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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19화 (119/232)

119.

“그럼 릴리는 대체 언제 커?”

“뭐?”

“그래. 당신 말대로 그런 사람이 접근할 수도 있지. 하지만 그게 뭐? 그래 봤자 어린아이들이야. 나쁜 사람, 좋은 사람을 구분할 수 있도록 힘을 길러주는 게 네 역할 아니야?”

“굳이 나쁜 경험을 할 필요 없다는 소리야.”

“나쁜 경험만 있을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 그건 릴리가 판단할 일이야. 설사 나쁜 일이 생겼다 하더라도 그때 당신이 지켜주면 되는 거잖아. 애가 하고 싶다잖아! 당신이 대체 뭔데 애 앞길을 막아? 무슨 권리로 릴리를 새장에 가둬!”

데본셔 백작가에서 생기 없이 앉아만 있던 자신이 떠올랐다.

무력하게 남들이 좋다는 것만 받아먹던, 생각이라곤 할 필요가 없던 끔찍한 지난 세월이 떠올랐다.

화가 났다.

율리안은 착한 사람인데 왜 제플린처럼 구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에 주먹 쥔 레베카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때, 누군가가 떨리는 레베카의 손을 움켜쥐었다.

애처로운 붉은 눈이 레베카를 올려다봤다.

“제, 제가 재밌는 이야기 해드릴게요. 아니면 조세핀이 좋아하는 귀여운 표정이 있는데 한번 보실래요……?”

볼을 부풀린 릴리는 검지로 제 볼을 짓눌렀다. 애교를 부리는 아이의 얼굴은 절박해보였다.

“그러니 제발 싸우지 마세요. 네? 저 때문에 싸우지 마세요…….”

발밑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애써 미소 짓는 릴리의 얼굴을 보고 율리안도 하얗게 질렸다.

차오르는 눈물을 참으며 레베카는 릴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갑자기 소리 질러서 놀랐지? 미안하구나. 참 귀여운 표정이네. 그럼 우리 이제 디저트도 다 먹었으니 산책을 하러 갈까? 릴리, 너 먼저 나가 있을래? 우리는 잠시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것만 마치고 바로 따라 나설게.”

릴리는 제 노력이 물거품이 된 것 같아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하지만 동시에 놀랍기도 했다.

제 오빠에게 언성을 높일 수 있는 사람을 생전 처음 본 탓이었다.

“아가씨, 저와 같이 나갈까요?”

칸나가 눈치껏 다가와 릴리를 식당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녀는 헤레나와 리비아 덕분에 아이와 노는 방법을 완벽하게 터득한 참이었다.

칸나는 릴리의 처진 어깨를 단번에 올려줄 놀이를 구상하며 발걸음을 바삐 움직였다.

* * *

릴리가 나가자 식당 안에 있던 고용인들도 눈치껏 자리를 떴다.

율리안은 식탁 위에 손을 괴고는 이마를 짚었다.

‘대체 그런 애교를 왜…….’

릴리가 레베카에게 보여준 건 단순한 애교 따위가 아니었다.

생존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율리안은 그 의미를 잘 알았다. 한때 자신도 그러했다.

제게 싸늘한 어머니와 아버지를 향해 갖은 노력을 했다. 웃겨 보려고도 하고, 귀여워 보이려고도 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는 잘 보이려는 걸 포기하고 무관심을 택했다.

마음 한켠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아도 그 편이 더 편했다.

애쓸 필요가 없었으니.

그런데 릴리가…… 그 소중한 아이가 자신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그 간절한 몸짓마저 자신이 아니라 레베카를 향했다.

‘내가 무서워……?’

충혈된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 아이를 위하던 게 오히려 독이 되었다.

화가 나서 율리안의 따귀라도 올려붙일 기세였던 레베카는 절망하는 그의 얼굴을 보고선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율리안…….”

“레베카. 내가 잘못한 거지? 정말 형편없이 굴었던 거지?”

레베카는 그를 위로할까 잠시 고민하다 그만두었다.

그는 깨달을 필요가 있었다.

“응. 당신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어. 마치 제플린이 내게 했던 것과 똑같은 짓을 릴리에게 했어.”

쿵-

그 어떤 욕보다 효과가 좋았다.

율리안은 명치를 세게 얻어맞은 얼굴로 레베카를 바라봤다.

레베카는 표정을 지운 채 담담히 말했다.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생각하지도 못하게 그 아이를 가둬 뒀잖아. 당신의 애정만 바라도록 아이를 고립시켰어. 그런 주제에 왜 충격받은 얼굴을 해? 당신은 그럴 자격도 없어.”

레베카의 혀가 마치 채찍을 휘두르는 것처럼 아프게 휘감겼다.

율리안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내가……. 내가 그 아이에게 손을 대면 모든 걸 망칠 것 같아서 그랬어. 난 아이가 어떤 사랑을 받아야 하는지 잘 모르니까. 어떻게 해야 상처를 받는 지만 아니까…….”

“그래서 당신이 한 짓은 뭔 것 같아? 어떻게 해야 상처를 받는지 잘 안다면서도 그런 짓을 했어?”

율리안은 감히 레베카를 쳐다볼 수도 없었다.

“당신의 불행을 릴리에게 전가하지 마. 당신이 불행하다고 해서 그 아이도 불행하라는 법은 없어.”

“아아…….”

평생 외면했던 진실이 숨 막히게 자신을 옥죄어왔다.

차오르는 눈물 때문에 율리안은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눈물을 보자 자신도 울고 싶었다. 하지만 레베카는 마음은 단단히 여몄다.

감정을 숨기는 건 그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레베카는 그와 같이 울어주는 대신 그의 손을 잡았다.

