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티파티는 랭스터 저택의 후원에서 열렸다.
느티나무가 드리운 운치 있는 연못 옆으로 기다란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알리시아!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참석해줘서 고마워요.”
페튜니아가 반갑게 알리시아를 맞았다.
“아니에요. 여기 잘생긴 하인들이 도와줘서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굳이 잘생겼다라고 언급하는 알리시아의 말에 페튜니아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미리 와 있던 부인들이 알리시아의 발언을 두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오늘은 알리시아가 중요한 역할을 할 차례였다.
어차피 그녀는 평민이었다. 알리시아는 딱 기대치만큼의 짓을 한 것에 불과했다.
페튜니아가 싱긋 웃었다.
“제 보잘것없는 하인들을 좋게 봐주시니 고맙군요. 이리로 오세요. 서 있기 힘들죠? 저도 웨슬리를 가졌을 때 이맘때가 가장 힘들었답니다.”
페튜니아는 자신의 옆자리로 알리시아를 안내했다.
모여 있던 부인들이 뜨악한 얼굴로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평민 정부를 모임에 초대한 것도 모자라 주최자의 옆자리에 앉히다니.
대체 페튜니아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말도 안 되는 사태에 아무도 반기를 들지 않았다.
뒤이어 등장한 손님의 정체가 모든 것을 설명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참 아름다운 정원이군요. 페튜니아.”
“어서 오세요. 레베카. 그동안 격조했습니다.”
여유롭게 단풍을 구경하며 차를 음미하던 알리시아는 페튜니아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을 듣고 차를 내뿜을 뻔했다.
알리시아는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뒤를 돌아봤다.
레베카도 알리시아가 있을 줄은 몰랐는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당신이 제게 초대해달라는 서신을 보냈을 때는 이미 알리시아를 초대하고 난 뒤라서요. 혹시 불쾌하신 건 아니겠지요?”
‘이것 봐라…….’
페튜니아가 의기양양하게 레베카를 바라봤다.
레베카가 비록 페튜니아에게 져줄 기세로 이곳에 참석하긴 했으나 얕보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레베카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불쾌할 일이 뭐가 있나요. 한때 한 가족이었던 사이였는데. 여기 계신 누구보다 친한 사이인걸요. 안 그런가요. 알리시아?”
“그, 그러게요.”
“제 결혼식에 초대했는데 오지 않아 섭섭했어요. 몸이 안 좋았다고 들었는데, 오늘 보니 괜찮은 것 같네요.”
레베카는 불쾌해하기는커녕 오히려 만반에 미소를 지으며 살갑게 알리시아를 대했다.
페튜니아가 이를 가는 소리가 연못을 울리는 것 같았다.
여태껏 본 적 없는 흥미진진한 광경에 티파티의 손님들은 숨을 죽였다.
페튜니아가 사교계의 왕이라면, 레베카는 황제였다.
‘드디어 페튜니아의 호적수가 나타났다!’
부인들은 눈앞의 쿠키를 집어 먹으며 페튜니아와 레베카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신경전을 즐겁게 관람했다.
* * *
“신혼 생활은 어떠세요? 공작님이 잘 대해주시나요?”
데보라 부인이 궁금증을 못 참고 레베카에게 물었다.
페튜니아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녀의 위협은 데보라 부인의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다른 부인들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는지 다들 귀를 열었다.
레베카는 새신부답게 수줍은 미소를 얼굴에 띠었다.
“이런 말을 하면 주접인 것 같지만……. 율리안이 정말 잘해줘요. 그이는 아주 다정하답니다. 그리고 젊어서 그런지 아주 힘이 넘치네요.”
자세한 설명은 생략했지만 그 숨겨진 이야기를 노련한 부인들은 순식간에 낚아챘다.
이곳에 모인 부인들의 남편 대부분은 중년에 접어들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어머어머!’를 남발하며 진심으로 레베카를 부러워했다.
대화의 주도권이 레베카 쪽으로 흘러가자 페튜니아가 얼른 알리시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젊은 건 데본셔 백작께서도 만만치 않죠. 알리시아도 참 좋겠어요. 특히 요즘 데본셔 백작께서 애처가가 다 되었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어떤가요?”
‘친히 초대한 값을 하란 말이야.’
페튜니아는 무언의 압박이 담긴 시선을 알리시아에게 보냈다.
레베카의 드레스에 달린 레이스와 자신의 레이스의 질을 비교하고 있던 알리시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알리시아를 향했다.
“제, 제플린도 제게 아주 잘해 줘요. 사실 오늘도 집에만 있으라고 성화였답니다. 산달이 다 되어 가니 아주 지극정성이에요.”
말을 마친 알리시아는 흘깃 레베카의 눈치를 살폈다.
레베카는 마음껏 지껄여도 신경조차 안 쓴다는 듯 우아하게 찻잔을 들었다.
알리시아의 말에 페튜니아는 먹이를 발견한 이리처럼 뒷말을 낚아챘다.
“역시 자식이 생긴다면 소년도 어른이 되는 법인가 보네요. 데본셔 백작님이 그리 좋은 남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자식이 생기니 알리시아를 이렇게 아끼는 걸 보면 그래요. 제 남편도 웨슬리를 낳고 나니 절 보는 눈빛부터 달라지더군요. 이곳에 모인 분들은 모두 잘 아시겠지요.”
페튜니아가 부인들을 찬찬히 둘러보며 말했다.
그녀는 일부러 자식이 있는 비교적 젊은 부인들만 초대했다.
레베카가 후계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어 백작가에서 쫓겨났다는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페튜니아는 한술 더 떠 레베카의 손을 지그시 잡으며 말했다.
