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릴리아나.”
릴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율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자신을 애칭이 아닌 진짜 이름으로 불렀다.
“오빠…… 아니 공작님.”
율리안이 칸나를 향해 말했다.
“레베카는 피곤해서 우리끼리 산책하라고 하더군. 그녀는 아무래도 자네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은데.”
칸나가 눈치껏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는 이만 레베카 님께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칸나가 사라지자 영원한 빛의 정원은 오로지 둘만의 몫이 되었다.
“옆에…… 앉아도 되겠어?”
율리안은 릴리가 앉아 있던 흔들 그네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호된 꾸지람을 들을 거라 생각했던 릴리는 율리안의 나긋한 목소리에 순간 멍해졌다.
황홀하게 빛을 발하는 럭스꽃 사이 선 율리안은 마치 환상 같았다.
살며시 불어온 바람에 머리카락이 볼을 간질였다.
그 탓에 릴리는 지금 눈앞에 펼쳐진 놀라운 광경이 현실임을 깨달았다.
“네…….”
릴리의 수락에 율리안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율리안은 릴리의 옆자리에 앉았다. 도무지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마음가는 대로 하라는 레베카의 전언이 용기를 내게 했다.
그는 릴리의 눈망울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 아이만큼이나 반짝거리는 럭스꽃을 응시하며 말했다.
“아버지나 어머니에 관해 기억나는 게 있나?”
릴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의 아버지는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고, 어머니 또한 아버지가 죽고 얼마 안 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들었다.
부모는 릴리에겐 드래곤이나 전설의 성검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그건 좀 부럽네. 불행히도 나는 어머니 아버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거든.”
그리워할 부모가 있다면 좋은 일 아닌가?
자신이 매일 밤 꿈꾸던 일이었다. 한데 오히려 자신이 부럽다니.
릴리는 아직도 율리안에게 말을 건네는 게 무서웠다.
그래서 대답 대신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때론 없는 게 나을 정도인 부모들이 있어. 네 아버지인 다니엘 요하네스 공작과 나의 어머니인 이벨리나 알루스테어는 내게 지독한 추억만을 남겨줬지. 그리고 나는…….”
잠시 머뭇거리던 율리안이 어느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릴리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릴리가 눈을 크게 떴다.
처음 마주하는 혈육의 눈동자였다.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샛노란 눈동자는 럭스꽃에서 나는 빛과 비슷한 색을 내뿜고 있었다.
다만 무척이나 슬퍼보였다.
애처롭지만 다정한 눈빛에 릴리는 그만 울어버리고 싶어졌다.
“네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어. 네가 이 추악한 요하네스 가문과 상관없는 평범한 사람으로 자라길 원했어. 하지만 내 의도가 어떻든 그 방법이 잘못됐지. 너에게 상처를 입혔구나. 미안하다.”
“흐끅…….”
릴리는 필사적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입을 앙다물었다.
우는 아이만큼 어른이 싫어하는 건 없다고 들었다.
동화책에서도 울고 떼를 쓰는 아이는 언제나 벌을 받았다.
겨우 다정하게 눈을 마주쳤는데 이런 식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릴리가 애를 썼다 하더라도 율리안은 단번에 릴리가 눈물을 참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율리안은 릴리의 떨리는 작은 어깨를 붙들었다.
그의 얼굴의 괴로움으로 잔뜩 일그러졌다.
“제발……. 내가 이렇게 빌게. 제발. 참지 마, 릴리. 너는 나처럼 참지 마. 도망치지도 말고. 울고 싶으면 울고 화내고 싶으면 화를 내. 내게 사랑해 달라 애를 쓰지 않아도 괜찮아. 믿기지 않겠지만, 난 한 번도 너를 싫어했던 적이 없어.”
“으아아앙!”
결국 율리안은 릴리를 울리고 말았다.
율리안은 제 품에 뛰어들어 목 놓아 우는 릴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몽실거리는 분홍색 머리가 꼭 아기 새의 솜털 같았다.
제 여동생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작고 연약했다. 그리고 견딜 수 없게 사랑스러웠다.
혹여나 제 거친 손이 닿아 릴리가 상처입지 않을까싶었다.
율리안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손을 쥐었다 폈다했다.
하지만 릴리의 울음이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참지 말고 울라고 말한 건 자신이었지만 막상 서럽게 우는 동생을 보니 후회스러워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럴 때 레베카라면…….’
이 순간 레베카가 간절히 필요했다.
하지만 레베카의 말이 맞았다.
이건 스스로 해결해나갈 문제였다.
괴로운 것도 감수해야 했다. 이 아이에게 속죄를 해야만 했다.
잠시간 기억을 더듬던 율리안은 조심스럽게 릴리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최대한 무게를 실지 않기 위해 그의 팔뚝에 힘줄이 불쑥 솟아올랐다.
레베카가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 온갖 고뇌가 사라지던 게 떠올랐다.
그는 어색한 손짓으로 릴리의 머리를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네 방에서만 지내지 않아도 괜찮아. 친구들을 만들고 싶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 파티를 여는 것도 좋겠군. 피크닉을 같이 가고 싶다고 했지? 같이 가자. 발라리아가 참 아름……. 그러고 보니 넌 바다를 본 적이 없겠구나.”
문득 정신이 아득해졌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자신은 온갖 좋은 걸 다 경험했다. 그러니 시시하기도 하고 재미없기도 했다.
