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둘이서 무슨 재미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베키!”
레베카의 목소리에 릴리가 몸을 빠르게 돌려세웠다.
릴리만큼 즉각적인 반응은 아니었지만, 율리안도 릴리 못지 않게 반가운 얼굴로 그녀를 맞았다.
릴리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레베카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연노란색 드레스 자락에 얼굴을 묻었다.
“다음 주에 갈 바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어! 발라리아 해변이라 했지? 베키는 가 봤어?”
“가 봤지. 율리안이 데려가줬어.”
“나만 안 가 봤네! 치사해!”
“아니야. 리비아랑 헤레나도 가 본 적 없는 걸. 발리리아 해변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율리안의 허락을 맡아야지만 갈 수 있단다. 제국에서 가 본 사람보다 못 가 본 사람이 더 많을걸?”
“정말?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리아랑 헤나도 좋아할 것 같아.”
“리아? 헤나?”
“응. 내가 만든 애칭으로 불러도 좋다고 언니들이 허락했거든.”
일전에 가족들을 공작 성으로 초대했을 때 릴리와 레베카의 두 동생은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함께 뛰놀았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는데도 그 사이에 무천 친해진 모양이다.
갇혀 있던 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릴리는 쾌활한 아이였다.
“릴리, 레베카 그만 괴롭히고 이리로 와. 아직 쿠키 다 안 먹었잖아. 손댄 건 다 먹어야지.”
릴리가 무엇을 하든 유하게 구는 율리안이었지만 음식에 관해선 엄격했다.
릴리는 의외로 편식이 심해 또래보다 체구가 작은 편이었다.
율리안은 그 또한 자신의 탓이라 여기며 릴리에게 열심히 먹이려고 노력했다.
그가 쿠키 접시를 흔드는 걸 보고 릴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새 배가 고픈 날이 없는 것 같아. 난 배부른 느낌이 너무 싫어.”
레베카는 릴리의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나도 그래. 율리안은 우리가 굶고 사는 것처럼 보이나 봐.”
“오빠가 베키한테도 그래?”
“그럼. 하루에 다섯 끼는 더 먹으라고 하는 걸. 하지만 어쩌겠어. 네 오빠의 낙이니 이 정도는 봐주자.”
레베카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자 릴리가 볼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었다.
“일이 아직도 많아?”
율리안이 자연스레 레베카에게 자신의 어깨를 내어주며 말했다.
레베카는 그가 내민 어깨의 의미를 알았지만 릴리를 흘깃 보며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이제 익숙해져서 공작가의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아.”
“다른 일이 있는 건가?”
율리안은 거절당한 어깨를 실망스레 거둬들였다.
대신 차가운 우유와 설탕을 줄인 아몬드 쿠키를 내밀었다.
레베카가 쿠키를 아삭 깨물며 말했다.
“라본느 살롱 말이야. 생각보다 인기가 많지 않아.”
“그래? 정원과 메인 홀은 벌써 6개월이나 예약이 꽉 찼다고 하던데.”
“이벤트 홀은 그렇지. 그 외의 방들은 이상할 정도로 찾는 사람이 없어. 분명 홍보는 제대로 됐다고 생각하는데. 투자자도 많았고.”
“이상한 일이군.”
“데본셔 백작가의 가신들이 찾을 만큼 성황을 이루어야 하는데, 이러면 살롱을 세운 의미가 없어.”
율리안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레베카를 바라봤다.
데본셔 백작.
결혼 후의 생활이 달콤해서 잠시 잊어버렸던 이름이었다.
둘의 대화를 잠자코 엿듣던 릴리가 물었다.
“데본셔 백작이 누구야?”
율리안이 릴리의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떼어내며 답했다.
“레베카를 괴롭힌 악마 같은 인간이야. 제플린 데본셔.”
“베키를 괴롭혔다고? 어떻게 베키를 괴롭힐 수가 있어?”
릴리가 경악한 얼굴로 레베카에게 안겨들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을 괴롭히다니 정말 못됐네!”
