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페튜니아는 조만간 열릴 티파티에 초대할 인원을 떠올려봤다.
대부분이 자신에게 충성적인 부인과 영애들뿐이었다.
그래도 불안했다. 레베카는 옛날부터 아무런 노력도 없이 제가 원하는 걸 손쉽게 가져가고는 했다.
결혼식에서 레베카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은 무시할 게 못 되었다.
레베카가 마음만 먹으면 제가 기를 쓰고 쌓아 올린 견고한 왕궁이 하룻밤 사이에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릴 수도 있었다.
“그건 안 되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른 페튜니아는 아차 싶어 얼른 손거울을 집어 들었다.
성질을 많이 부릴수록 주름이 빨리 진다고 했다.
거울 속에서 자신의 눈가를 문지르던 페튜니아의 시선이 귀를 향했다.
자신의 머리카락만큼이나 붉은빛을 자랑하는 루비 귀걸이가 달랑거렸다.
가을 무도회 이후로 페튜니아는 알리시아와 몇 번 정도 어울려 주었다.
그러자 알리시아는 자신에게 목숨이라도 빚진 것처럼 굴었다.
평민 출신이라더니, 하는 짓도 꼭 시녀 같았다.
지금 제 귀에서 영롱한 빛을 내는 귀걸이도 그저 스치듯 언급했음에도 알리시아가 알아서 갖다 바친 것이었다.
“그래. 알리시아, 고것이 있었지.”
페튜니아의 빨간 입술이 진한 호선을 그렸다.
그녀는 한쪽에 미뤄두었던 연보라색 편지지에 손을 뻗었다.
데본셔 저택으로 갈 서신은 10분이 채 되지도 않아 완성되었다.
“재밌는 그림이 그려지겠어.”
페튜니아는 만족스런 얼굴로 두 개의 서신을 들고서 하인을 불렀다.
* * *
“참 빨리도 도착했구나.”
레베카는 하녀가 들고 온 서신을 보고 웃음을 흘렸다.
예상대로 페튜니아는 금방 미끼를 물었다.
싫었든 좋았든 간에 페튜니아는 어릴 적부터 같이 어울려 다닌 사이였다.
어릴 때는 퍽 친했던 것 같은데, 데뷔탕트를 치른 이후부터는 앙숙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페튜니아가 일방적으로 레베카를 적대한 것이었지만.
“페튜니아 후작 부인이 라본느 살롱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서신을 살펴보고 있던 레베카에게 칸나가 다가와 말했다.
레베카는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아무런 동요 없이 서신을 마저 읽었다.
“어릴 때랑 수법이 똑같네. 뭐라고 지껄였다던?”
“제 집 하나 보살필 겨를이 없는 부인이나 갈 만한 곳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네.”
“이대로 두실 겁니까?”
“글쎄…….”
레베카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페튜니아의 서신은 레베카를 화나게 만들려고 작정한 말들만 골라서 적혀 있었다.
지조 없는 부인의 최후라든가, 돈만 좇던 부덕한 여인의 이야기 따위를 계속해서 언급하면서 레베카는 그런 결말 없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말로 끝맺었다.
티파티에 오는 걸 수락하겠으나 네가 참석한다면 이런 류의 담소를 나눌 참인데 괜찮겠니? 하는, 일종의 경고장이었다.
“기 싸움은 피곤한데 말이야.”
레베카는 싸움을 일으킬 바엔 피해버리는 쪽이었다.
하지만 라본느 살롱의 성패는 현 사교계의 여왕인 페튜니아의 손에 달려 있었다.
무작정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역시 지는 수밖에 없나?”
“한발 물러서는 게 백 보를 전진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도 있다고 배웠습니다.”
“네 말이 맞아, 칸나. 쓸데없는 자존심은 빵 한 조각도 살 수 없는 법이지.”
레베카가 매달린다면 페튜니아는 자비를 내리는 척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수도 있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라본느 살롱을 부활시켜 제플린의 가신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신의 부인을 살롱의 단골로 만들어야 했다.