하지만 이 아이에겐 시시하다는 생각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다.
위험하다는 핑계로 한 인간의 삶을 좁은 방 안에 가두어두었다.
죽어서도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짓을 했다.
율리안은 스스로를 향해 욕을 내뱉었다.
인간 말종, 쓰레기. 제플린보다 못한 새끼. 그냥 나가 죽어라.
‘아니, 죽는 것도 사치야.’
살아서 꼭 갚아야 했다. 악착같이 살아남아 릴리에게 진 빚을 모두 갚아야만 했다.
율리안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내가…… 내가 노력할게. 네 세상이 행복할 수 있도록. 그동안 내가 저지른 걸 갚을 기회를 줄 수 있겠니?”
떨리는 율리안의 목소리에 릴리는 딸꾹질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파티와 친구들 그리고 피크닉과 바다. 환상 속 단어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겁에 질렸지만 올곧은 오빠의 눈빛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어린 제 눈에도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믿을 수 없었다.
진실과 믿음은 별개의 문제였다.
릴리는 부서진 믿음만 보고 자라왔다.
약속은 깨지는 게 당연한 일이었고, 다짐은 항상 별조각처럼 흐트러졌다.
실망을 자장가 삼아 자라난 아이는 빨리 어른이 되었다.
그녀는 어른처럼 쉽게 믿지 않고 의심부터 했다.
조세핀이 내일은 날씨가 맑을 거라고 하면, 릴리는 비가 올 거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누군가가 약속을 지켰다.
‘네게 진심을 말하도록. 사실은 널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라고 설득해 볼게. 부끄러움이 많은 네 오빠가 잘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노력해볼게. 릴리.’
‘반드시 네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게.’
릴리는 새끼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레베카의 손가락이 맞닿았던 그 신기한 순간이 떠올랐다.
“릴리. 내게 기회를 주겠어?”
대답이 없는 릴리에게 율리안이 조급하게 물었다.
레베카의 말대로였다.
비록 엉망진창이었긴 해도 오빠와 저녁 식사를 했다.
얼음장처럼 차갑기만 하던 오빠가 제게 용서를 구했다.
줄곧 자신을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마법이라도 부린 걸까.
이렇게 한순간에 사람이 변할 수 있는 걸까.
릴리는 갈 곳을 잃고 흔들리는 율리안의 눈동자를 찬찬히 바라봤다.
어느새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이 축축하게 땀에 젖어 있었다.
또다시 상처를 받을 지도 모르겠지만 릴리는 믿어보고 싶었다.
율리안의 변화가 아니라 레베카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럼, 올해처럼 내 생일 선물도 계속 받아줄 거예요?”
“아…….”
율리안의 잇새 사이로 탄식에 가까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동안 돌려보낸 생일 선물들이 떠올랐다.
크로아의 원망 섞인 눈초리도 기억과 함께 따라왔다.
자신은 단 한마디로 돌려보낸 선물이지만, 릴리는 평생을 품고 살아갈 거절이었다.
‘난 이미 상처를 계속 주고 있었구나…….’
쥐어뜯듯이 가슴이 아려왔다.
아프고 아팠지만 지금 겪는 고통보다 배의 고통을 겪는다 하더라도 자신은 아프다 호소할 자격도 없었다.
율리안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부디 그렇게 해줘.”
릴리의 얼굴이 밝아졌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된 얼굴이 저렇게 환한 웃음을 보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 * *
“바다는 그럼 어떤 색이야?”
아몬드 쿠키를 우물거리며 릴리가 물어왔다.
첫 가족 저녁 식사 후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율리안은 부단히 노력했다.
그는 제일 먼저 릴리의 방을 별채에서 본성으로 옮겼다.
헤레나와 리비아를 초대해 릴리에게 소개했다.
셋은 태어날 때부터 알던 사이처럼 금세 친해졌다.
그리고 율리안은 의무적으로 한 시간 이상 릴리와 대화하는 시간을 정했다.
처음에 우물쭈물하던 릴리는 어느 순간부터 공작님이라는 말 대신 오빠라고 부를 정도로 율리안을 편히 대하기 시작했다.
가끔 율리안에게 다가오는 걸 망설이기는 해도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율리안은 조금 안도하며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개를 들어봐.”
율리안의 말에 릴리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한눈에 가득 들어왔다.
“딱 저런 색이야. 바다는 땅의 하늘 같거든.”
“그럼 정말 예쁘겠다!”
릴리의 웃음소리는 구슬이 굴러가는 듯했다.
크로아는 눈에 띄게 밝아진 릴리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파라솔 밑에 단란하게 앉아 있는 요하네스가의 남매의 모습이 아직도 어색했다.
당장이라도 율리안이 피크닉 바구니를 뒤엎고 자리를 박차고 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바구니를 탐내는 건 장난기 많은 고양이들뿐이었다.
크로아는 일전의 식당에서 있었던 레베카와 율리안의 대화를 떠올렸다.
엿들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율리안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레베카를 다시 보게 되었다.
레베카는 율리안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하고 아끼는 게 여실히 눈에 들어왔다.
그녀도 율리안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일이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는 모르겠으나 크로아는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공작 부부의 행복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크로아가 남몰래 굳은 다짐을 하고 있을 때 레베카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