율리안은 스스럼없이 레베카에게 안길 수 있는 릴리가 부럽다고 잠깐 생각했다.
레베카가 바쁜 탓에 둘은 얼굴을 맞댈 시간이 거의 없었다.
하루 종일 침실에서 레베카를 기다렸건만 그녀는 베개에 머리를 대기가 무섭게 잠에 빠져들었다.
제가 대신 일을 하겠다고 말해도 레베카는 탐욕스럽게 제 몫의 일을 껴안았다.
지쳐 보이긴 해도 일을 하는 동안 레베카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기에 율리안은 말릴 수도 없었다.
율리안은 씁쓸한 얼굴로 조금 심술궂게 말했다.
“맞아. 못된 놈이지. 그러니 릴리 다음에 제플린 데본셔를 만난다면 정강이를 세게 차 줘야해?”
“그래도 돼?”
“그래. 대신 정강이를 찬 다음엔 바로 나에게 달려와. 그놈이 날뛰어도 내가 지켜줄 테니까.”
율리안이 장난스레 입꼬리를 끌어올리자 릴리도 그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레베카는 기가 차서 쏘아붙였다.
“동생에게 참 좋은 걸 가르치시네요. 요하네스 공작님.”
“그러는 당신은 제플린의 것을 찼잖아. 정강이는 그에 비하면 약과라고.”
“그건…….”
“베키가 뭘 찼는데?”
릴리가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자 레베카는 말을 삼켜야 했다.
레베카는 조용히 율리안을 흘겨봤다.
그 모습이 귀여워 율리안은 낄낄거렸다.
“응? 베키가 뭘 찼냐니까?”
“있어. 작고 하찮은 거.”
“그게 뭐야?”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확실히 그때 통쾌하기는 했지.
문득 제플린의 섬찟한 협박이 떠올랐다.
“아, 그렇지. 율리안. 나 무술을 좀 가르쳐줘.”
“무술?”
“응. 지난번에 내가 얼마나 약한지 깨달았거든.”
“좋은 생각이야. 예전부터 당신이 단련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 가녀린 게 미의 덕목이라니, 이 나라는 참 이상해.”
율리안이 기지개를 쭉 펴더니 레베카의 팔을 넌지시 주물거렸다.
“무, 무슨 짓이야.”
“근육이 얼마나 있나 확인 중이야. 예상대로 아무것도 없군. 뼈와 가죽만 들고 어떻게 걸어 다니는 거야?”
“그 정도야?”
“어. 심각해. 릴리가 당신보다 더 강하겠어.”
“아무리 그래도 아이보다 내가 더 약할까.”
“정말이야. 릴리 엄청 강해. 무력에 관해선 천재라고.”
“맞아! 나 강해!”
릴리가 자랑스럽게 어깨를 쫙 폈다.
아무리 잘 쳐줘도 제 허리춤도 안 올 것 같은 신장이었지만, 어린 몸엔 벌써부터 잔근육이 붙어 있었다.
그래, 릴리는 역사에 길이 남은 천재 기사가 될 운명이었지…….
“아이고, 이 힘없는 것 봐.”
율리안이 레베카의 팔을 흐느적거리며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그 모양에 레베카의 자존심이 상했다.
레베카는 신경질적으로 율리안의 손에서 제 팔을 낚아챘다.
“나도 하면 할 수 있거든? 당장 수련 시작해!”
그녀는 화를 낼 때 꾀꼬리처럼 목소리가 높아졌다. 잔소리마저 노랫말 같았다.
레베카는 예전보다 자신에게 솔직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부부 침실 효과란 게 있다더니 정말이었다.
입이 찢어져라 웃고 싶은 마음을 애써 달래며 율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좋아. 그럼 지금 당장 시작해볼까?”
“나도 같이 할래! 베키, 나도 도와줄 수 있어.”
“하지만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있어. 내일부터 하자.”