싸늘하게 식어가던 율리안의 손에 레베카의 온기가 전해졌다.

“율리안. 도망치지 마.”

그녀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지금껏 도망쳤다.

가족의 애정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발을 딛는 게 무서웠다.

같은 식탁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사소한 것을 두고 다투다가 시답잖은 사건에 다시 웃음 짓는.

자기 전에 침대 머리맡에서 노곤한 목소리로 책을 읽어주는 그런 가족의 울타리가 두려웠다.

그 울타리에 손을 닿기만 해도 불에 타서 없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평생 안락한 가족을 원하면서도 평생 멀리했다.

그리고 그 외로운 길을 릴리의 앞에 던져두었다. 그 외의 선택지를 주지도 않은 채 릴리에게 고독을 강요했다.

“난 이제 어떻게 해야…….”

율리안은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그의 눈에서 쏟아져 내렸다.

고치고 싶었다. 가능만 하다면 시간을 다시 되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레베카의 말대로 릴리에게 자신의 불행을 전가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릴리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울음 섞인 그의 목소리에 레베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 끌리는 소리가 텅 빈 식당 안에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율리안에게 다가간 레베카는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다정한 품이 닿자 그는 저도 모르게 레베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레베카 특유의 살냄새가 풍겼다. 안심이 돼서 마음을 놓아버리게 하는 그런 향기였다.

레베카의 가슴팍이 그의 눈물로 젖어들었다.

그는 모든 걸 내려놓은 채 레베카에게 매달렸다.

“도와줘……. 도와줘. 레베카.”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당신은 이미 방법을 알고 있어.”

“아니. 난 아무것도 할 줄 몰라. 머저리 같은 놈이야. 쓰레기 같은 놈이야.”

“내게 한 것만큼만 릴리에게 하면 돼. 당신이 내게 나누어줬던 그 따뜻한 마음을 릴리에게도 전해주면 돼.”

“…….”

율리안은 아무 말이 없었다.

“당신이 망친 거니 당신이 해결해야 해. 온전히 당신의 힘으로 해야지. 릴리가 그동안 겪은 고통에 비하면 당신이 앞으로 해야 할 노력은 아무것도 아니야.”

“무슨 노력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율리안이 레베카를 올려다봤다.

촉촉하게 젖어든 황금빛이 찬란했다. 그는 엉망으로 흐트러진 얼굴마저 아름다웠다.

그 순간 레베카는 그가 조금만 더 울기를 바랐다.

그의 밀밭에 소낙비가 거칠게 내리기를 은밀히 소원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그런 음흉한 취향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흠칫 손을 떨었다.

“레베카……?”

살짝 목이 쉰 그의 목소리가 아찔했다.

레베카는 그의 무너져 내린 입술을 정신없이 탐하려는 본능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이런 상황에서 키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니 정신이 나간 모양이다.

레베카는 떨리는 눈을 감고 그의 이마에 제 이마를 지그시 맞대었다.

“당신 마음가는 대로 하면 돼. 릴리에게 잘해주고 싶은 그대로 하면 돼. 칭찬하고 싶다면 칭찬하면 되고, 머리를 쓰다듬고 싶다면 그러면 돼.”

“내 멋대로 했다가 릴리가 더 상처를 입으면 어떡하지?”

“그렇지 않아.”

레베카는 부드럽게 율리안의 흑단 같은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당신은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드는 데 재능이 있는 사람이니까.”

생전 들어본 적 없는 소리에 율리안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그는 곧 레베카의 인자한 푸른 눈동자에서 진실을 찾고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안심한 그의 심장이 도리어 거세게 뛰기 시작했기에 둘은 식당의 문이 소리 없이 닫히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 * *

“정말 헤레나라는 언니가 물수제비를 여섯 번이나 뜰 수 있다고요?”

릴리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칸나에게 다음 이야기를 재촉하고 있었다.

식당을 나온 뒤로 줄곧 침울해 있던 릴리는 칸나의 어떤 놀이 제안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지나가듯 읊조린 헤레나와 리비아의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또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거의 없기에 관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리고 또 뭘 하고 놀아요?”

“일단 알아두셔야 할게 헤레나와 리비아 아가씨는 일반적인 또래 영애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겁니다.”

“그래서 더 멋져요! 특별한 거잖아요. 흠……. 그럼 보통 영애들은 뭘 하고 놀아요?”

“티파티를 열어 담소를 나누거나 예의범절을 배우거나, 아니면 또래 영식들과 피크닉을 가기도…….”

“뭐야. 완전 재미없어. 그럼 저는 그 영애들하고는 안 놀래요. 헤레나 언니하고 리비아 언니처럼 놀고 싶어요. 언니들이 검술도 좋아할까요……?”

“검술이요? 글쎄요. 하지만 몸으로 하는 놀이는 다 좋아하시니 검술도 마음에 들어 하실 겁니다.”

“다행이다! 그런데 제가 그 언니들을 만날 날이 올까요……? 없겠죠? 오빠가 허락하지 않을 거니까요.”

릴리는 다시 울적해져서 고개를 떨구었다.

칸나가 다급하게 릴리를 달랬다.

“그렇게 될 겁니다. 레베카 님과 약조하셨다면서요.”

“맞아요. 베키…… 아니 부인께서 약속하셨긴 했어요.”

“그러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하지 못하실 일은 없습니다.”

“왜요? 왜 하지 못할 일이 없는데요?”

“그분은…….”

칸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레베카를 향한 자신의 믿음을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할지 난감했다.

칸나는 한참 여러 단어를 입에 굴리다가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레베카 님이시니까요.”

도돌이표처럼 돌아온 답변에 릴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소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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