“레베카도 얼른 아이를 가지셔야죠? 요하네스 공작가는 후계가 귀하다 들었는데,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최대한 많은 시도를 해봐야죠. 그래도 공작님께서 그렇게 혈기가 왕성하시다고 하니 금방 생기겠네요?”
알리시아조차 페튜니아의 발언에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표면적으로 아무도 언급을 하진 않았지만 레베카가 불임이라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져 있었다.
여기서 레베카가 화를 내거나 속상해하기라도 한다면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이 문제를 건드리다니, 페튜니아가 선을 넘었어.’
알리시아는 조여드는 코르셋에 답답한 속을 달래며 배를 쓰다듬었다.
레베카가 데본셔 백작가를 떠난 지 꽤 되었다.
게다가 그녀는 이미 재혼까지 했다.
알리시아가 레베카에게 품은 악감정이 조금 줄어들었다.
관심은 아직 많았지만 제플린이 그녀에게 잘 대해 주기도 했고, 곧 아이가 태어날 거란 생각에 알리시아는 레베카를 측은히 여기기까지 했다.
‘페튜니아가 아예 짓밟아 버리기로 작정했구나. 내가 저런 소리를 들었다면 화가 나서 눈물부터 났을 거야.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건 여자의 가치가 없다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동시에 레베카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은근슬쩍 그녀가 이성을 잃고 부들거리는 모습이 보고 싶기도 했다.
레베카는 자신의 손을 쓰다듬는 페튜니아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계획대로 그녀에게 바짝 엎드릴지 아니면 왕좌를 찬탈할지 고민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페튜니아는 확실히 레베카의 아픈 부분을 건드렸다.
분명 그곳이 상처투성인 걸 알면서도 지그시 누른 것이다.
그리고 레베카는 그런 무뢰배를 용서할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침묵이 가라앉은 가운데, 레베카가 페튜니아의 손에서 제 손을 슬며시 빼내었다.
“상관없습니다. 율리안은 저만 있어도 행복하다고 하니까요. 오히려 남편에게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자식에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지요, 자식을 내세워 사랑받으려고 하니까요. 이 짧은 생에 자식밖에 남은 게 없다니. 얼마나 가여운 사람들입니까. 그에 비하면 저는 아주 축복을 받은 것 같네요. 온전한 저를 사랑해줄 남편을 드디어 만났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제 남편은 숨겨둔 정부도 없답니다.”
비교적 얌전하게 있던 레베카의 눈빛이 맹수의 것으로 변했다.
푸른 안광이 번쩍 튀는 것 같았다.
페튜니아와 알리시아가 동시에 주먹을 꽉 쥐었다.
“풉.”
데보라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곳에 있는 정부 출신 두 명이 사이좋게 부들거리는 꼴이 우스웠다.
“어머. 죄송해요.”
페튜니아의 이글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데보라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컵케이크를 집어 들었다.
통통한 편인 자신의 아들을 웨슬리가 아카데미에서 따돌리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페튜니아에게 하소연을 했지만, 페튜니아는 아이들의 장난에 부모가 나서는 것만큼 꼴불견은 없다고 일축했다.
‘그 어미에 그 아들이지.’
데보라는 레베카를 향해 은근한 시선을 보냈다.
사교계를 휘어잡는 법칙은 간단했다.
누구에게도 머리를 숙이지 말고 자신의 이득을 철저히 챙길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우아함을 잃지 말 것.
지금껏 페튜니아는 이 법칙을 잘 지켜왔지만 레베카의 등장으로 우아함이 빛바래지고 있었다.
우아함을 잃은 여왕은 끌어내려야 하는 폭군이나 다름없었다.
대세가 기울 것 같다는 확신이 들자 데보라는 아예 의자를 레베카 쪽으로 돌렸다.
“레베카는 언제쯤 파티를 열 생각이세요? 요하네스 공작 성이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들었어요. 한 번쯤 구경 가고 싶네요.”
데보라의 적극적인 태도에 부인 몇몇이 동조하기 시작했다. 너도나도 레베카에게 말을 붙였다.
레베카는 부쩍 제게 친밀하게 굴어오는 사람들을 질리듯이 바라봤다.
이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레베카는 알고 있었다.
페튜니아를 끌어내릴 새로운 우두머리를 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레베카는 박쥐 같은 부인들의 장단에 맞춰 자신이 직접 그 자리에 앉을 생각이 없었다.
이미 율리안과 결혼한 시점부터 자신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셈이었다.
굳이 피곤하게 싸움을 벌일 이유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요하네스 공작가에서 재미난 사업을 하나 한다고 들었습니다. 살롱 대여 사업이라고요?”
페튜니아가 다른 건수를 잡았는지 다시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물어왔다.
레베카가 부드럽게 응수했다.
“네. 맞아요. 지난번 제 결혼식 때 보셨으니 어떤 사업인지는 대강 아실 것 같습니다만.”
“제가 사업에 대해서 뭘 알겠어요? 전 그리 부지런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서요. 하지만 제 짧은 식견에도 조금 걱정이 되네요.”
“뭐가 걱정되신다는 말씀이죠?”
“원래 사업은 공략 대상이 중요하다고 들었습니다. 한데 보아하니 라본느 살롱은 졸부 평민이나 작위를 돈으로 사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 같은데요?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고 해도 그런 수준 낮은 이들의 돈을 받으면 격이 떨어질까 우려가 됩니다. 카트린느 황녀께서도 이를 우려하고 계시더군요.”
“저는 괜찮은 것 같은데요?”
알리시아가 레베카의 편을 들고 나섰다.
레베카가 네가 웬일이라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