당장 어떤 자세부터 가르치면 좋을지 머리를 굴리던 율리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김이 잔뜩 새어 나간 목소리로 되물었다.
“또 일이 있어? 오늘 일은 끝났다고 했잖아.”
“걱정 마. 간단한 일이야. 서신 하나면 되거든. 라본느 살롱을 살릴 서신.”
레베카의 눈에 광채가 돌았다.
그녀를 찬찬히 보던 율리안이 슬쩍 웃었다.
“짚이는 게 있구나.”
“맞아. 우리 결혼식 때 불행해 보이던 사람이 있었거든.”
“제플린 아니야?”
“아니, 그 사람은 원래 지옥에 있던 사람이었고, 그 여자는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었지.”
“그 여자?”
“응. 페튜니아 후작 부인.”
공작 성의 숲이 바람에 흔들렸다.
바람을 따라 완연히 물든 낙엽이 흩날렸다.
레베카의 눈매가 날카롭게 치솟았다.
* * *
페튜니아는 서신 끝에 적혀 있는 ‘레베카 오벨리아 공작 부인’이라는 한 줄의 이름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친애하는’으로 시작했으면 보통 제 이름만 쓰기 마련인데, 레베카는 또박또박 새로 얻은 제 직위까지 써 놨다.
‘과시하려는 거야?’
붉은색 편지지에 금색 잉크로 정갈하게 쓴 서신은 받는 이의 기를 죽이려는 것처럼 지나치게 화려했다.
편지지에서 풍기는 진한 장미향수 냄새도 코를 싸매게 했다.
티파티에 초대해달라는 간곡한 내용과 다르게 도발적인 서신이었다.
평범한 서신이었다면 페튜니아는 코웃음을 치며 레베카의 부탁을 거절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레베카가 참석하지 않은 티파티에서 그녀가 이곳에 오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며 신나게 입을 놀려댔을 것이다.
그러나 도전장이나 다름없는 서신이라면 상황이 조금 달라진다.
페튜니아는 꼬리를 말고 도망칠 꼴이 될 바에야 확실히 짓밟아 주는 편을 선택했다.
그녀는 자신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연보랏빛 편지지를 꺼내들었다.
소량의 악마의 발톱으로 색을 낸 편지지였다.
페튜니아는 얼마 남지 않은 편지지를 들춰보고는 이걸 사용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악마의 발톱은 원래도 웬만한 귀족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값비싼 염료였는데, 최근 들어 그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었다.
혜성처럼 등장한 식물학자가 악마의 발톱의 숨겨진 효능을 발표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악마의 발톱이 만병통치약이라는 소리를 아무도 믿지 않았다. 말도 안 된다며 헛소리 취급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바그너 백작이 악마의 발톱을 복용했고 결과는 놀라웠다.
고질병인 허리디스크가 씻은 듯이 나은 그는 10년은 젊어진 몸으로 펄펄 날아다녔다.
이후로 악마의 발톱은 부르는 게 값이 되었다.
게다가 악마의 발톱의 효능을 찾아낸 식물학자의 뒷배가 율리안 요하네스 공작이라는 소문이 은밀하게 돌고 있었다.
페튜니아는 결국 연보랏빛 편지지를 한 쪽으로 치워두고 하늘색 편지지를 집어 들었다.
정말 그 식물학자가 요하네스 공작과 관련이 있다면 레베카는 이것보다 훨씬 진한 보라색 편지지를 만들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비웃을 만한 일은 하나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페튜니아는 심사숙고하며 서신을 써내려갔다.
얼핏 보면 친한 부인들 간에 주고받는 내용 같았지만, 내밀히 들여다보면 새로운 적수의 도전을 받아들인다는 진의가 숨겨져 있었다.
랭스터 가문의 직인까지 찍고 나서 페튜니아는 숨을 돌렸다.
이걸 받을 레베카가 분노해서 부들부들 떨기를 바랐다.
“좀 더 레베카의 신경을 긁을 만한 일이 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