레베카는 알리시아와 제플린의 결혼식 날 자신을 친히 배웅했던 부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그녀들은 예전의 자신처럼 분출되지 못한 분노를 가슴 깊은 곳에 꾹꾹 눌러 담고 있었다.
레베카는 그녀들이 분노를 터뜨리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페튜니아의 비위 정도쯤이야 못 맞출 것도 없지.”
레베카가 의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칸나는 전쟁터 같은 티파티가 끝날 때즈음엔 레베카의 속에 울화가 가득 차 있을 걸 예상했다.
그래서 레베카가 돌아오기 전에 적당한 샌드백과 화를 다스리는 좋은 차를 준비해 두어야겠다고 다짐했다.
* * *
페튜니아의 티파티가 있는 아침, 데본셔 백작저는 평소보다 더 소란스러웠다.
“이것도 아니야! 저걸 내와 봐!”
알리시아는 하녀들이 분주하게 가져온 드레스와 장신구들은 모두 바닥에 내팽개쳤다.
분명 어젯밤에는 마음에 들었던 드레스가 오늘은 형편없게 느껴졌다.
오늘은 그녀가 처음으로 초대받은 티파티였다.
페튜니아는 자신의 초대에는 군말 없이 따르긴 했지만, 정식으로 랭스터 저택으로 자신을 초대한 적은 없었다.
페튜니아의 티파티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서운했다.
그동안 그 여자에게 갖다바친 선물들은 알리시아의 한 달 치 생활비를 웃도는 금액이었다.
콩고물만 받아먹고 입을 싹 닫는가 싶어 발을 동동 굴리던 찰나에 드디어 그녀가 티파티 초대장을 보내왔다.
그것도 악마의 발톱으로 색을 낸 보라색 편지지에다가!
그건 페튜니아의 측근만 받을 수 있다는 편지지였다.
“랭스터 후작가가 광산으로 재미를 좀 봤다고 하더니, 정말인가 보군.”
제플린마저 칭찬한 편지지였다.
알리시아는 편지지에서 라일락 향기가 사라질 때까지 페튜니아가 보낸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았다.
“이게 좋겠어!”
드디어 알리시아가 드레스를 선택했다.
분홍색 새틴 원단을 주름잡아 커다란 리본 여러 개를 달아놓은 드레스였다.
가슴께를 장식한 자잘한 레이스가 발랄한 느낌을 주어 그녀와 꽤 잘 어울렸다.
하지만 이건 알리시아가 만삭이기 전에 가을드레스를 미리 맞춰둔 것이었다.
배가 부를 것을 감안해 넉넉하게 만들긴 했지만 문제는 예상보다 그녀의 배가 더 컸다는 점이었다.
하녀가 우려스럽게 알리시아를 올려다봤다.
“하오나, 마님. 이 드레스는 사이즈가 맞지 않아 답답하실 겁니다. 다른 걸 골라보세요.”
“임부용 코르셋을 최대로 줄이면 되잖아. 난 오늘 이걸 꼭 입어야겠어.”
“그럼 배 속의 아기에게 안 좋은 영향이…….”
“내가 누누이 일렀지. 내 말에 토 달지 말라고! 난 레베카와 달리 그리 만만한 주인이 아니야!”
알리시아는 금방이라도 하녀를 때릴 듯이 손을 치켜들었다.
몸을 움츠리던 하녀는 결국 그녀의 말을 따랐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알리시아가 자신의 탓으로 돌릴 확률이 컸다.
알리시아의 기분에 따라 고용인들의 생사가 결정되었다.
기억을 잃은 제플린은 알리시아에게 지나치게 관대했다. 그 탓에 데본셔가의 고용인들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차라리 제플린이 날뛰던 그때가 그리울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그이는 어디를 간 거야. 내 목걸이를 골라줘야 하는데!”
“백작님은 잠시 외출하셨습니다.”
“또? 설마 카…….”
