진귀한 물건을 제가 받아도 되는지 몰라 떨떠름한 얼굴로 물병과 크로아를 번갈아 쳐다봤다.

크로아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손을 내저었다.

“이번 저녁 식사도 기대하지. 켈빈.”

율리안은 도망치듯이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또 뒤처리는 크로아의 몫이었다.

‘젠장, 젠장!’

맛있는 물을 줘서 고맙다니 그런 머저리 같은 말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쉬웠다.

율리안은 목욕을 마치고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만나는 고용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정한 율리안의 안부 인사를 들은 고용인들은 제 주인이 드디어 미친 게 아닌가 싶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래도 율리안은 내심 뿌듯했다.

레베카가 내어준 과제를 완수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는 더 잘해줘야겠어.’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레베카와 함께 쓰는 부부 침실로 들어갔다.

흰색 천으로 덮인 채 관짝처럼 놓여 있던 침실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아버지가 죽은 뒤로 이곳을 다시 쓰게 될지는 꿈에도 몰랐기에, 율리안은 새삼스런 얼굴로 침대 위에 털썩 앉았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제 몸에서 나는 은은한 비누 냄새와 함께 레베카의 향기가 느껴졌다.

어느새 그녀와 이 넓은 침대에서 같이 자는 게 익숙해졌다.

딱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녀와 함께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율리안은 마냥 좋았다.

카림은 신혼 때 재미를 봐야 한다고 욕구를 마음껏 풀라며 낄낄거리곤 했다.

자신이 첫날밤조차 지내지 않은 걸 그가 알게 되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율리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나른하게 하품을 하곤 침대에 누웠다.

부드러운 이불이 몸에 알맞게 감겨 왔다.

‘릴리…….’

릴리와 저녁 식사를 함께 한다고 생각하니 무거운 돌덩이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처럼 답답했다.

그녀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진실 같은 아이였다.

레베카가 저주를 풀어줄테니 릴리와 가족처럼 지내지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망설였다.

사랑스럽고 지켜주고 싶지만 제 손으로 어루만지기에는 두려웠다.

자신의 거친 손길에 릴리가 깨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유년 시절을 망쳐버릴 게 분명했다.

제 어린 시절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잘 알기에 그는 릴리에게 같은 전철을 밟게 하고 싶지 않았다.

레베카가 도와준다면 괜찮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역시 겁이 났다.

이건 단순히 고용인들을 친절히 대해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단 한순간의 실수로 평생 갈 만한 상처를 줄 수 있었다.

그럴 바엔 그냥 만나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안전한 곳에서 키우다가 자신과 달리 사랑이 넘치는 사람들 속에 보내는 게 나았다.

‘그럴 바엔 입양을 보내시지요. 차라리.’

율리안에게 조세핀이 가끔 원망 섞인 말을 내뱉고는 했다.

입양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공작가의 저주가 내린 그 아이를 온전히 받아줄 곳이 있을까.

제대로 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율리안은 고뇌에 찬 신음을 흘렸다.

* * *

식탁에는 화려하진 않지만 정갈한 메뉴가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릴리는 육즙과 어우러진, 치즈가 뚝뚝 흘러나오는 굵은 소시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평소였다면 게눈 감추듯이 먹어치웠겠지만 오늘은 어쩐지 식욕이 전혀 돌지 않았다.

가족과의 단란한 식사는 릴리가 언제나 바라던 꿈과 같은 일이었다.

오늘 드디어 그 소원이 이루어졌는데도 릴리는 어쩐지 잔뜩 위축되었다.

릴리는 고개를 들어 율리안을 힐끔 쳐다봤다.

원래도 차갑던 오빠의 얼굴에는 평소보다 더 시린 냉기가 감돌았다.

간간이 레베카가 자신을 향해 웃어주기는 했지만 동화책 속에서 보았던 화목한 가족 식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제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와인만 홀짝이는 율리안의 태도에 릴리의 눈에 금방 눈물이 차올랐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군.’