알리시아는 다음 말을 삼켰다. 제플린이 카지노를 드나드는 게 소문이 난다면 자신에게 좋을 것 하나 없었다.
황제파의 신하들은 신전과 관련된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면 안 되었다.
자히드라는 평소엔 자비로웠지만 배신자에 대한 척결만큼은 매서웠다.
게다가 제플린은 카지노에 단순히 게임을 즐기러 가는 게 아니었다.
그간 알리시아는 옥타비오의 눈을 피해 똘똘한 사냥개 하나를 제 편으로 만들었다.
콜린은 아직 어린 소년이긴 했지만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는 게 꽤 귀여운 아이였다.
최근 제플린의 외출이 잦아 혹여나 다른 여자가 생겼나 싶어 그를 미행하게 했다.
그녀의 걱정과는 다르게 제플린은 외출할 때마다 매번 카지노로 향했다.
이것까진 대부분의 사냥개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영민한 콜린은 제플린이 카지노를 찾는 이유를 오랜 시간에 걸쳐 알아냈다.
제플린이 카지노를 향하는 날에는 어김없이 교황 데스라치노가 카지노를 방문했다.
카지노는 신전의 소유였기에 표면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제플린은 귀빈실에서만 게임을 즐겼고, 그곳에 데스라치노도 합석하곤 했다.
무슨 이유였던 간에 그는 주기적으로 교황을 만나고 있었다.
갑자기 신앙심이라도 솟은 걸까.
분명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어딘가 께름칙해진 알리시아는 콜린에게 이를 옥타비오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줬다.
‘차라리 여자를 만나는 게 나았을지도…….’
감당 못할 비밀은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힘주세요! 마님!”
“흡!”
제플린을 향한 걱정은 매섭게 조여오는 코르셋에 잠시 잊혔다.
알리시아는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죽을 것 같았지만 아름다움을 위해선 이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벌써부터 자신을 칭송하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듯했다.
* * *
랭스터 후작의 저택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유서 깊은 가문답게 곳곳에서 예스런 기품을 엿볼 수 있었다.
저택 자체만으로 유적이라 불릴 정도로 가치가 높았지만, 알리시아의 눈에는 그저 그런 오래된 저택일 뿐이었다.
‘그렇게 기고만장하더니 데본셔 백작저보다 훨씬 작잖아.’
알리시아는 내심 승리감을 느끼며 마차에서 내렸다.
순간 땅에 발을 내디딘 알리시아가 높은 구두에 휘청였다.
훤칠한 하인이 얼른 다가와 알리시아를 부축했다.
“부인, 괜찮으십니까?”
“저도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또 다른 하인이 다가와 알리시아의 다른 쪽 팔을 잡았다.
그도 눈이 뜨일 만큼 미소가 아름다운 사내였다.
둘러보니 랭스터 후작가의 하인 중 대다수가 평균 이상의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엇비슷하게 생긴 미남들로 구성된 걸 보아 페튜니아의 취향이 반영된 게 분명했다.
알리시아는 코웃음을 쳤다.
‘페튜니아. 이 음란한 것…….’
랭스터 후작이 페튜니아에게 총애를 주는 만큼 페튜니아도 후작에게 지극정성을 다했다.
보통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부부일 경우 스캔들이 잦은 법이었다.
하지만 페튜니아의 경우 조금의 잡음도 없었다.
페튜니아는 정부 출신이라는 점이 약점이 되지 않게 만반의 주의를 기울였다.
그런 페튜니아라도 들끓는 젊은 피를 숨기지 못하겠는지 잘생긴 하인을 대거 고용했다.
페튜니아가 그들을 침대로 끌어들이는 일은 없었지만 눈요깃거리는 되었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늙은 남편이 주지 못하는 욕구를 잠재웠다.
그런 내밀한 속사정을 알아차린 알리시아는 떠오르는 조소를 숨기기 위해 부채로 입을 가렸다.
살랑이는 부채 사이로 백조 깃털이 보기 좋게 나부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