레베카는 와인잔을 쥐고 있는 율리안의 손이 빳빳하게 굳어 있는 걸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요하네스가의 남매는 제 생각보다 더 서먹한 사이였다.

곧 디저트가 나올 텐데 둘 사이에 오간 대화는 대화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것들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릴리의 눈에 눈물이 방울방울 차오르고 있었다.

레베카는 서둘러 대화의 물꼬를 틀었다.

“소시지가 정말 맛있지 않니? 네가 좋아한다기에 율리안이 특별히 주방장에게 주문한 거란다.”

레베카의 말에 릴리가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릴리의 물기 젖은 눈을 마주하자 율리안은 그만 혀를 씹어버릴 뻔했다.

리본으로 귀엽게 양 갈래로 묶은 릴리는 오늘따라 더욱 귀여웠다.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도 저 오동통한 볼을 타고 흐르는 한 방울의 눈물은 분명 제 탓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허벅지를 포크로 찌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역시 같이 시간을 보내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어.’

파도처럼 후회가 밀려왔다.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가 의자를 들썩이려고 할 때 릴리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고, 고마워요…….”

릴리는 식어가고 있던 소시지에 얼른 나이프를 가져다대곤 열심히 썰기 시작했다.

그리고 큼지막한 소시지를 입 안에 넣고 우물거리며 씹었다.

꼭 먹이를 입안에 넣은 다람쥐처럼 릴리의 볼이 불룩 튀어나왔다.

처음 보는 광경에 율리안은 신기한 듯 릴리를 바라보았다.

꿀꺽-

릴리는 야무지게 냅킨으로 입을 닦고는 환히 웃었다.

“맛있어요!”

무장을 풀게 할 만큼 해맑은 미소였다.

율리안은 노곤하게 긴장이 풀려 저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웃었다.

“우, 웃었다…….”

율리안의 웃음을 처음 본 릴리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그제야 식욕이 돌기 시작했는지 릴리는 순식간에 제 몫의 소시지를 다 먹어치웠다.

율리안은 턱을 괴고선 흐뭇하게 릴리를 바라보았다.

살얼음장 같던 식당 안이 어느새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럼 디저트를 내오겠습니다.”

일사불란하게 당근 케이크와 푸딩이 함께 나왔다.

지금까지 조개처럼 다물어 있던 율리안의 입이 그제야 열렸다.

“단 걸 싫어한다고 들었어. 설탕을 최대한 쓰지 않은 케이크다. 당근은 좋아하나?”

“네! 좋아해요!”

마침내 들은 오빠의 목소리는 제 오래된 기억보다 훨씬 중후하고 멋있었다.

릴리는 당근케이크를 떠먹으면서 연신 맛있다고 외쳤다. 율리안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레베카도 덩달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통 네 나이 때 여자아이들은 당근을 싫어하는데, 릴리는 기특하구나.”

“그런가요? 제 또래 아이들을 만난 적이 없어서 잘 몰랐어요. 제 또래들은 뭘 하고 노나요? 궁금해요!”

악의 없는 질문이었으나 레베카의 한쪽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지금껏 또래를 만난 적이 없다니.

율리안이 릴리를 가둬 키우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또래 친구 정도는 붙여 줄줄 알았다.

레베카는 율리안을 노려보다 말했다.

“그럼 이참에 친구를 만드는 것도 좋겠구나. 가을에는 티파티가 많이 열리지. 네 또래 중에 괜찮은 영애들은 추려볼게. 분명 재밌을…….”

“안 돼!”

율리안이 버럭 소리쳤다. 레베카의 말에 한껏 들뜨기 시작하던 릴리가 흠칫 놀라 어깨를 떨었다.

겁에 질린 릴리를 보고 율리안은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일이다.

“릴리. 세상에는 불순한 목적을 가진 사람이 많아. 특히 너처럼 어릴 때는 그런 악의를 잘 구분하지 못해. 그러니 좀 더 크거든 친구를 만들도록 해.”

“네…….”

릴리는 체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베카의 이마에 힘줄이 불쑥 솟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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